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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l 14. 2024

구엘 공원은 못 봤지만 전망과 음식으로 치유했다

2024년 5월 9일

여행의 반을 향해 간다. 전날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한국에서 먼저 연락이 와 커피챗을 했던 회사에게 잡 오퍼를 받았다. 사실 퇴사 여행이 아니라 이직 여행이었던 건가!


*

마음에 큰 짐을 덜었더니 잠을 네 시간밖에 못 잤는데도 개운했다. 아침 7시가 못 되어 외출했다. 숙소는 시내에서 꽤 멀지만 아침에도 여는 카페가 참 많다. 'Hibrid Cafe'는 산책하면서 눈여겨본 곳이었다. 연남동이나 성수동을 떠올리는 가게 분위기에 이끌리듯 입장했다.


'초코 봉봉'이란 이름의 페이스트리와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빵은 뺑오쇼콜라와 비슷한데 조금 더 달았다. 빵도 빵인데 커피가 진짜 괜찮았다.


솔직히 스페인은 커피를 잘하는 나라가 아니다. 요즘 생기는 카페들은 다르다는데,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페에선 커피 맛을 기대하면 안 된다. 특히 우유가 들어간 커피 메뉴들에선 이상하게 프림 맛이 나는데, 이 카페의 카푸치노는 우유가 제대로 들어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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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10년 전에 유럽 여행을 처음 왔을 때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곳들은 얼추 둘러봤던 터라, 관광 스팟들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었다. 다만 하늘이 이렇게나 티 없이 파랄 때 구엘 공원은 다시 보면 좋겠다 싶었다.


알고 보니 몇 주 전에 예약해야 입장이 가능했다. 한 시간이 걸려 왔는데 티켓이 솔드아웃이라니. 아쉬운 대로 창살 너머로 인증 사진은 남겼다. 위안이 되었던 건, 우리처럼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관광객들이 주변에 바글바글했다.


그냥 돌아갈 순 없으니 구엘 공원 옆에 있는 커다란 공원, 'Parc del Carmel'을 대신 돌아보기로 했다. 구글 리뷰를 훑어봤는데 '구엘 공원을 못 들어갔다면 여기서 전망 보는 것도 괜찮음'이라는 내용이 꽤나 많았다. 가보자고...


그렇게 예상치 못한 등산이 시작됐다. 못해도 계단 300개는 올랐을 거다. 오르막길과 돌계단의 무한 굴레에서 벗어나니 정상엔 멋진 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는구먼!


대도시답게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한데, 그 뒤론 쨍한 파란색의 바다가 시작과 끝도 없이 이어진다. 중앙엔 아직도 공사 중인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이 우뚝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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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분위기가 다른 바르셀로나,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마지막 날이니 무작정 또 걸어봤다. 확실히 첫날과는 다른 기묘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거대한 고양이 동상. 페르난도 보테로라는 예술가가 만든 유명한 동상이라는데, 어딜 봐서 고양이라는 거지...?


길바닥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가득하다. 푸드 투어할 때 가이드 언니가 알려준 건데, 식당이나 바 앞에 네모난 표식이 있으면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가게란다. 헤리티지도 마케팅으로 만들어내는 요즘, 이런 공식적인 구분도 괜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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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하면 또 올리브 아니겠냐며. 올리브는 잘 못 먹지만 선물용으로 올리브오일은 사고 싶었다. 그런데 운명처럼 'Oleoteca Gourmet'이란 올리브 전문 식료품점을 만났다.


다양한 맛의 올리브오일과 발사믹, 올리브 절임, 올리브오일 베이스의 화장품 등 상품 종류가 진짜 많았다. 한국인들에게 유명한 곳인지, 방문객 모두가 한국인이었다. 고민 끝에 친구 부모님과 우리 부모님 드릴 선물만 간단히 구매했다.


막무가내 시내 구경은 화려한 소품샵들에서 마무리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영화 <코코>를 떠올리게 하는 남미 감성의 화려한 가게였다. 화려한 무늬의 해골이 제일 탐났는데, 캐리어에 넣기는 좀 큰 데다 가격도 애매해서 그냥 눈으로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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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 오기 전, 유일하게 식당 두 곳을 예약했다. 하나는 이전 글에서 리뷰한 'Massana'였고, 다른 하나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Mont Bar'였다. 둘 다 미슐랭 원스타 레스토랑이다.


