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휘몰던 어느 날 그 어느 날 밤에
떨어진 꽃잎처럼 나는 태어났다네
내 눈에 보이던 아름다운 세상 잊을 수가 없어
가엾은 어머니 왜 날 낳으셨나요
봄 여름 가을이 또 겨울이 수없이 지나도
뒹구는 낙엽처럼 나는 외로웠다네
모두들 정답게 어울릴 때도 내 친구는 없어
그림자 밟으며 남몰래 울었다네..
-- (이용복의 노래 <1943년 3월 4일생> 중에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나는 6,7살쯤 되는 꼬마였고, 집 정원에서 단풍잎을 손에 들고 있었다.
정원 파라솔 아래에는 어머니와 두 동생이 한가하게 앉아 노닥거리는 중이었는데, 아무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나는 단풍잎을 보는 척하며 그들을 훔쳐보았다.
그때 갑자기 단풍잎에 불이 붙어 타오르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나는 단풍잎을 공중에 던졌고, 불붙은 단풍잎은 바람에 날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집은 화염에 휩싸였다. 나는 그 아름다운 붉은 색과 강렬한 열기에 취해 어찌할 줄 몰랐다.
그 순간,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온 어머니가 나를 낚아채더니 불타는 집안으로 던져버렸다. 후끈한 열기가 내 몸을 감쌌다.
아직 몸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는데,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내 몸이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아버지는 나를 정원 잔디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불꽃처럼 타오르나 했는데, 이내 나뭇잎처럼 공중으로 솟아올라 햇빛 속으로 사라졌다.
“아버지!”
나는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굳이 둘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익숙한 곳, 오피스텔 305호 내 방이었다. 한동안 꼭대기 층의 펜트하우스에서 지냈는데, 여기서 잤다는 것은 지난 밤 내가 많이 취했었다는 뜻이다.
잔뜩 취해서 행패를 부렸을 것이고, 파출소에 끌려갔을 것이고, 최민 변호사가 와서 구해줬을 것이다. 한동안 술을 멀리하며 지냈는데 결국 또 이렇게 되고 말았다.
요즘 나는 아버지에 관한 악몽을 자주 꾼다.
논현동 어머니 집에서 나온 이후 계속 되는 일이다. 그동안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나는 나름대로 간절했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나는 최민 변호사에게 뭔가 정보가 있지 않을까 추궁해보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협박도 해보고 애원도 했으나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했다.
내가 논현동 집 지하에서 본 것을 말해줘도 ‘아! 그런 게 있어요?’라고 놀랄 뿐 더 이상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나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만 받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투철이었다. 그날 지하에서 본 투철은 어머니와 밀접한 관계인 게 분명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날 본체만체 나를 무시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무조건 매달려야 한다. 뭔가 하나라도 아버지에 관한 단서를 찾아내야 한다.
투철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어렵싸리 회사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했더니 해외공연 중이라고 했다. 그날 이후 바로 공연을 떠난 모양이었다.
도착 즉시 만나려고 공항에 나갔다가 괜한 짓 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꽤 많은 투철의 팬들이 모여 있었고, 그들은 나보다 훨씬 간절해 보였다.
한심한 청춘들... 저들에게는 내일도 없고 오늘도 없고 자기 자신도 없다. 오직 연예인의 허상만 쫓아다니는 불나방의 시간뿐이다. 잠깐 스쳐지나가는 연예인을 위해, 저들은 지금 자신의 소중한 청춘을 소모하고 있다.
목적이 있었으므로 나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들을 혐오하면서, 그들보다 앞에서 투철을 맞이하려 했다.
그들은 나이 많은 나에게 무관심했다. 그러나 막상 투철이 출국장에 나타나자 그들은 열광하기 시작했고 나는 뒤로 밀려났다.
나의 목적은 그들의 무목적에 굴복 당했다. 어떻게든 투철에게 접근해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그렇게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드디어 투철을 만났다.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나는 투철이 숙소로 사용하는 호텔에서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성공했다.
늦은 밤 공연을 마친 투철이 지친 모습으로 로비에 들어섰다. 나는 얼른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투철씨! 오랜만예요.”
