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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연 Feb 10. 2024

나 사용설명서

#12 [경보] 행동요령 (2)

 [나 사용설명서]라는 단어는 뭔가 어색하다. 사용설명서라 하면 전자제품이나 기기와 어울리는 단어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사용설명서'를 필요로 한다. 갑자기 조절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던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던가. 그렇다, 우리는 이미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봤다. 


영화 <조커>의 한 장면


 영화 <조커>에 나오는 '아서'는 어느 상황이든 웃음이 나와버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웃음을 멈추지 않아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한다. 그런 아서는 다른 사람에게 명함을 건넨다. 웃음이 멈추지 않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람들은 흘긋 명함을 보고 이내 무관심으로 돌아간다.


 <조커>는 워낙 음울한 분위기의 영화인지라 '나 사용설명서'가 부정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가까운 사람에게 '나 사용설명서'를 건넬 때는 그렇게 음울하지 않았다. '나 사용설명서'를 받는 이 역시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이 무얼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어 마음이 편하다고 해줬다(속으로 귀찮아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말해주다니. 좋은 사람이다).


 '나 사용설명서'의 목적은 간단하다. 위급시 안전한 상황에 놓이는 것. 그리고 그 상황을 함께 하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도록(혹은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도록) 행동요령을 알려주는 것. 사람들은 아픈 사람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어려운 것뿐. 그럴 때 '나 사용설명서'를 건네며 당당하게 아파보자.



설명서의 기본사항


 설명서라 하면 어렵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앞서 <자살충동 매뉴얼> 브런치북에서 다룬 내용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나만의 사용설명서를 만들면 된다.


나 사용설명서

- 이름 (병원에 이송될 경우를 위해)

- 본인 연락처 (병원에 이송될 경우를 위해)

- 긴급 연락처 1/2/3 (가까운 지인 혹은 가족, 보호자로 올 수 있는 사람의 번호)

- 긴급 연락처와 본인과의 관계 (비상 연락 시 참고할 수 있음)

- 복용 약물 (신체/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면 복용하는 약물을 기재_응급실에서 복용 약물을 알 경우 처치가 달라질 수 있음. 약 봉투 혹은 처방전을 통해 약물 확인이 가능)

- 치료이력 (경찰, 소방 등 응급으로 이송될 경우 참고할 수 있음)

- 주치의 병원 (응급실이 있는 병원을 다닐 경우 응급진료를 해당 병원에서 받으면 의료기록을 볼 수 있어 치료받기 좋음, 응급 대처를 받을 수 있음)

-그 외 기타 사항 (공황장애일 경우 : 약물을 보관하는 위치 / 병원비 수납이 필요할 경우를 대비한 사용 가능 카드 등)

- 주의사항 (가까운 관계에게 사용설명서를 공유할 경우 참고할 수 있을만한 사항 ex. 갑자기 주저앉아도 놀라지 마세요, 공황장애 증상 때문입니다. / 자살 충동이 있을 경우 제대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주치의가 있는 병원으로(혹은 보호자에게) 이송해 주세요. / 실신 혹은 자살 충동이 강할 경우 000에게 연락해 주세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나? 물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현타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나 사용설명서'를 작성하다 보면 '내가 이런 것까지 적어야 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번 작성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전달해 본다면 마음이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 사용설명서를 받아 들고 그나마 편한 미소를 짓는 사람의 얼굴을 보며.


 조금 현실적으로 얘기하면 나는 수전증이 있다(알코올 중독의 여파인지, 약 부작용인지 모른다). 굉장히 손을 많이 떨어 처음 보는 사람이 춥냐고 물어볼 정도다. 개인적으로 손을 떠는 것이 부끄러워 더 신경을 썼는데 웬걸. 신경을 쓰니 손을 더 떨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말해버린다.



제가 건강이 안 좋아서 손을 좀 떨어요.


 

 이 말 한마디의 용기(날티나게 말하자면 '선빵'을 날리는 것)가 나머지 시간을 모두 편안하게 해 준다. 아무리 손을 떨어도 그러려니, 묻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인사는 이름과 직업 뒤에 "손을 떱니다"라고 말한다. 내 마음도 편하고 보는 사람도 괜히 신경 쓰이지 않게.



나만을 위한 일이 아닌 모두를 위한 일


 주변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내가 건강하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게 되고 주변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걸 나 때문에 신경 쓴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미안함과 죄책감에 움츠러들어 말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당신의 상황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 첫 출근한 회사일. 답이 뭔지 알 수 없는 면접질문. '나 사용설명서'는 일종의 컨닝이다. 답을 맞추기 쉬운, 마음편한 방법. 그러니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선빵을 날리자.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이런 나와 함께 해달라고.





오늘의 숙제는 '나 사용설명서' 완성하기


*본문에 나온 '나 사용설명서'문항을 채워보세요


※숙제 : 나 사용설명서 완성하기

※심화과정 : 멋진 편지지에 담아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 사용설명서'전달하기


#12_자살 충동 매뉴얼 / 안전망 구축하기_[경보] 행동요령(2)


*현 자살예방을 직시하는 의미에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표현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표기하였습니다.

*새 연재물로 매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경우 자살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 전화하면 24시간 전문가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2024년부터 자살예방 전화가 109로 통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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