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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Aug 28. 2022

제9화; 모든 것을 멈춰라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9화; 모든 것을 멈춰라

  

9. 모든 것을 멈춰라!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난 너무 가슴이 떨려서

우리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고 있네요.

이건 꿈인 걸 알지만 지금 이대로 깨지 않고서

영원히 잠 잘 수 있다면  

   

날 안아 주네요 예전 모습처럼

그동안 힘들었지 나를 보며 위로하네요

내 손을 잡네요 지친 맘 쉬라며

지금도 그대 손은 그때처럼 따뜻하네요  

   

혹시 이게 꿈이란 걸 그대가 알게 하진 않을 거야

내가 정말 잘할 거야 그대 다른 생각 못하도록

그대 이젠 가지 마요 그냥 여기서 나와 있어줘요

나도 깨지 않을 게요 이젠 보내지 않을 거예요 

    

계속 나를 안아주세요 예전 모습처럼

그동안 힘들었지 나를 보며 위로하네요

내 손을 잡네요 지친 맘 이젠 쉬라며

지금도 그대 손은 그때처럼 따뜻하네요  

   

대답해줘요 그대도 나를 나만큼 그리워했다고

   (박정현의 노래 <꿈에> 중에서)    

 

바람이 불어 노래 부르는 호남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 바람을 따라 호남의 노랫소리도 멀리 숲 쪽으로 함께 날아갔다. 

기쁨인지 슬픔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지혜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올랐다.    

 

‘꿈이면 어때? 지금 이 순간, 그냥 흘려보내지 않을 거야.’     


지혜는 지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호남이 가끔 흥얼거리는 걸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다. 

옛날 어릴 때, 박정현이라는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호남은 그 가수보다 더 가수처럼 노래했다.    

  

지혜는 넘치는 흥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슬금슬금 춤을 추기 시작했다. 호남의 노래에 맞춰 작은 정원을 흘러 다녔다.

꿈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지금 호남의 노래가 아름답고, 기타를 치는 태민의 모습이 사랑스럽고, 미소를 지으며 정원 변두리를 한가히 거니는 재림이 편안하다.      

이게 꿈이라면 나는 꿈을 살 것이고, 이게 현실이라면 이 현실을 만끽하리라. 지혜는 그렇게 감사하며 춤을 추었다.     


호남은 가끔 가수가 꿈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하고 재림을 낳았기 때문에 그 꿈을 펼칠 수가 없었노라고 아쉬워했다. 

그 못 다한 꿈을 지금 한껏 풀어내는 것처럼, 호남은 애절하고 간절하게 <꿈에>를 불렀다.     


“유원장! 세월이 좋구만!”     


꿈같은 시간을 보내던 그들을 깨운 것은 우렁찬 남자의 목소리였다. 

마침 호남이 노래를 마치고 태민이 기타의 피날레 연주를 하던 때였는데, 태민은 그 소리에 하던 연주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괜히 열심히 찾았어. 이렇게 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 미완! 안 그래도 연락해야지 하던 참이야.”

“그런 사람이 이러고 있나? 다 팽개치고 집을 나가서는. 자...”     


남자가 태민의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같이 온 30대의 청년이 배낭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신발도 있습니다. 네 것도 가져왔다.”

“난 지금이 좋은데?”     


청년과 지혜는 아는 사이인 듯 편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지혜가 맨발인 채로 훌쩍 한 바퀴 몸을 날려보였다.   

  

“너, 발에 피난다.”

“괜찮아. 조금 긁혔어.”

“별 일 없어 다행이네. 요즘 수상한 기색이 있어서 조금 걱정했거든.”

“그러니까. 나도 어제 이상한 일을 당해서 비상연락을 하려던 참이었어. 

어쨌든... 이렇게 왔으니 인사나 하지. 여긴 집주인 호남씨. 그리고 여긴...”

“미완입니다. 처음 뵙지만,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명성이 있던가요?”

“그럼요. 유명하셨잖아요. 단군 도깨비.”

“그만둔 지 오랜데.”

“그리고 여긴 황사범이라고,,,”

“처음 뵙습니다.”

“형사범?”

“아니, 형사범 말고, 황사범. 황인경 사범.”

“아... 저기는 우리 아들. 인사 드려.”   

  

멀찌감치 떨어져서 쳐다보던 재림이 미소를 지었다. 

미완도 마주 웃어보였지만, 황사범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렇게 큰 아들이 있어요? 동생인줄 알았어요.”

“일찍 낳았어요. 보람차게.”

“그러게요. 든든하시겠어요.”

“감사해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아버지한테요. 단군 할아버지. 늘 감사드려요.”

“아... 단군 할아버지.”     