“아, 네.”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물어볼 게 있는데.”
“지금은 안 되겠네요. 제가 피곤해서.”
“나, 서우석씨 아들이에요. 아시죠? 서우석씨.”
“아 네... 안녕하시죠?”
“박효주씨는? 우리 어머니. 저번에 우리 만났잖아요? 논현동에서.”
“아뇨. 몰라요. 죄송...”
투철은 냉정하게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나는 보디가드인지 동료인지 모를 남자에게 제지당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투철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얘는 정말 모른다. 가짜구나!’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투철의 순수한 눈빛 때문이었을까?
모른다는 투철의 말이 진실로 받아들여졌고, 그 생각은 동시에 투철이 두 명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아버지의 육체가 두 개였듯이, 투철 역시 두 개의 몸을 가지고 있다.
논현동 집에서 본 투철은 진짜고, 지금 본 투철은 가짜다. 클론이거나 가게무샤다...
그리고 바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 같다. 투철이 가짜라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지하세계를 목격한 이후, 나는 그들이 외계인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아무런 증거도 없고 허황된 추론이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 결론에 의심이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들과 함께 지내온 시간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낯설게 느껴졌던,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풍기던 이상한 느낌들이 명확한 증거로 되살아났다.
나는 외계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사육된 인간이었던 것이고, 40년간 느껴온 이물감은 그것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외계인이라는 것, 어머니와 두 여동생이 외계인이라는 것, 그것 때문에 술을 마신 것은 아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나는 이상하게 놀랍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동안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풀린 듯 홀가분했다. 나를 옭아매고 있던 미혹의 실타래가 풀린 셈이었다. 근원을 알지 못하던 내 증오도 따라서 풀린 듯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해방된 즐거움으로 술을 마신 거냐고?
그렇지 않다. 나는 한 번도 즐거움에 술을 마셔본 적이 없다.
내게 술은 진통제였다. 술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나는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즐거움이나 쾌감이 아니라 안도감이 나를 지배한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 그 안도감을 기름 삼아 나는 술을 마시고, 나는 다시 증오심의 불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란과 행패...
어제의 기억이 되살아나면서 훅! 숙취가 올라왔다. 그와 함께 불쾌감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불쾌감은 증오심으로 모습을 바꾸어 나를 자극했다. 밤이었다면 또 술을 퍼부었을 것이나 참아야 한다. 입안 가득한 불쾌감을 견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이렇게 강력하게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오랜만의 일이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아버지를 미워하기는 했으나 그건 미숙한 배우의 연기처럼 초라한 것이었다. 미워한다기보다는 어린애의 투정에 가까운 것이었고 아버지도 그걸 알고 있었으리라.
묵묵히 나의 투정을 받아주는 아버지가 나는 내심 믿음직스러웠고 한편으로 고맙기도 했다. 사실은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투철을 올려 보내고 돌아서면서 조금씩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솟아올랐다.
투철이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은 바로 아버지가 진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내가 만난 아버지의 어느 부분이 진짜였을까? 내가 아버지에게 애증의 반항을 한 그 시간들은 진짜였을까 가짜였을까? 진짜가 있기나 했던 것일까? 말하자면 나는 가짜 아버지에게 내 진심을 다해서 사랑고백을 하고 있었던 셈 아닌가?
나는 진심으로, 강력하게,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고, 그 미움이 너무 독해서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방태준 회장을 생각해낸 것이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술에 취해 아버지에 대한 온갖 기억을 꺼내 소란을 피우는 과정에 떠올랐을까? 아니면 최민 변호사가 말해 주었던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방태준 회장을 기억해낸 것은 큰 소득이었다.
방태준 회장은 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집으로도 자주 찾아왔는데, 꼭 한밤중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녀가곤 했다. 방회장이 집에 오면 나는 귀신같이 알고 거실에 나와 길목을 지켰다.
방회장은 도둑고양이처럼 서있는 나를 보면 깜짝 놀라 말했다.
“이 녀석! 잠 안자고 여기서 뭐하노?”
