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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l 11. 2024

맛있고 따뜻한 기억으로 가득한 바르셀로나 여행

2024년 5월 8일

새로운 숙소에서 개운하게 눈을 떴다. 근교 여행할 땐 변덕스러웠던 날씨가 바르셀로나에 오니 거짓말처럼 찬란해졌다. 이런 날은 아침부터 외출해 줘야지. 숙소는 시내에서 꽤 멀지만, 대신 한적하고 조용해서 아침을 열기에 좋았다.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공원을 가로지르는 기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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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선지는 동네 카페, 'El Taller'라는 곳이었다. 페이스트리 종류가 많았고, 작은 크루아상들은 커피와 묶어 아침 세트처럼 저렴하게 팔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작은 건 취급 안 하지.


햄치즈 크루아상이랑 카푸치노를 주문해 매장 중앙에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 돈으로 5천원 정도에 즐기는 빵과 커피, 너무 좋다. 근데 맛집은 아닌지 맛은 무난했다.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들 사이에서 조용히 전자책 읽는 동양인 여행객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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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하나론 아무래도 아쉽지. 2분 거리에 'Tinyol'이란 조금 더 세련된 카페가 있길래 후다닥 이동했다. 바게트부터 샌드위치까지 다양한 종류의 빵이 진열되어 있었다.


짭짤이는 아까 먹었으니 달달이 차례다. 초코 크루아상에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는데, 2.95유로였으니 4천500원 정도인 셈이다. 빵순이에겐 여기가 천국이네.


동네의 사랑방 같은 카페인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젊은 사람들만의 문화 같은 우리나라 카페들이 떠오르며 기분이 묘했다. 우리나라의 노인들은 어디에서 커피를 마시고, 어디에서 친구를 만나지? 우리 할머니만 해도 내가 모시고 갈 때만 카페를 방문하시는데.


읽고 있던 전자책은 <불편한 편의점> 시리즈였는데, 70대 할머니가 주인공이자 편의점 사장님이라 더 생각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되어도 청바지에 니트 입고 동네 카페로 나들이 가는 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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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점심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눈을 떴다. 원래의 계획보다 스페인에 오래 있기로 한 친구는 새벽 3시까지 여행 일정을 짜다 잤단다. 피곤할만하지.


점심은 시내에 있는 'The Egg Lab'이란 브런치 카페에서 먹기로 했다. 채도 낮은 분홍색 인테리어가 매력적인 곳인데, 직접 와보니 공간이 커서 더 분위기가 좋았다.


풀드포크 위에 올라간 에그베네딕트와 크림치즈를 중간에 두껍게 바른 프렌치토스트를 주문했다. 에그베네딕트의 빵이 살짝 질긴 거 빼고는 완벽했다. 그리고 프렌치토스트... 친구 입엔 많이 달다던데 프렌치토스트는 달아야지 무슨 소리야.


바르셀로나엔 동네마다 역사가 오래된 좋은 바도 많지만, 트렌디한 카페도 몇 년 새 엄청 많이 생겼다. 음료만 주문해도 부담 없고, 음식까지 주문해도 미식의 도시에선 실패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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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스팟을 가볼까 하다가, 날씨가 아까워 무작정 큰길을 따라 걸었다. 파리처럼 바르셀로나에도 개선문이 있는데, 그걸 시작으로 광장 같은 공간이 커다랗게 이어진다.


바로 옆엔 1800년대 후반에 조성되었다는 'Ciutadella Park'가 있었다. 안에 동물원과 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엄청 컸다. 한 시간 반을 걸어도 반 밖에 못 봤다. 깔끔하게 정돈되기보다, 시간이 흐르며 이런저런 요소들이 더해진 느낌이라 더 좋았다.


보트를 탈 정도로 큰 연못, 큰 새들이 경계심 없이 돌아다니는 언덕들, 여기가 스페인인지 프랑스인지 모로코인지 헷갈리게 하는 구조물들. 입장료도 안 내고 이 모든 걸 구경해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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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인 나와 달리, 친구는 여행지에서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다. 외국인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금세 친구가 될 수 있는 그런 부러운 성격.


친구의 제안으로 에어비앤비에서 진행하는 타파스 바 투어를 신청했다. 서너 곳의 로컬 식당들을 돌며 다양한 타파스를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한 사람당 10만원 정도였다.


저녁 6시에 10명의 관광객이 모였고, 가이드 언니 덕에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나선 스몰토크가 힘들지 않았다.


투어에선 신기한 음식들을 잔뜩 먹었다. 상어고기 튀김이라던가, 아이올리 소스를 올린 대구 크로켓이라든가. '베르무트(Vermut)'라는 화이트와인에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음료도 처음 마셔봤다. 로컬 식당들이라 그런지 미트볼이나 오믈렛처럼 익숙한 음식들에서도 저마다의 개성이 느껴졌다.


푸드 투어인데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경험이었다. 한자리에 모인 10명은 나이도 인종도 다 다른데 비슷한 가치관의 사람들이라 느꼈다. 물질보다는 경험이 중요하고, 좋은 음식을 좋은 사람과 먹는 게 행복의 구체적인 모습이라 생각하는 것들이 비슷했다.


한국 문화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말레이시아인 부부, 미국을 떠나는 게 인생 목표라던 미국인 부부, 건강하게 여행하는 삶에 감사하는 스코틀랜드인 부부, 50년 넘게 인연을 이어왔다는 70대 미국인 할머니들, 그리고 우리. 여행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는 세 시간 넘게 일과 취미와 인생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했다.


샴페인으로 건배하며 잊지 못할 경험을 매듭지었다. 시끌시끌한 타파스 바 안에서 진솔하게 나눴던 각자의 꿈들이 모두 이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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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드 투어의 여운을 간직하고자 친구와 어둑어둑한 해변을 한참 걸었다. 투어에서 먹은 음식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차근차근 복기하며 주변이 깜깜해질 때까지 웃고 떠들었다.


벌써부터 이 도시와 작별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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