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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인 May 21. 2019

중구에서 만난 우리는 왜 포르투에 가게 되었는가

평생직장이라는 환상

퇴사하고 싶지 않았다진심이다


벌써 세 번째 직장이었다. 고심 끝에 재고 따져서 마지막으로 고른, 남들이 부러워하는 회사였다. 모두가 젊고, 공유 오피스에서 커피와 맥주를 마음껏 마시고, 해외에 나가 창의적인 일을 했다. 그런데 언제나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이 어정쩡하고 불편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나와 계속해서 멀어지고 있는 듯한 감각.

‘조직생활이란 것이 다 그렇다. 모두가 자기가 아닌 사람을 연기하며 다니는 거고, 모두가 힘들지만 버티면서 사는 거고, 한곳에서 오래 머물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견디지 못할 거고, 결국 불안정하고 어려운 인생을 살게 될 거다.’

떠나기로 결심할 때마다 머릿속에 유령 같은 문장들이 떠올랐다. 사표를 내던진 뒤 나의 꿈을 찾겠다느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겠다느니 흔한 퇴사 에세이에 나오는 식으로 정신승리하고 싶지 않았다. 내 인생을 유행하는 납작한 틀에 끼워 맞추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잘 해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해방구가 입사 동기들과의 게릴라 회의였다.


이비스 쿠알라룸푸르


저희 회의 할까요?”


거창하게 말해 회의지 사무실에서 일하다 초주검이 된 직원들이 5분 정도 라운지에 모여 이 회사를 나가면 어떤 일을 하며 수익을 창출할 것인지 이야기하며 잠시 머리를 환기시키는 시간이었다. 주목적은 ‘우리는 회사를 나가서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며 개인으로서는 무능하니 우리를 받아준 이 회사에 감사히 복종하며 고목나무 매미처럼 잘 붙어있어야겠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허황되고 뜬구름 잡는 아이디어를 내며 허허실실하게 시간을 보냈다. 몇 번의 회의를 거치자 문제가 생겼다. 우리가 개인으로서 무능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곳을 떠나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서도 밥 벌어먹고 살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서 벗어났다. 상사에게 면전에서 모욕을 당했다거나 출근길 지하철에서 죽고 싶었다거나 매일 새벽 2시가 넘어서야 퇴근할 수 있었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었다. 따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거나 워낙 자유로운 인간이라 갑갑한 조직문화에 스스로를 끼워 맞출 수 없다는 이유도 아니었다. 우리 세 사람은 그냥 잘하는 것을 더 나은 환경에서 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회사를 나왔다. 


타이중 공원


결연한 마음이나 우리만의 철학은 그때도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없다. 우리 셋이 똑닮고 아주 잘 맞는 사람들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같은 직장이 아니었다면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전혀 다른 성향이라고 봐야 맞다. 그래서 마음 가볍게 함께 떠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우리를 묶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모든 일을 가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합심을 프로젝트 주민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낯선 도시로 살 것처럼 떠나서, 진득하게 발붙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는 의미에서. 며칠 만에 비행기 티켓과 아파트를 예약하고 랩탑을 챙겨 포르투에 왔다. 이제 막 아침이 밝았고 주방 식탁에서 거실 테이블에서 한창 스스로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생활이 맞지 않으면 다시 흩어져 저마다의 살길을 찾으면 될 일이다.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하나의 안정된 직장에서 평생 일할 수 있다는 생각도 환상과 다름없다. 대부분의 경우 불가능하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맛보지만, 근로자로서 성취해야 할 단 하나의 목표처럼 그려지는 판타지. 우리는 그 유구한 환상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허황된 현실로 발을 들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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