그리고는 지갑에서 집히는 대로 돈을 꺼내 주곤 했는데, 나는 방회장이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랑에 배고파했다. 최근 한동안은 만난 적 없지만 나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방회장을 만나면 뭔가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이 커질수록 아버지를 찾아야겠다는 의지도 확고해졌다. 막연했던 목적의식이 구체적으로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어머니가 엔드게임 운운한 것은 전혀 떠올리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꼭 만나야한다. 만나서 따져 물어야 한다.
당신은 누구냐고. 나에게 당신은 어디까지 진짜였느냐고. 진정 내 아버지였던 적이 있기는 했느냐고.
방태준 회장은 7,8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발전을 말할 때 빠지는 않는 중요한 인물이다.
육사 출신의 군인이었는데, 60년대 말 정권 실세들과 밀착하며 경제계에 발을 디뎠다. ‘철은 산업의 쌀’이라면서, 제철보국을 내세워 제철회사를 세우고 세칭 ‘철강왕’의 이름을 얻었다. 교육 분야에도 과감한 투자를 하여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기술 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제철 회장직을 내려놓고 정치에 입문하면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대통령을 꿈꾼다는 말이 무성했다.
내가 집에서 방태준 회장을 보았던 것은 그가 정치를 시작하기 직전쯤이었던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본격적으로 정치를 하면서부터는 아버지와 교류를 끊었고, 그 후부터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내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면서 조금씩 이름에 흠집이 갔는데, 10여 년 전부터는 정신질환 증세로 여러 가지 말이 많았다.
나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한 적이 없다. 말하자면 방회장과 나는 극과 극에 있는 사람이다.
방회장은 최고의 사회적 성취를 한 사람이고, 나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40의 나이까지 백수로 지내는 사회 부적응자이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나는 약간 감상적이 되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호감을 표시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정신질환이라고 하니 나를 기억하기나 할까?
아무리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이라고 해도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지는 못한다.
사회생활 경험 얘기를 한 이유는 그때 방회장 집을 방문했을 때 느낀 불쾌감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냥 평범한 노인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번의 무시와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다.
사실 나는 그러한 대우에 매우 취약하다. 조직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특별히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을 견뎌낼 필요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제 막 사회생활에 첫걸음을 디딘 셈이었다. 전 같으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겠으나, 아버지에 대한 정보가 급해진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교육 따윈 필요 없다. 누구나 필요하면 하게 된다.
굳이 그 과정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스스로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뭔가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표시하고 싶어 한다. 그냥 만나게 해주면 될 일도 괜한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본다.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절대 나서는 법이 없다.
80 나이에 정신까지 온전치 않은 노인을 만나는데 무슨 따질 것들이 그리 많단 말인가? 어쨌든, 갖은 우여곡절 끝에 나는 방회장과의 만남을 허락받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회장님 과거와 관련된 얘기는 하지 마세요.
옛날 얘기 들으면 흥분하시거든요. 그냥 일상적인 대화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방회장의 개인비서라는 40대 여자는 거듭 당부를 했다. 아들 부부와 함께 산다고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개인비서가 방회장을 전적으로 케어하는 것으로 보였다.
‘일상 대화만 하라고?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라고!’
나는 매우 빠르게 사회화하고 있는 중이다. 전 같으면 밖으로 내뱉었을 말을 이제는 속으로 삭일 줄도 안다.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휠체어에 실려 들어온 방회장은 나를 보자 잔뜩 거만한 말투로 물었다.
나는 뜬금없는 그의 질문에 실망했지만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명근이에요. 서우석씨 아들...”
“아, 서우석이! 잘 알지. 근데, 느그 아부지는 머 하시노?”
“서우석씨, 얼마 전에 쓰러지셨어요. 정신이 없으세요.”
“저런. 나도 정신이 없어. 요즘 세상이 그래.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니까.”
“그래서, 아버지 얘기 좀 해 주세요. 아저씨가 저보다 아버지를 잘 아실 것 같아서 왔어요.”
“요즘 세상이 그래. 전엔 가진 걸 털어가고 끝인데, 요샌 정신을 통째로 가져간다고.
...너도 조심해.”
방회장이 뒤쪽에 서있는 비서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비서는 못들은 척 했으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게 분명했다.
