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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Jun 02. 2019

유럽을 일요일에 여행한다는 것

포르투갈 코임브라 한적한 탐방기

포르투에 도착한 지 2주차. 평일 내내 열심히 일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할 일이 너무 많아 관광이라고 할 수 있을만한 외출은 하지 못했다. 포르투까지 왔건만, 도보로 걸어다닐 수 있는 곳들만 빙빙 돌고 기차는 커녕 버스 한 번 타지 못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맞은 일요일, 드디어 여가 시간이 주어졌다.


포르투의 어떤 일요일


유럽을 일요일에 여행한다는 것에 걱정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교환학생을 하던 시절 일요일은 집에 붙박혀 있는 날이었다. 까르푸도 열지 않고, 좋아하는 케밥집도 열지 않고, 갈곳이라고는 코인런드리나 성당 밖에 없는 요일.


기대를 소박하게 하기로 했다. 가고 싶었던 곳에 발이라도 딛는 것에 의의를 두자. 후기가 훌륭한 식당이나 기념품샵에 들르지 못한다고 상심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포르투에서 기차로 한시간 반 거리의 코임브라로 향했다.


Largo da Portagem


코임브라는 포르투갈의 대표적인 대학도시로, 코임브라 대학교는 유럽의 가장 오래된 대학교 중 하나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롤링이 이곳 학생들이 두르고 다니는 케이프를 보고 호그와트의 교복을 떠올려 냈다고도, 조아니나 도서관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도 알려져 있다.



보통 코임브라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기대하는 바는 세 가지 정도다.


1. 검은 케이프를 두르고 도시를 지나다니는 신비로운 학생들을 구경하는 진귀한 경험

2. 조앤롤링이 영감을 받았다는 조아니나 도서관의 내부에 압도되는 신비로운 경험

3. 코임브라의 대표 요리인 새끼돼지 통구이를 먹는 특색있는 경험


미리 말하자면 일요일에 방문한 나는 이중 한 가지만 달성할 수 있었다.


한가한 코임브라 대학교


전세계에 해리포터 덕후들이 포진해 있는 만큼 코임브라 대학교의 조아니나 도서관은 매우 붐비는 장소다. 1인당 10유로가 넘는 티켓을 구매해야 입장할 수 있으며, 그마저도 관람객을 제한해 내가 원하는 시간에 들어갈 수 없다.


코임브라 대학교 입장권


티켓을 구매하면 도서관에 몇 시에 입장할 수 있는지 적어주는데, 운이 나쁘면 티켓을 산 시점으로부터 2~3시간 후에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붐빈다. 그렇게 들어가도 내가 원하는 만큼 관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 단 10분을 머무르고 쫓기듯 퇴장해야 한다.


하여튼 이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코임브라 대학교에 도착한 나는, 가장 먼저 매표소로 달려갔다. 조아니나 도서관 입장 시간을 받아두고 여유롭게 대학교를 둘러 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입장권을 구매하자 매표원이 말했다.


“도서관에는 3시에 입장하면 돼요.”

“?”


3시를 5분 남긴 2시 55분이었다. 매표소와 도서관이 그다지 가까운 것도 아니라 티켓을 사자마자 대학교를 둘러볼 새도 없이 서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입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도서관 내부를 관람하기 전 먼저 학칙을 위반한 학생들을 가두던 학생감옥을 거치게 된다. 좁은 복도를 따라 오싹한 골방을 구경하며 든 생각은,


“습도 조절도 잘 되고 생각보다 쾌적하네.”


그리고,


“그런데 왜 여기 나밖에 없지?”


분명 한 타임에 60명씩 관람한다고 했는데, 들어온 사람들은 많아봐야 열 명 안팎이었다. 코임브라 대학교 학생들의 여름방학 기간인데다 일요일이라 관광객이 거의 없던 것. 설렁설렁 감옥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드디어 도서관 내부로 들어가는 2층 문이 열렸다.


Capela de Sao Miguel


도서관 내부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담을 수 있었는데(성당 사진으로 대체한 점 양해하시라), 등 뒤로 전율이 흐르는 멋진 경험이었다. 내가 대학 도서관에 와 있는 건지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매표부터 도서관 입장까지 정신없이 지나온 터라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출처: visit.uc.pt


총 3개 구역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의 한쪽 끝부터 저쪽 끝까지 모두 눈에 담으며 천천히 걸었다. 내가 이 아름다운 도서관을 종횡무진하며 지식을 쌓던 16세기 코임브라 대학생이라고 상상하면서. 공기는 적막했지만 오래된 책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서관이라기보다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고요한 생명력을 내뿜는 공간.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니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왔다. 이곳에 들어온 지 10분이 지났으니 퇴장하라는 신호였다. 꼼꼼하게 둘러보기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사람이 많았다면 넓은 것도 아닌 이곳에서 60명이 바글거리며 각국 투어 가이드의 음성에 둘러싸여 있다가 떠밀려 나왔을 것을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이 아니었다면 경험하기 어려웠을, 살아있는 도서관과의 조우.


닫힌 핏제리아


한적한 교내를 찬찬히 둘러보곤, 허기가 져 식당을 찾아 나왔다. 유명한 식당들은 물론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기차역으로 내려가는 골목을 구경하는 도중, 문이 열린 작은 식당을 찾았다. 네 개의 테이블이 전부인 소담한 곳이었다.



손님이라고는 노부부와 나뿐. 추천 받은 씨푸드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을 먹기 시작했다. 눈이 멀 것 같이 강렬한 볕이 작열하던 날이었는데, 신선한 요리와 차가운 술을 삼키자 온몸의 열기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유명한 새끼돼지 통구이를 먹었대도 물론 나같이 쉽게 감동받는 사람은 무척 행복했을테지만,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아쉽지 않았다. 한가한 식당 안에서 점원들의 수다를 배경음 삼아 기분 좋은 식사를 마쳤다.





남의 대학교를 구경하고 작은 식당에서 한 끼를 해결한 것이 전부인 싱거운 여정이었다. 일요일 여행을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쉽게 그렇다고 답하지는 않겠다. 놓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하지만 그냥 기차를 타는 것만으로 기분이 들뜨는 사람, 적막을 즐기는 사람, 붐비는 곳에서는 언제나 뒤로 물러서는 사람에게는 편안한 여행이 될 것이다. 로마 여행에서 콜로세움보다 가는 길 보았던 남의 집 창문이 더 기억에 남았던 종류의 여행자라면 더욱 문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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