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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ug 24. 2022

제7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7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 전문)     


한밤의 산은 깊고 어두웠다. 정상 근처 바위 사이에 몸을 숨긴 태민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을 보니 지혜가 생각났으나 걱정되지는 않았다. 밤이라고는 하지만, 지혜는 눈을 감고도 마음대로 다닐 정도로 익숙한 산이다. 날쌔기로는 웬만한 동물 못지않아서 괴한들에게 붙잡힐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이미 호남의 집으로 갔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산 속에서 이런저런 동물들과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     


날이 밝으면 내려가기로 작정한 태민이 편안히 몸을 눕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괴한들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이리저리 생각을 해보았는데, 자꾸 백성원이 떠올랐다. 내심 백성원을 조직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터라 배신감이 큰 것 같았다.     


‘감쪽같이 나를 속이다니.’     


대체 괴한들이 누구기에 백성원이 굴복한 것일까? 오늘 백성원의 행동은 단순한 앞잡이라기보다 적극적인 동조자라고 볼만한 것이다.      

태민은 30년간 쌓아온 백성원과의 우정이 무너진 것이 가슴 아팠다. 함께한 세월을 부정당하는 것은 켜켜이 쌓인 피부를 벗겨내는 것만큼 아프고 힘든 일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평화가 내일의 격변으로 휘몰아친다. 어쩌면 격변의 내일이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최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일단 급류에 휩쓸리면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 그저 운명의 신에게 맡겨야 한다.     


태민은 괴한들과의 만남을 꼼꼼히 복기해보았다. 뛰어난 무술실력과 막강한 첨단장비로 무장한 정예요원들이었다. 

그들이 태민을 노린다는 것, 그것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납치하려는 것이라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살아있네! 셋 다 싱싱해!’

‘좋았어. 지난번 실수 만회하자고.’

‘유 선생! 물건 상태가 아주 좋아요. 

우리 고객이 기뻐할 것 같애. 조용히 갑시다.’     


괴한은 고글같이 생긴 특수 안경을 쓰고 태민의 몸을 꼼꼼히 스캔했다. 태민의 몸속에 그들이 찾는 뭔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장기밀매 조직인가? 그건 신빙성이 떨어졌다. 굳이 태민의 장기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으니까.    

 

‘싱싱하다... 그것도 세 개 씩이나?’     


피식, 태민의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서 싱싱하다는 괴한들의 말을 떠올리고 좋아하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 환갑이 넘었어도 칭찬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뭐가 싱싱하다는 것일까?  삼시충 어쩌고 했는데...

태민은 이내 추론을 포기한다. 어차피 결론이 나올 수 없는 상황이고, 실상 그 문제는 중요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태민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분간 병원도 문을 닫아야 하고, 집에 돌아갈 수도 없다. 몸을 숨기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     


‘이참에 이과수나 갔다 올까?’   

  

태민은 문득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와 이구아수 폭포를 떠올렸다. 

태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하고 싶은 일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그건 이구아수 폭포를 보는 것이다. 젊을 때는 반드시 보고야 말리라 작정한 적도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은 ‘그림 속의 떡’ 비슷한 것이 되고 말았다. 늘 처리해야 할 일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고, 막상 보러갈 만큼 간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상으로부터 단절을 생각하니 불쑥 이구아수 폭포가 떠올라 태민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그런 사치는 잊어버린 지 오래라고 생각했는데...’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상적인 공간 정도의 말일 것이다. 

태민에게 무릉도원은 이구아수 폭포다. 태민은 이구아수 폭포를 보고 있으면 온 몸이 간지러워진다. 기분이 좋아져서, 삐질 삐질 웃음이 새어나와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솟아나고, 공중에 날아올라 떨어지는 폭포 물줄기와 함께 춤을 추는 기분이 된다.   

   

이구아수 폭포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태민은 하마터면 화면 속의 폭포로 뛰어들 뻔했다. 그때의 아찔한 충동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언젠가 백성원과 잡담을 하다가 그 얘기를 했더니 상식이 풍부한 백성원이 재미있는 코멘트를 했다. 이구아수 폭포의 가장 중심에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곳이 있는데, 그곳을 1분동안 보면 근심걱정이 사라지지만 30분을 보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 이후 이과수에 가기를 포기한 것 같다. 정말 악마의 목구멍 속으로 빨려들어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약한 사람...’    

