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없는 바보

전업작가로 살아남기

by 이수연


오후 두 시.

아침마다 두유 한 팩을 마신다.

오후 두 시는 아침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침이다.



편의점에서 2+1 두유를 사는데

아이보리 색과

갈색 두유 팩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자신 있게 아이보리 색을 집었다.

그림을 그리는 동료가 말했다.



작가님 마시는 거 그거 아니에요.

저거 저 갈색이에요.


?

아닌데요?

저 지금까지 이거 마셨는데요?

계속 마셨는데요?

내기하실래요?


(이양반이)

제가 색깔 하나 구분 못 하겠어요?

분명 갈색 팩이었다니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나는 당당히 아이보리를 집는다.

두 개 사면 하나 더.

그러니까 세 개를 산다.


*


오후 두 시.

작업실에 출근한 나는 두유 한 팩을 꺼낸다.

영롱한 아이보리가

내 손에 들어있다.


빨대를 꽂고

두유를 쭉쭉쭉.

어?

이 맛이 아닌데?


그제야 빨대에 가려진 문구를 본다.

'설탕 무첨가'

설탕이 들지 않은 두유를

내가 마셨을 리 없다.

내가 마신 두유는 쭉쭉 마시면

당이 머리를 후려치는 맛이었다.



거 봐요.

아니죠?



뒤에서 동료가 말한다.

이어서 바보라고 놀린다.

바보에 반박할 마음은 없지만 분하다.

최소한 신념 없는 바보가 되고 싶었는데.



신념 있는 바보는

그림쟁이의 색 감각을 믿지 않는다.

신념 있는 바보는

떡하니 써진 무첨가를 읽지 못한다.

신념 있는 바보는

내기까지 하자고 한다.



쓸데없이 건강한 맛의 두유를 다 비운다.

다시 먹고 싶지 않은 맛이기에

다짐한다.



신념 없는 바보가 되자.



어차피 바보 작가라면

신념이라도 한껏 버려

배우는 사람이라도 되자.



남은 아이보리색 두유 두 팩에

맹세해 본다.








아무생각 없는 글이 필요해서

아무생각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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