2024년 5월 6일
카다케스는 휴양지로도 유명하지만, 살바도르 달리가 아내 갈라와 죽을 때까지 함께 살며 작업을 했던 곳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기 전, 달리의 전시관도 집도 가봤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지.
일단 아침 식사부터 시간 순대로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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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케스에서의 3일 차,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아쉬움이 몰려왔다. 이 도시를 떠나는 게 유독 아쉬운 이유는 숙소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에서 집 전체를 빌린 건 이곳이 유일했다. 방도, 거실도, 부엌도 따로인 데다 널찍한 테라스까지 있었다.
담요를 두르고 햇볕 아래 앉아 있으니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부엌에서 이것저것 챙겨 와 테라스 테이블에 거한 아침상을 차렸다. 아침은 황제처럼 먹어줘야지.
전날 마트에서 토마토, 치즈, 하몽, 크래커를 샀다. 여기에 친구가 포르투에서 사 온 호박잼과 토마토잼을 곁들여 먹었다. 너무 달지 않아 재료의 맛이 느껴지면서도 치즈나 하몽의 풍미를 확 살렸다. 쌀이 들어갔다는 요거트까지 후식으로 야무지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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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맑은데 바람이 엄청 부는 날씨였다. 친구는 이 정도도 괜찮다며 짐을 챙겨 수영을 하러 나갔다. 자기만의 낭만을 충분하게 누릴 줄 아는 친구다.
나는 담요를 둘둘 만 채로 테라스에서 음악도 듣다가 책도 읽다가 글도 쓰다가 그랬다. 해가 완전히 떴다고 느낄 때쯤 느적느적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 바다 산책은 올드타운을 등지고 절벽 쪽으로 걸어가는 코스였다. 전진할수록 바람이 강해져 나중엔 안 넘어지고 걷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바닷바람을 이렇게나 많이 맞았는데 끈적함이 전혀 없다는 게 신기했다. 지중해는 소금기가 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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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만나 근처에 있다는 '달리 엑스포(Expo Dali)'에 가봤다. 정식 드로잉보단 잡지와 책에 들어간 삽화 위주의 전시였다. 크지 않은 3층 건물은 층별로 테마가 달랐다. 입장료는 인당 10유로.
여기엔 300점의 작품이 걸려 있는데, A4용지보다 작은 스케치부터 커다란 유화까지 장르가 다양했다.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달리의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녹아내리는 시계로 유명한 '기억의 지속'이 이곳에선 제일 모범생 같은 작품이었다. 달리 작가님 생전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가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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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그렇게나 많이 먹었는데 좀 걸었다고 출출해졌다. 도보 10분 거리에 영업 중인 베이커리 카페가 있었다. 'ES FORNET'이란 곳이었는데, 구글 평점이 낮아 기대 없이 들어갔다.
크림 크루아상, 사과파이, 키쉬에 커피를 주문했다. 빵도 데워주고 직원들도 친절한데 리뷰가 왜 안 좋을까. 아니면 친구와 내가 뭘 먹어도 맛있게 먹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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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부르겠다, 달리의 발자취 찾는 여정을 재개했다. 올드타운에서 도보 20분 거리엔 '포트리가(Port Ligat)'라는 작은 어촌 마을이 있다. 이곳엔 달리가 아내와 함께 살며 여생을 보냈던 집과 정원이 보존되어 있다. 집 안에 들어가려면 한두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아쉬운 대로 정원만 구경하기로 했다. 입장료는 8유로.
주인을 닮아 신기한 구조물들로 꾸며진 정원이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일관성 없이 놓인 구조물들을 관찰했다. 이곳에 40년을 살았다고 했으니, 정원의 규모가 큰 게 이상할 일도 아니다. 지붕 위의 달걀 장식을 마지막으로 달리의 집 구경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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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케스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버스는 저녁 6시였다. 버스로 피게레스까지 가서, 기차 타고 바르셀로나 산츠역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조로울 줄 알았지.
우선 카다케스에서 버스를 타려는데, 큐알코드가 인쇄된 승차권이 지난 날짜로 인쇄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올 때의 승차권과 섞인 모양이었다. 친구가 부랴부랴 이메일을 뒤져 제대로 된 큐알코드를 찾아냈다.
버스에서도 혼란은 계속되었으니, 친구 앞자리에 앉은 할아버지는 좁은 좌석을 한껏 뒤로 젖혔고, 내 맞은편 자리의 모녀는 쨍하고 큰 목소리로 대화했다. 그 와중에 버스는 예정시각보다 피게레스에 늦게 도착해 우리를 긴장시켰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승시간 30분 중 15분이 사라졌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딱 하나 서 있던 택시를 잡아 기차역으로 갔고,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승강장으로 전력질주했다. 10kg가 넘는 캐리어를 그렇게 휘두르듯 끌어본 건 처음이다.
결국 출발시간에 딱 맞춰 기차에 탄 우리. 바르셀로나로 이동하는 내내 널뛰기했던 우리의 운에 대해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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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출장으로 와서 몰랐는데, 바르셀로나도 호텔이 엄청 비싸다. 어쩔 수 없이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Hotel Esplugues'라는 호텔을 예약했는데, 1박에 2인실 기준 10만 원대 중반이라 모든 걸 감수하기로 했다.
이 숙소, 나쁘진 않은데 좀 특이했다. 침대 두 개가 일직선으로 마주 보고 있는 구조는 호텔에서 처음 봤다. 방은 좁은데 화장실은 꽤 넓고, 희한하게 베란다는 또 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풍경은 평범한 유럽 도시의 그것. 지난 5일간 낮밤으로 산과 바다만 봤더니 높은 건물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는데 고작 며칠을 자연 속에서 보냈다고 어색함을 느끼는 게 참 이상하다.
아무쪼록 잘 부탁해, 바르셀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