Mont Bar에서도 코스요리로 먹다간 지갑이 너무 가벼워질 것 같아 단품으로 먹기로 했는데, 꽤나 거한 식사가 되어버렸다.


✔️ Sea Bass Ceviche Toast

✔️ Sea Urchin and Smoked Stracciatella Vol-Au-Vent

처음엔 모든 손님에게 작은 크래커를 준다. 살짝 짭짤하면서도 특이한 시즈닝이 느껴져 입맛 돋우기에 좋았다. 우리가 주문한 애피타이저 두 가지는 정말 한입거리였다. 양이 적어 당황했지만 진짜 맛있었다.


✔️ Tuna Belly with Pine Nut Emulsion

✔️ Stingray a la Beurre Blanc with Caviar

메인으로는 참치 뱃살과 가오리를 주문했다. 첫 입은 쫄깃한데 몇 번 씹으면 녹아버리는 식감이라 너무 신기하고 맛있었다. 참치회를 많이 먹어본 건 아니지만, 간도 딱 맞고 풍미도 좋았다. 가오리도 결대로 찢어 크림소스에 절이듯 담가 먹었더니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 Razor Clams a la Donostriarra with Ponzu

✔️ Peas with Vanilla, Striped Venus Clam and Sage

계획대로라면 디저트로 넘어가야 하는데, 요리 하나하나가 특별한 맛이라 그냥 마무리하기가 너무 아쉬웠다. 그래서 폰즈 소스로 맛을 낸 조개회와 바닐라 거품을 올린 완두콩 요리를 추가로 주문했다. 여긴 맛없는 게 없구나. 평범한 식재료라 생각했던 완두콩마저 톡톡 튀는 식감이 재밌었다.


✔️ Pumpkin, Black Sesame and Goat Yogurt

✔️ Chocolate Bonbon, Pistachio Financier, Vanilla Choux

디저트로는 호박이 들어간 염소 요거트를 먹었다. 양쪽엔 고소하고 달큰한 호박 요거트가, 중앙엔 상큼한 오렌지 셔벗이 있었다. 처음엔 사각사각하다가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서비스로 추가 디저트가 나왔다. 초콜릿 봉봉, 피스타치오 크림이 올라간 휘낭시에, 바닐라 슈. 반입도 안 되는 작은 디저트들에 이렇게 또 기분이 좋아진다.


여기에 와인과 맥주 한 잔씩 마셨더니 총 164유로가 나왔다. 우리나라 돈으로 한 사람당 12만원 정도 낸 셈인데, 양은 적어도 맛으로나 가게 분위기로나 추천할 만한 레스토랑이다.


*

나는 습관으로나 취향으로나 꽤나 확고한 사람인데, 그걸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동시에 다른 사람의 취향에 대해서는 오픈마인드가 되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경험은 항상 웰컴이니까.


그니까 이게 무슨 얘기냐면, 나 혼자라면 못 갈 술집을 친구 덕에 가봤단 거다. 나는 사람 말소리보다 큰 소리의 음악이 나오는 곳이나 창문 없이 밀폐된 공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근데 이번엔 가보고 싶었다. 친구가 아니면 언제 또 가겠어!


'Mariposa Negra Cocktail Bar'는 목요일 저녁인데도 엄청 시끌벅적했다. 테크노 베이스의 음악이 쿵쿵 깔리는 공간이었고, 모두가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술이나 안주는 물론, 그걸 담는 술잔과 접시까지 직원들이 손수 만들었단다. 전형적인 부분이 하나도 없이 활기로 가득한 곳이었다. 분명 기분이 좋았는데 친구가 찍어준 영상을 보니 클럽에 처음 온 모범생 마냥 뻣뻣해 보였다.


친구는 진토닉을, 나는 과일 슬러시가 올라간 칵테일을 주문했다. 직원들이 수제작한 술잔은... 따가웠다.


아무튼, 목석같은 날 앞에 두고도 친구는 다행히 즐거워 보였다!


*

숙소로 돌아가는 길, 며칠을 연속으로 봐도 질리지 않는 바르셀로나 야경을 실컷 눈에 담았다. 해변을 따라 걸으면 가로등과 가게들에서 나오는 불빛으로 거리가 은은하게 빛났다. 조용할 때도 시끄러울 때도 나름의 매력이 있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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