단군 할아버지라... 미완법사는 호남과 황사범의 대화를 들으며 아주 잠깐 쓸데없는 생각에 빠졌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이다. 환웅은 하늘의 임금인 환인의 아들이고, 21일 동안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된 곰 사람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우리 한민족의 시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저 아이는 어떻게 되나? 


족보로 따지면 시조 단군의 아들이니,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엄청나군!’     

미완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재림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이번에는 재림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는데, 미완은 깜짝 놀라며 외면하고 말았다.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뭐지? 분명히 눈이 마주쳤는데 초점이 살짝 안 맞잖아? 

더 깊은 곳에 초점이 있어서 나를 빨아들이는 기분인데, 무슨 일일까?

“미완이면... 법명인가요?”

“아, 예. 그런 셈이죠.”     


다시 정신을 차려 재림을 보는 미완에게 호남이 말을 걸었다. 

미완은 시선을 거두어 호남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무허가 법사죠. 불교 교단 소속이 아니니까.”

“법에 소속이 어딨어요? 법사시군요.”

‘아관문이라고. 대전 세종 일대에서는 유명한 분이야.“  

   

태민의 보충설명대로, 미완은 충청도 지역에서는 꽤 알려진 실력자였다. 

태민과는 대학생 때 ‘민족문화 연구회’ 동아리에서 만났는데, 나이는 미완이 두 살 많았지만 서로 친구로 가깝게 지냈다. 중간과정에 서로 배우는 지향점이 살짝 다르기는 했으나, 그게 오히려 지금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측면이 있었다.      

태민은 주역 등 이론적인 학습에 능했고, 미완은 몸의 수련에 능해서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관심사를 토론하고는 했다.     


아관문은 미완이 만든 수행방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없던 것을 창조해낸 것은 아니고,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선과 행공을 결합하여 새로운 간판을 달았다. 

일반적으로 선은 좌선의 형태가 많은데,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한다. 그리고 운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관심 밖의 수련법이다.    

  

그래서 운동도 하면서 선을 하는 방법으로 개발된 것이 아관문이다. 재래의 ‘자발공’과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보통 자발공이 기의 순환에 의한 동작에 주목한다면 아관문은 그것을 무시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자발공은 ‘기공’에, 아관문은 ‘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선인데, 몸을 묶어두지 않는다는 점만 다른 것이다.     


미완은 오늘 아침에도 수련을 지도했다. 그리고 황인경 등 제자들과 대책을 의논하던 차에 연락을 받았다. 화목 병원의 윤 간호사가 비상연락을 해 온 것이다. 

안 그래도 어제 지휘부로부터 ‘주의’ 발령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상연락 전화가 울린 것만으로도 미완은 긴장해야 했다.

보고를 접한 미완은 수정에게 선원을 맡기고 황사범과 함께 급히 출발했다.  

    

윤 간호사의 요지는 이랬다. 태민과 지혜가 출근하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아서 집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고, 집안에서는 싸움의 흔적이 역력했다. 핸드폰과 신발이 그냥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되었거나 급히 도망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에는 신고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대체로 경찰이란 일을 복잡하게만 만들뿐 아니라, 경찰의 정보는 최우선적으로 적에게 전달되게 마련이다. 직접 상황을 파악한 후 일처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게 옳다.

여기서 적이란 물론 태양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미완은 태양인의 일방적 독주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 ‘지지지(지구를 지키는 지구인들)’의 회원이다. 물론 태민도 여기 소속이다. 

이들은 표면적으로 ‘지구를 지키는 환경모임’이나 ‘반전 반핵 평화 운동’같은 사회운동을 하기도 하고, 음성적으로 태양인의 계획을 저지하는 적극적 행동을 할 때도 있다. 더욱이 최근 태양인이 ‘지지지’ 세력을 적극적으로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한층 긴장감이 고조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할까? 정말 이상하군!’    

 

미완은 난장판이 되어있는 태민의 집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저들이 이렇게 심하게 압박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이런저런 갈등과 싸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지구의 발전 방향을 둘러싼 의견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서로의 생각과 노선은 달랐지만, 지구라는 행성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저들의 행동은 완전히 말살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특별히 이쪽에서 노선 변화를 시도한 적도 없는데 왜 저들은 적극적으로 탄압에 나서는 것일까?   

  

‘아무래도 박창호 선생을 만나봐야겠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기는 게 분명하니.’     


미완이 박창호를 떠올렸다는 것은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대체로 자기 잘난 맛에 산다. 미완처럼 독불장군 식으로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제멋에 사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은 웬만한 일에 주눅 들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헤쳐 나가고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미완이 도움을 받고 싶어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대단한 경지의 사람이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박창호의 정체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나이가 몇인지,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날 홀연히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곤 한다. 