방회장은 망상증 환자라고 했다. 한동안 어떤 세력이 자신을 없애려고 한다고 여기저기 하소연했던 모양인데, 결과는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어린애 다루듯 방회장에게 맞춰 대화를 나눴다.
“알았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요... 정신 찾아야 되는데, 뭐 좀 아는 거 없으세요?”
“니 아버지? 느그 아부지 어디 있는데?”
“찾는 중이라니까요.”
“욕본다. 그래, 니는 어데 사노?”
“그냥 강남 살아요. 논현동 집에서 나왔죠.”
“강남이 다 네 집이냐? 어디 사냐고?”
오피스텔 호수까지 꼬치꼬치 물어 대답했더니 갑자기 방회장이 내 손을 잡고 울기 시작했다.
그 나이에 집도 없이 사느냐고 불쌍하다고 했다. 아버지가 살아있으면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거라는 둥, 아버지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둥, 두서없는 이야기를 쏟아내었다.
내가 아버지는 죽은 게 아니라고 말했는데도 방회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까운 사람이 결혼 잘못해서 빛도 못보고 죽었다고 애석해했다.
결국 비서가 면회를 중지시켰고, 나도 방회장에게서 별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일어나기로 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방회장은 나를 잡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자네, 돈 좀 있어? 있으면, 나 돈 좀 주고가.”
“돈요? 무슨...?”
“내가 빈털터리야.
늙으면 돈이 있어야 대우 받는데, 저 인간이 돈을 안 줘.”
“아니에요, 회장님! 회장님 여전히 부자세요.”
비서가 웃으며 받아넘겼다.
나는 옛날 방회장이 어린 내게 용돈을 주던 때를 떠올리며 지갑을 꺼냈다. 그때 방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손에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방회장에게 주었다.
방회장은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100세 인생이라고 하지만, 80 노인의 현실은 서글펐다. 옛날의 패기와 자신감과 활달함은 간데없었다.
저렇게 초라한 인생을 살아야할 이유가 있을까? 50, 아무리 잘 봐줘도 60이면 인생은 마무리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50 이후의 삶은 절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혹시 그래서 아버지가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버지가 외계인이 맞다면, 그래서 영생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쇠락해가는 육체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나라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것만 같았다.
만약, 판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일이지만, 육체를 갈아타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과정을 통해 영생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판타스틱한 일 아닌가?
세상에 완전히 나쁜 일은 없다. 방회장을 만나 소득이 없었지만, 생각의 연쇄작용은 뜻밖의 결과로 나를 안내해주었다.
그동안 막연히 아버지를 찾겠다는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정체에 대한 구체적인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만약 외계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가정은 지금 단계의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우리 가족이 외계인이라는 것, 혹은 그와 유사한 특수한 존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당장 아버지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에게 갈 수 있는 내비게이션 지도가 켜진 느낌이었다. 목적지를 검색하면, 이제 길이 나타날 것이다.
희망은 잘 만들어진 요리 같다. 그 모양과 색깔에 과거의 부정적인 생각이 사라지고, 향기로운 냄새에 꺼져가던 생의 활력이 솟아오른다.
나는 바로 집으로 와서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였지만 막막하지 않았다. ‘외계인’ ‘영생’ 등의 허황된 단어들을 검색하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떤 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있다는 뜻이다. 꿈이나 환상도 믿지 않는 자에게는 헛것에 지나지 않지만, 믿는 자에게는 항상 진짜다.
그동안 허황된 말로 생각되던 프리메이슨, 대백색 형제단(The Great White Brotherhood), 샴발라, 신지학회, 지구영단(Spiritual Hierarchy) 등의 용어가 구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묘사했지만, 거기에는 어떤 진실이 내포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들의 생활을 힐끗이나마 보아온 나로서는 그 사소한 진실의 냄새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희망이 솟아올랐다. 어쩌면 아버지에 관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쾅! 쾅! 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번쩍,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힐끗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문으로 가는 중에 갑자기 내가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뜬금없이 그 영화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의 시작 지점에 낯선 자들의 방문을 받는 네오의 상황과 비슷하기는 했다. 나는 네오처럼 잠에서 깨어 네오처럼 문을 열었다.