 

백성원을 떠올리니 다시 어제의 일들이 되살아났다. 여전히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떠올라 더욱 입안이 씁쓸했다. 가는 길은 달랐지만 언젠가는 동반자가 될 거라고 내심 믿던 사람이었다.      

허름한 기공 수련원에서 처음 만나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던 시절부터 태민과 백성원은 통하는 데가 많았다. 사람답게 사는 것에 목말라 했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살고자 노력했다.   

   

백성원이 사업에 성공해서 돈도 많이 벌었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인기도 얻었지만, 그것이 그의 목표일 리는 없었다. 궁극의 목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태민의 길에 합류해야 했다. 

적어도 태민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고 태민이 스스로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중요한,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지구의 주인으로서, 지구 생명의 시계가 점점 멸망의 시각을 향하는 지금, 깨어서 아는 사람들이 지구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류의 멸종이 불가피하다고 해도, 최대한 늦추는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태민이 속한 조직은 소박하나마 그런 뜻을 구체적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이나 꺼내볼걸...’    

 

태민의 얘기에 백성원이 어떻게 반응할지 훤하게 떠올랐다. 

둥그런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으며 신나할 것이다. 먹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잔뜩 흥분해서 떠들어댈 것이다. 그의 능력과 그의 열정으로 살림운동에 전념하면 조직은 훨씬 탄력을 받아 활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기다림은 미덕이지만, 적당한 때를 놓치면 부패하고 만다. 부패한 음식은 버리면 그만이나 부패한 시간은 여운이 남는다. 

태민은 백성원의 부패가 못내 아쉬웠다.  

   

봄이라고는 해도 새벽의 산 공기는 차갑다. 게다가 태민은 얇은 실내복 차림으로 밤을 지새운 터였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자 태민은 내려갈 채비를 했다.      

부지런한 호남은 벌써 일어나 새벽기도를 마쳤을 것이다. 일은 그만두었어도 신에 대한 치성은 빼먹지 않는다고 했다.     


호남은 서울에서 잘 나가는 점쟁이였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신들린 무당’이었는데, 정말 족집게도 그런 족집게가 없어서 새벽부터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하도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출산하는 당일까지도 손님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단도보살... 그것이 호남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단도처럼 단칼에 점괘를 낸다는 뜻도 있고, ‘단군 도깨비’를 줄여서 부르는 뜻이기도 했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고 무서운 것도 없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들 재림이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 아프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엄마. 나 뜨거워. 머릿속에 불이 들어왔어.’라고 하는데 머리가 열로 펄펄 끓었다. 

그날 이후 재림은 자주 아팠다. 병원을 들락거리며 각종 검사를 다 했으나 이상이 없다고 했다.    

  

묘하게도 외국여행을 가면 아프다는 말을 안 해서 호남은 틈만 나면 재림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지금 호남의 집을 꾸미고 있는 각종 골동품들은 그 과정에서 사들인 것들이다.     

폐업을 하고 지금 집으로 내려온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태민이 호남에 대한 소문을 들은 것은 그때부터이다.      


그런가보다 하고 지내던 어느 날 호남이 태민을 찾아왔다. 그것도 늦은 밤, 병원도 아닌 태민의 집으로.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열두 살짜리 덩치 큰 남자아이를 업고, 왔다. 시골로 내려온 이후 아프지 않던 재림이 또 고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날 태민은 두 번 놀랐다. 분명 40도 가까운 고열인데 재림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보통 열이 나면 몸에 나쁜 기운이 돌기 마련인데, 이상하게 재림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청량한 열이었다.     

또 하나 놀란 것은 호남의 힘 때문이다. 호남의 집에서 태민의 집은 상당히 먼 거리다. 그 먼 거리를 밤중에, 그것도 재림을 업고 달려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친해진 이후 그 얘기를 했더니 호남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마디 했다.      


‘몰랐어요? 나, 엄마예요.’      


그 말을 듣고서야 태민은 알았다. 엄마는 힘이 세다.   

  

산을 내려오면서 지혜 생각이 났다. 별일 없다면 지금쯤 호남의 집에 있을 것이다. 

마음은 급하게 호남의 집으로 향했으나, 태민은 멀리 주변을 돌며 상황을 살폈다.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이미 호남의 집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부터는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한다.     


집 후면을 돌아 앞쪽으로 가자 호남의 모습이 보였다. 