떠도는 얘기로는 사명대사가 박창호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신라시대 최치원이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식의 황당무계한 얘기다.     


 그러나 그가 하는 얘기를 듣노라면 그럴 법도 하다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자신이 겪었다고 생생하게 묘사하는 내용이 모두 오래 전 역사 인물과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완은 박창호와 특별한 인연이 있다. 

40대 초반 한창 나이의 미완은 무술에 심취해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이 들어 박창호를 찾아다녔다. 한 수 겨루고 싶었다. 박창호는 무술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전국 각지를 돌아다녀도 박창호를 만날 수는 없었고, 미완은 박창호를 가공의 인물이라고 여기고 만나기를 포기했다.   

  

눈이 내린 겨울날이었는데, 미완은 선운사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미완은 선운사를 좋아한다. 지금은 이것저것 건물이 생겨 운치가 없어졌지만, 그래도 선운사에 가면 미완은 고향집에 온 것처럼 마음이 풀어진다. 절이라기보다는 집이다. 


그래서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거나 쉬고 싶으면 불쑥 선운사에 간다. 그날도 그렇게 불쑥 선운사에 갔다.     

겨울의 산은 일찍 어두워진다. 어둠에 쫓기듯 절을 빠져나와서 선운사 입구 삼거리를 지나려는데 누가 차 앞을 가로막았다. 

마주보고 웃길래. 태워달라는 줄 알고 남자를 태웠다. 50쯤 됐을까? 미완보다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는, 등산복 차림의 평범한 중년남자였다.     


“어디 가세요?”     


한참을 가도록 말이 없어서 미완이 먼저 물었다.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예?”     


미완은 어이가 없었다. 호의를 베풀어 차를 태워줬는데, 고맙다는 말은커녕 대뜸 반발이었다. 

고분고분 받아줄 미완이 아니다. 싸움이라면, 종류에 상관없이 자신 있었다.     


“아니면 누구한테 물어? 너 말고?”

“니가 알아서 해야지. 니가 태워줬잖아.”

“그래?”     


끼익! 미완은 차를 세웠다. 쓰레기는 빨리 버리는 게 상책이다.   

  

“내려.”

“...알았어. 싱겁긴.”  

   

남자가 입을 삐죽이더니 문을 열고 내렸다. 

문을 닫으려다 말고 남자가 한마디 더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미완은 그냥 가버렸을 것이다.     


“만나자 그래서 왔더니, 이게 무슨 봉변이람?” 

“...?”     


잠시 멀어지는 남자를 보고 있던 미완의 머리를 뭔가가 강하게 때리고 지나갔다. ‘박창호다!’ 하는 생각이었다. 

미완은 번개처럼 차문을 열고 달려갔다. 다행히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주었다.     


“선생님!”

“가르쳐준 것도 없는데 뭔 선생?”

“몰라뵈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괜찮아. 그러니까 애송이지 뭐.”

“애송이...? 저보고 하는 말인가요?”

“그럼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이 애송아.”

“허...!”     


미완은 기가 막혔다. 

애송이... 40년 넘게 살았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미완은 온 몸에 전의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중년남자, 즉 박창호는 빙글거리며 약올라하는 미완을 구경하고 있었다. 동물원 원숭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아주 좋게 해석하면 어린아이 재롱을 구경하는 어른 정도라고 할까?    

 

잠깐, 긴장의 밀도가 높아지는가 싶더니 미완의 손이 박창호의 몸을 향해 내밀어졌다. 

박창호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자연스럽게 그 손을 피했다. 미완이 좀 더 빠르고 강하게 박창호를 공격했으나, 박창호는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그 공격을 피해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방...     


사실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본 적이 있다. 

잠에서 깨어난 재림이 태민과 만났을 때, 태민이 재림을 공격하던 장면과 거의 유사했다. 세상에는 가끔 우리의 상식적인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분명히 싸움이 안 되는 상대였으나 미완은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세라는 게 있다. 어떤 사람들은 ‘기술보다 기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미완은 자신이 전성기에 있다고 굳게 믿었고, 세상 누구와도 겨뤄볼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등등한 기세가 미완을 버티게 해주었다.  

   

그러자 박창호가 대응수위를 높였다. 단순히 피하던 것에서 반박자 미리 미완의 공격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주먹을 내려고 하면 손목을 눌러주고, 발을 차려고 하니 무릎을 막았다. 

한동안 고장 난 인형처럼 발버둥 치던 미완은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졌습니다!”     


‘저절로 무릎이 꺾인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지만, 미완은 그게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 생각했지 사실이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미완은 그 말이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 묘사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이 꺾이니 무릎이 저절로 꺾였고, 허리가 접혀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 

진심으로 싸우고 완벽하게 패하면 완전한 승복을 하게 마련이다.   