“아저씨!”
나는 뜻밖의 사람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문 밖에는 낮에 만났던 방태준 회장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시간이 없어. 한, 삼십분? 길어야 삼십분이야. 빨리 얘기를 하자고.”
“이 시간에 여긴 어떻게...”
“어서 와 앉아. 얘기할 게 많아.”
들어온 방회장은 나를 잡아끌고 식탁 앞으로 갔다.
나는 ‘이 양반이 정말 제 정신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주소를 대충 말해주는 건데...
“느그 아부지...”
마음이 급했던지 말을 하던 방회장이 기침을 했다.
나는 또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하고 물어볼 게 뻔해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의 물을 꺼냈다.
“느그 아부지 그래 된 거는 둘 중 하나로 봐야 한다.
하나는 작정하고 계획을 세워서 빠져나간 거고, 또 하나는 납치당한 거다. 누군가가 니 아부지 영혼을 데려갔단 말이지.”
나는 대꾸도 않고 물을 방회장 앞에 내려놓았다.
방회장이 홀짝, 물을 마시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니는 그러면 안 된다.
남들이 다 나를 미쳤다 해도, 너는 내 말을 들어야 돼.”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면...”
“아니면 못 와! 너하고 얘기할 기회도 없는 거지.
30분! 어쩜 그 전에 올 지도 몰라.”
“와요? 누가요?”
“그 놈들. 나를 감시하는 놈들. 나도 너를 믿고 도박하는 거야.
너도 니 아버지 찾으려면 나를 믿어야 돼.”
“아저씨를 잡으러 온다구요?”
“그렇다니까.”
“그럼 일단 다른 데로...”
“소용없어. 내가 지옥 끝에 숨어도 찾아낼 거야.
내 몸에 GPS를 달았거든.”
방회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갑자기 풀이 죽은 방회장을 보니 나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우린 얘기를 계속해야 돼. 내가 붙잡힐 때까지 계속.
그리고 나는 또 정신병원에 가겠지.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어.
자, 이거.”
방회장이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휴대용 녹음기를 꺼냈다.
“틈틈이 내가 겪은 일들을 녹음한 거야. 저 놈들 정체를 까발리고 저 놈들 음모를 폭로하려고.
내가 주로 상대한 게 서우석이니까, 서우석 얘기가 제일 많을 거야.”
“저 놈들이라면...”
“태양인들. 공식 명칭은 태양인이야. 자신들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지.”
“아버지가 태양인이었나요?”
“태양인 109번. 그게 서우석의 정식 이름이지.”
“백구...”
나는 어머니를 만났을 당시 백구를 부르던 것을 떠올렸다.
방회장의 말이 앞뒤가 맞았다. 나는 방회장 앞으로 다가 앉았다.
“우리 어머니도 태양인이구요?”
“박효주는 1섹터의 주장이야. 핵심멤버지.”
“1섹터요?”
“저놈들은 지구를 12섹터로 나눴어. 그리고 섹터별로 자원을 관리하지.
1섹터는 우리나라, 일본, 만주, 몽골, 사할린 등을 포함하는 지역이야. 중요한 얘기 아니니까 넘어가자고. 시간이 없어.”
“믿을 수 없네요. 그럼 우리 집에서 저만 태양인이 아니었단 거잖아요? 동생들도 태양인이고.”
“이상한 일이지. 말하자면 성골집안인데, 웬일인지 잡종 똥개가 태어난 거야.
말이 너무 심했나? 미안해.”
“아뇨. 저도 제가 똥개인거 알아요.”
“그래서 물어본 적이 있어. 어떻게 된 거냐고.
그랬더니, 사고가 있었다고 그러더라고.”
“사고요? 어떤 사고...”
“이상한 일이기는 해. 저놈들은 감정이나 생각에 휘둘리는 일이 없기 때문에 아니라고 결론이 나면 가차 없이 치워버리거든.
근데 너를 살려두고 보살펴주기까기 한 걸 보면.”
“아버지가 그랬죠.”