장승이 세워진 입구에서부터 집 정원까지 잘 꾸며진 도로가 있다. ‘도깨비길’이라고 불리는 이곳에는 호남이 수집한 여러 가지 골동품들이 꼼꼼히 배치되어 있다.      

호남은 그것들 각각에 대해 정성스럽게 기도를 올리는 중이었다. 힐끗 태민을 보고 호남은 하던 동작을 계속했다. 

자신을 모른 체하자 태민은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니, 산 사람 놔두고 죽은 거한테 기도하면 뭐해?”

“잘 살고 있는 사람, 뭐 하러 기도해요? 저 바빠요.”

“그러니까. 바쁜 사람이 왜 쓸데없이...”

“가져가지 말라고 비는 거예요. 됐어요?”

“아하!”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났다. 몇 번 도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개중에는 제법 가격대가 놓은 문화재급도 있어서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훔쳐간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명횡사나 그에 가까운 사고를 당해서 ‘가져가면 단군 할아버지가 혼내준다’는 말이 정설처럼 퍼졌다.   

   

‘가져가지 말라’고 기도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거짓말이다. 호남은 ‘사람들이 상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물건의 주인은 호남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자신만의 주인이 있다. 남이 강제로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혜... 왔지?”

“밤새 원장님 기다리다가... 아마 잠들었을 걸요?”

“갑자기 미안해. 워낙 너그러운 사람이라.”

“나중에 다 갚으세요. 이자 쳐서.”

“나 돈 없어. 알잖아.”

“돈은 나 많아요. 딴 거로 갚아요.”

“알았어! 말만 해.”

“아빠!”    

 

두 사람이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로 날카로운 지혜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돌아보니, 멀리서 달려오던 지혜가 벌써 태민의 품에 안겨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새벽 아침을 깨우듯 태민이 껄껄 웃었다.   

  

“하하! 뭐야? 애기야?”

“원장님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나 하고.”

“그래? 날 못 믿었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근데 왜 걱정을 해? 못 믿은 거지.”

“아빠 실력은 믿지.”

“그런데?”

“나이가 있잖아. 아빠 나이가...”

“뭐? 내 나이가 어때서?”     


황당해 하는 태민을 보며 호남이 심판처럼 손동작을 하며 소리쳤다.  

   

“한판 승!”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나무들 위로 솟아올랐다. 웃음은 인간의 특권이다. 

어젯밤 불의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다 해도, 아들이 귀신 들어 맥락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해도, 종말의 쓰나미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웃을 수 있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축복이다.  

    

가능하면, 최대한 많이, 우리는 웃어야 한다.


****


세 사람이 그렇게 소란스럽게 웃으며 집으로 들어서자 거실에 서 있던 재림이 미소로 반겼다.

당연히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호남이 놀라 소리쳤다.   

  

“아들! 벌써 일어났어?”   

  

재림은 벌써부터 세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을 지켜보던 터였다. 

그는 호남의 말을 무시하고 태민을 바라보며 두 팔을 벌려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나의 첫 사람.”

“뭐라고? 첫 사랑? 에이... 아무리 네 상태가 안좋아도 그건 아니지.”    

 

지혜가 약간 혀를 차듯이 중얼거렸다. 

호남은 태민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듯 쳐다보았고, 태민은 약간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지혜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태민을 보고 있었다.      

지혜는 재림의 엉뚱한 인사보다, 별로 놀라지도 않고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태민의 행동이 더 이상했다. 어떻게 보면 그건 재림의 말을 인정하는 태도였다.  

   

“이거, 약간 당황스럽네. 어쨌든! 깨어난 거 축하한다. 반가워.”   

  

태민이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재림이 다가오더니 덥석 태민을 껴안았다. 

태민이 또 한 번 당황했으나, 이내 껄껄 웃으며 재림을 감싸 안았다.     


“인류는 어차피 질 거야. 멸망하게 될 거라고.”    

 

재림은 태민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웃던 태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직 얼굴은 웃는 모양 그대로였으나, 사실은 꼼짝없이 얼어붙은 것이라고 하는 게 맞다.      


‘도대체 이건 뭐야?’     


태민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림이 말한 내용이 문제가 아니었다. 재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태민의 머릿속에 들어와 박혔다. 양궁 금메달리스트의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듯이, 축구선수 메시의 강슛이 네트에 꽂히듯이, 타이슨의 핵주먹이 상대를 바닥에 눕히듯이 그렇게 확실하게 태민의 가슴에 새겨졌다. 


