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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Oct 20. 2023

씹고 뜯고 맛보고 마시고?

소식좌 사회생활백서(2)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나는 옛날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바야흐로


 때는 21세기가 도래했을 무렵. 20세기에 태어난 나는 고작 유치원생이었다. 하지만 소식좌의 기질을 타고난 나는 늘 “그만 먹을래!!!”라고 외치며 점심시간, 유치원 선생님의 1:1 케어를 받으며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먹어야 했다. 아직도 생생하다. 다 먹고 뛰놀던 친구들과 반에 남아 혼자서 밥을 억지로 먹어야 했던 나.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엄청난 리더십으로 부반장을 맡았지만, 누구보다 우유를 먹지 않았고 네스퀵도 내게 우유를 먹게 만들지 못했다. 급식 시간에는 늘 “조금만 줘.”를 외쳤으며 남은 음식을 버릴 때면 담임 선생님의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드디어 식사에서 자유로운 때가 왔다. 바로 입술이 찢어진 것이다! 치과 치료를 받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나는 그대로 실신해서 의식을 잃었다. 아무런 예고 없이 풀썩 쓰러지면서 바닥과 입술은 의도치 않게 박치기를 했다. 앞니 두 개를 잃고 입술을 다섯 바늘정도 꿰매었다.

 그 후유증으로 나는 일주일간 등교를 하지 않았다. 피떡이 되어 검은색 실로 꿰매어진 입술은 고어 영화에 나올 법 할 정도로 징그러웠다. 앞니는 바로 치료를 받아 간신히 뿌리만 살려냈지만 이미 신경이 죽어 까맣게 변해있었다. 거대한 통증에 씹는 것은커녕 입을 벌리는 것조차 힘들었던 때. 나의 주식은 죽과 사과주스였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해?”



 어떻게든 나에게 뭘 먹이려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는 굳은 표정을 하며 내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셨다. 한창 반항하던 시기, 그 말은 엄마에게 비수였나 보다. 그렇게 일주일 뒤, 다시 등교를 시작했을 때 나는 늘 마스크를 끼고 학교에 나갔다. 그 징그러운 모습을 반 애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서.

 하지만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마스크를 벗어야 했다. 혼동의 사춘기인 나는 차마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다. 반 애들은 점심시간 종소리도 울리기 전에 몸을 반쯤 빼고 급식실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종소리와 함께 애들이 우루루 달려 나가고 혼자 반에 남을 때, 가방에서 꺼낸 것은 사과주스. 마스크를 벗지 않고 사과주스에 빨대를 꽂은 뒤 마스크 안쪽으로 주스를 삼켰다. 약 두어 달 동안 나의 점심은 늘 사과 주스 한 팩이었다.

 어찌 보면 외롭고 또 아픈 기억일 수 있지만, 솔직히 나는 그때 마음이 편했다. 반에 혼자 있는 것도 좋았고 억지로 밥을 먹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급식실에서 일어나는 분파 싸움(?)에 끼지 않아도 되고 점심은 주스 한 팩이면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때부터 씹기보다 마시는 게 마음이 편했다. 성인이 된 나의 주식은 사과주스에서 술로 넘어가버렸지만.


씹기와 마시기


 성인이 된 후 나는 요령 좋게 쓰러지는 법을 배워 얼굴을 크게 다치는 일이 줄었지만, 마시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씹기에 부담스럽고 배는 고플 때 두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가볍게 마실 수 있고 소포장이 잘 되어있으며 유통기간까지 긴 두유. 부드럽게 속을 달래주는 두유. 조금 더 든든하게 먹고 싶다면 바나나를 곁들인다. 바나나 하나에 두유 하나. 나름 건강식처럼 보이지만, 실은 음식을 먹기 싫은데 먹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터득한 요령이다. 자기 관리 코스프레라고 해야 하나.


 여전히 나는 마시는 걸 좋아한다. 술을 먹을 때에도 안주는 거의 먹지 않고 맥주만 벌컥벌컥 마시며(소리에 비해 얼마 줄지 않아 모두 신기해한다), 두유는 박스로 주문해서 필요한 만큼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마신다. 커피 또한 좋아하는데 출근길 커피 한 잔을 마시면 입맛이 떨어져 식사를 천천히 할 수 있게 도와준다. 또 식당에 가면 제일 먼저 물 한 잔을 마신다. 음식을 급하게, 과식하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게 배부른 것은 배고픈 것보다 괴로운 일이니까.


 어른들의 말 중 ‘복스럽게 많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나는 복스럽게 먹지 않는다. 대신 먹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무언가 꾸준히 마신다. 먹는 척하면서 마시고, 국물을 조금씩 마신다. “저 지금 먹고 있어요!!”를 열심히 어필하며 복스럽진 않아도 꼴 보기 싫지 않게는 산다.


 꾸준히 뭐라도 마시는 것. 이것은 소식인으로서 사회와 내 건장이 맺은 타협점이다.





이 매거진은 주 2~3회 연재 이후 브런치북으로 전환됩니다.

소식좌 사회생활 꿀팁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작가소개 : 이수연

남들보다 '덜' 먹는 사람.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더 먹어"였다. 성인이 되어 우울증과 함께 공황장애, 식이장애를 앓았으며 정신병원에 입원해서도 "더 드세요"를 가장 많이 들었다. 지금은 식이장애를 극복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위해 소식좌로 살아가고 있다. <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 등을 썼다.


Insta @suyeon_lee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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