“그러니까! 넌 니 아버지한테 감사해야 돼.
나하곤 달라. 나는 애증이 뒤얽힌 복잡한 관계지만.
아, 벌써...”
규칙적인 소리로 초인종이 울렸다. 방회장은 낙심한 표정이 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찍 왔군! 일단, 그거부터 숨겨. 그리고...”
방회장은 내가 녹음기를 숨기는 것을 확인하고 내 손을 잡았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으나 방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내 말을 믿어야 돼. 왜냐? 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얘기니까. 시중에 떠도는 가짜뉴스들 하고 완전히 다른 거야.
그게 저놈들 작전이지. 이이제이랄까... 굳이 진실을 지우려고 안 해. 대신 다른 소문으로 덮어버리지. 비슷한 가짜뉴스들을 퍼뜨려서 진실을 은폐하는 거야. 그리고...”
방회장이 속사포를 쏘듯 말을 내뱉고 나서 크게 숨을 들이켰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밖에서 뭔가 다른 조치를 하려는 게 분명했다.
“저놈들 절대 믿으면 안 돼. 인류의 발전을 위해서 어쩌구 하는 소리 다 거짓말이야.
잘 싸워주기 바래. 굿럭! 서중사.”
방회장은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더니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재빨리 돌아서 문을 열었다.
문 밖으로 건장한 요원 두 명과 비서의 모습이 보였는데, 방회장은 되레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금방 갈 건데 뭐 하러 쫓아와?
이럼 내가 뭐가 돼? 저 사람이 날 어떻게 보겠어? 에이!”
방회장이 화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세게 닫았다. 나는 놀라서 얼른 문 쪽으로 갔다.
문을 다시 열려다가 나는 동작을 멈췄다. 밖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끝인가? 그냥 갔나?’
저들을 집에 들이지 않기 위한 방회장의 임기응변이 통했나 보다.
나는 그냥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방회장이 이렇게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그 행위 자체만으로 진정성이 있다.
잠시였지만 전혀 미친 기색은 보이지 않았지 않나? 미쳤다고 소문이 났을 뿐 제정신인 것이다. 이이제이... 방회장 말대로 갖가지 가짜뉴스로 진실을 가린 것뿐이다.
그렇다면, 진실을 알기 위해서 우선 방회장의 녹음기를 열어봐야 한다. 어떤 내용인지 예단할 수는 없으나, 아버지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만은 분명했다.
궁금했지만,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이상하게 나는 위급한 상황이 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감정이 가라않고 사무적으로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한다.
격투기 스파링에서 상대의 펀치를 맞았을 때와 비슷하다.
중요한 것은 맞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상대의 펀치를 보지 못하고 맞으면 대부분 기절한다. 정신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 맞으면 전혀 다르다. 그때부터는 맷집의 문제다
혹시 펀치를 맞을까 불안 초조하다가, 정작 펀치를 맞으면 그 불안이 사라진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어떤 각오 같은 것이 솟아난다.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나는 일단 녹음파일을 저장했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저장장치에 다 옮겨 넣고, 각종 클라우드 및 메일에도 모두 저장시켰다. 심지어는 최민 변호사의 메일에도 녹음파일을 보냈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단서를 달아서.
그렇게 하고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제 아무도 이 기록을 없애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일어나 방회장의 녹음을 듣기 시작했다.
아마 감시를 피해 틈틈이 녹음한 듯 상태가 고르지 않았지만, 때로는 연결도 잘 안되고 내용도 이 얘기 저 얘기 중구난방이었지만, 방회장의 이야기는 정말 믿을 수 없었다.
방회장이 직접 나에게 ‘믿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내가 그들, 태양인 가족 사이에서 살아보지 않았다면 당연히 엉터리 얘기라고 웃어넘겼을 것이다.
각종 소설이나 판타지 영화 같은 데서 많이 본 내용이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정신병자의 헛소리라고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나의 현실이었으니까. 나의 아버지와 관련된, 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단서였으니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를 만나야 했고, 방회장은 아버지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믿거나 말거나, 방회장의 녹음 내용을 요약해서 공개한다. 나는 이것이 100%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제 10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