‘인류는 어차피 질 거고, 멸망할 거’라는 재림의 말이 선언처럼 각인되었다. 의아하기는 했으나 의심이 들지는 않았다.     


“님아. 이젠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아도 돼. 싸움도 그만 해. 내가 왔잖아.”     


재림이 천천히 물러나며 태민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호남과 지혜도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였다. 

지켜보던 지혜가 재빨리 태민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아빠. 내가 얘기했지? 재림이가 좀, 그래...”     


호남은 관찰자 시점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재림이 신들린 것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별다른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태민에게 구차한 변명을 할 생각도 없었다. 미친놈이라고 화를 내며 가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욕할 일도 서운해 할 일도 아니다. 재림이 죽는 날까지 호남이 감당해야 할, 운명이다.      

그래서 호남은 절대 재림보다 먼저 죽을 수 없다. 재림을 지켜야 하니까. 미친 아들을 두고 어떻게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내 곁에 있어. 내 첫 번째 사람이 되어달라고.”

“재림아! 너, 우리 아빠한테 왜 그래?”   

  

태민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지혜가 소리를 높였다. 태민은 여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묵묵히 있을 뿐이었고, 재림이 웃으며 지혜를 보더니 불쑥 말했다.   

  

“맞아. 님도 내 사람이야. 내 두 번째 사람...”

“그럼 난 세 번째야? 서운하네.”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호남이 어울리지 않는 농담을 했다. 물론 아무도 그 말에 웃지 않았다. 

태민과 지혜는 심각한 표정이었고, 재림은 온화한 미소를 간직한 채 잠시 호남을 바라보았다.   

  

“나를 낳은 이여. 그 생각을 버리지 않고는 나의 사람이 될 수가 없다. 님이 나를 낳았는가?”

“그래, 아들. 내가 너를 낳았어.”

“그 생각을 버려. 그럼 님은 나의 영원한 사람이 될 수 있어.”

“...”     


호남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계속 장난스럽게 대꾸할 것인가, 진지하게 대할 것인가? 호남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너는 글씨를 써라, 나는 떡을 썰겠다... 각자 자신의 길을 가면 그뿐.   

  

“아들아, 이건 알아둬. 

지구가 부서져서 가루가 되어도, 백두산이 닳아서 운동장이 되어도,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지구가 멸망해서 모든 게 다 없어져도, 절대 변할 수 없는 사실 하나... 너는 내 아들이라는 것! 

왜냐? 내가 낳았으니까. 여기서, 이 뱃속에서 네가 나왔거든. 누가 뭐라고 해도, 그건 진짜야. 넌 내 아들이라고.”     


재림이 두어 번 눈을 깜박이더니 천천히 돌아섰다. 지혜는 살짝 겁이 나서 태민의 팔을 꼭 잡았다. 태민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두어 걸음 거실 중앙으로 간 재림이 돌아서더니 크게 말을 꺼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 세상 모든 것은 나타났다 사라진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는 것은 생각이다. 

이제 그 생각을 멈춰야 한다. 버려야 한다. 포기해야 한다. 

왜냐? 없기 때문에. 환상이기 때문에.     


내일이 있다고 말한다. 정말 있다면 가져와 보라. 지금 내게 보여주면 믿겠다. 

그러나 내일은 영원히 내일일 뿐이다. 오지 않는다. 헛것이다. 

어제는 분명히 있었다고? 역시 가져와 보라. 지금 여기 있지 않다면 없는 것이다. 

있었다는 생각에 속는 것이다. 착각이다.     

지금 이 순간뿐이다. 사실은 지금 이 순간도 없는 것이다. 역시 환상이다. 


그러나 일단은 있다고 믿자.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때까지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다. 나와 세상 역시 하나다. 

우리와 세상은 하나가 되어 빛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무것도!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정지하는 것이다. 

그동안 지속해온 시간을 끊고, 계속해온 행위를 끊고, 우리를 지배하는 감정과 생각과 사상을 버리고, 멈춰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행동이다.   

  

바야흐로 종말의 시대에 들어섰다. 인류는 멸종될 것이다. 

태양인들의 시계는 작동을 멈췄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지함으로써 그걸 늦추는 것뿐이다. 정지함으로써 저항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00일이다. 나는 님들과 100일 동안 함께 할 것이다. 