  

“이제 좀 알겠어?”

“예...”

“뭘 알았어?”

“제가... 애송이라는 걸...”

“흠! 수고비는 뺐군.”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완이 온 마음을 다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머리를 드니 박창호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으나 미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말없이 가버린 박창호에 대한 서운함도 없었다. 

모든 것을 불살라 싸웠기 때문일까? 재만 남았으나, 그게 끝이 아님이 분명했다. 왠지 박창호와의 인연도 계속될 것으로 믿어졌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 미완은 그날 그 순간, 이제까지 해오던 모든 일을 포기했다. 그토록 몰두하던 무술의 길도 닫아버렸다.      

그리고 한동안 침잠의 시간을 보내다가 떠오른 것이 바로 ‘아관문’이었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고, 지구를 살리자... 

박창호는 미완에게 새로운 인생을 열어주었다. 

    

“나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여전히 위험한 상황 아냐? 아직 사태 파악도 안 되어 있고.”     


같이 가자는 미완의 제의를 태민은 거절했다. 당분간 여기서 지내겠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권하는 미완의 말투에 살짝 걱정이 묻어났다.     


“총회 소집하면 연락 줘. 그때 가지 뭐.”

“알았어. 만만한 놈들은 아닌 것 같으니 조심하고.”     


미완은 멀리 재림 쪽을 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재림은 호남, 지혜와 어울려 놀고 있었다. 

저 아이의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알 수 없으나, 태민은 지금 홀려있는 게 분명했다. 말하자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럴 때는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열이 내리고 사랑은 식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재림이나 호남의 기운이 탁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박창호 선생 만나보려고. 그 양반,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래? 나도 만나 뵙고 싶은데.”

“야! 저도 어떻게... 레전드 직관 원합니다.”     


옆에 있던 황인경이 호들갑스럽게 끼어들었다. 

태민이 남겠다고 해서 서운해진 미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애송인 안 돼.”

“아, 선생님! 제가 왜 애송이예요? 저 이제 서른넷이라구요.”     


대체로 나이 얘기가 나오면 그 대화는 끝나간다는 뜻이다. 보통 싸울 때도 마지막이 되면 ‘너 몇 살이야?’ 대사가 등장하지 않나? 

배운 사람이건 아니건, 무공이 높은 사람이건 아니건, 귀한 사람이건 천한 사람이건, 세상 살아가는 이치는 다 똑같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떠날 수 있었다. 

미완과 황인경이 간다고 하자 재림이 갑자기 ‘우리도 가지’ 라고 말했다. 물론 ‘우리’란 호남과 태민, 지혜를 지칭하는 것이다. 서울을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호남은 살짝 걱정이 되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서울... 호남의 모든 것이 그곳에서 일어났다. 

재림을 얻었고, 단군님을 만났고, 돈도 많이 벌었다. 아픈 재림 때문에 속상한 적도 많았다. 다시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어쨌든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 벌어질 일은 벌어지고, 될 것은 될 대로 된다.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읍내를 지나는 중이었다. 미완의 차가 앞서고, 호남의 차가 뒤를 따라갔다.      

화목병원 앞으로 갔으나 그냥 지나쳤다. 미완 일행과는 이미 작별인사를 했기 때문에 병원에 들를 수도 있었으나 태민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은 조심해야 했다. 그들이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모처럼의 드라이브에 들뜬 지혜는 뒷자리에 앉아 옆의 재림을 상대로 재잘대느라 밖을 보지도 않았다.     


‘가끔 바람이라도 좀 쐬줄걸.’    

 

태민은 조수석에 앉아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룸 미러로 보는 지혜는 마냥 신나는 어린애였다. 어쩌면 재림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재림에게는 이상한 흡인력이 있었다. 어떤 진공상태 같은 느낌인데, 마주해 있으면 내 안의 본성이 활기차게 자동 발산되었다. 

지혜의 말이 그다지 재미있어 보이지 않는데도 재림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얘기라도 되는 듯 적극적으로 리액션을 했다.    

 

“아니, 왜?”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호남이 갑자기 유턴을 했다. 앞 차에서 운전하던 황인경이 깜짝 놀라며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중장비 트럭 한 대가 무지막지하게 다가와 황인경의 차를 들이받았다. 호남의 차는 간발의 차이로 그것을 피해 반대 차선으로 돌아선 참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황인경의 차는 튕겨져 나갔고, 트럭은 반대편의 차와 충돌하고서야 멈춰 섰다. 호남이 갑자기 유턴을 하지 않았다면 태민 일행은 모두 사망할 수도 있는 큰 사고였다.  

   

‘그놈들 짓이구나!’     


몸은 자동적으로 미완 쪽을 향해 달리면서도 태민은 직감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제 9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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