나는 님들을 구하러 왔다. 나를 믿어라. 믿으면 살 것이나, 그러지 않으면 예정된 죽음뿐이다.“    

 

갑자기, 듣고 있던 태민이 몸을 돌려 뛰어 나갔다.     


“아빠!”     


따라 나가려던 지혜가 멈춰 섰다. 거실 유리창 너머로 태민이 보였기 때문이다. 

태민은 혼란스러움을 추스르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재림이 그런 태민을 보며 중얼거렸다.     


“의심하는 자여...”     


그랬다. 태민은 의심하고 있었다. 재림의 말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상태를 의심하고 있었다. 

재림의 말에 한 점의 의심도 일어나지 않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왜 저 아이의 말을 부정하지 못하지? 미친 소리라고 웃어넘겨야 할 것 같은데, 왜 한마디 한마디가 쏙쏙 들어와 박히지? 

혹시 정신공격인가? 정말 강력한 귀신이 재림에게 들어갔나?’     


태민이 달려 나간 것은 일단 자리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태민이 극도의 정신력을 가진 실력자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없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행동으로 까지 옮기는 것은 웬만한 무공보다 훨씬 상승의 단계라고 봐야 한다.     


찬바람을 쐬니 약간 정신이 들었다. 정신 차리고 나니 조금 창피했다. 

정말 꼼짝없이 당한 꼴이다. 만약 적이었다면 손쉽게 제압당한 꼴이다.   

  

‘나름 고수를 자처하더니 꼴좋다.’     


쓴 웃음이 나왔다. 어제 백성원과 약속에서부터 계속 내리막 롤러코스터를 탄 느낌이었다. 요원들에게서 벗어날 것이 조금 잘했다 할까, 대체로 형편없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겨우 안정을 되찾은 태민의 등 뒤로 재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님아. 나를 확인하고 싶은가?”    

 

따라 나온 재림이 태민을 보며 온화하게 웃었다. 태민은 다시 긴장했다. 

이번에는 정신 제대로 차려야 한다. 저 자의 술수에 넘어가선 안 된다...   

  

“빈 병은 빈 병이지. 확인할 게 있기나 한가?”

“빈 병은 부술 수 있지만 난 안될 텐데. 확인해 보시게.” 

    

태민은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다. 

이제 스무 살도 안 된 남자아이의 몸을 하고 있지만, 저 속에는 어떤 고수의 영이 똬리를 틀고 있을지 모른다.     

“그럴 순 없어. 기억 못하겠지만, 아들처럼 가까운 사이야 우리.”

“님이 내 손을 잡을 수 있으면 내가 지는 것으로 하지. 날 잡아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싶었는데, 그 다음부터 자꾸 웃음이 나왔다. 머릿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괜히 웃기만 하게 되는 것이었다.     

 

태민은 의지력을 동원하여 재림의 손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재림은 쉽게 태민의 공격을 피해내었다. 연이어 몇 차례 더 시도를 했으나 어림없었다. 

태민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총동원하여 재림을 공격했다.     


호남과 지혜는 거실 안에 서서 두 사람의 싸움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싸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태민이 일방적으로 공격을 하고 재림은 슬그머니 피하기만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특이한 것은 재림의 동작이었다. 태민은 무술의 고수답게 다양한 동작으로 재림을 잡으려 했고, 재림은 태민보다 훨씬 느린 동작으로 그 공격들을 피해냈다. 피해냈다기보다, 어떻게 보면 먼저 피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재림이 피한 곳을 태민이 뒤쫓아 가는 형상이 많이 나왔다. 보고 있던 지혜가 믿어지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기적이라면 말이 되지.”     


호남은 재림의 현재를 믿기로 했다. 어떤 신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재림의 몸을 입고 역사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호남은 기적을 보았고, 보았으면 믿어야 한다.     


“아줌마! 저거... 저게 뭐야?”     


갑자기 지혜가 울듯이 소리를 높였다. 정신이 돌아온 호남의 시야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땀을 뻘뻘 흘리는 태민이 재림 앞에 무릎 꿇은 채 앉아있고, 재림이 태민의 머리에 손을 얹고 뭐라 말하고 있었다.      


그 위로 이제 막 떠오른 태양이 햇빛을 비추고 있었는데, 마치 두 사람에게 축복을 내리는 듯 아름다웠다. (제 7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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