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바라봅니다. 그냥 바라보세요.
상단전, 중단전, 하단전, 어디라도 좋습니다.
각자 마음이 끌리는 곳이면 그 곳을 보셔도 돼요.
보고 또 보고... 그냥 보시는 거예요. 집중하는 게 아닙니다.
그냥 꽃을 보듯이, 밤하늘의 별을 보듯이, 옆집 아이를 보듯이 그렇게 그냥 보세요.
어떤 동작이 나와도 그냥 보기만 하세요.
동작에 집중하거나, 억누르거나, 따라가지 마세요. 그냥 내버려두고 보기만 합니다.
집중이 아닙니다. 그냥 편하게 보세요. 전체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전체, 나와 세상, 나와 우주가 하나입니다.
이런 말도 그냥 흘려버리세요.
그냥 한 점, 보기만 합니다. 잊지 마세요. 그곳이 나와 우주를 연결하는 문입니다.”
수정은 실내를 천천히 걸어 다니며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스무 명 남짓한 수강생들이 눈을 감고 제 자리에 서 있었다.
간헐적으로 몸을 흔드는 사람, 춤을 추듯 리듬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고개만 끄덕이는 사람 등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수정의 말에 반응을 하였다.
“따라가지 마세요. 생각이 들면 ‘아, 이 생각!’ 하고 보기만 합니다.
동작이 나오면 ‘아, 이 동작!’ 하고 구경만 하세요. 집중하거나 따라가지 않습니다.
아관문은 그냥 보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 어떤 감정 어떤 행동, 뭐가 나와도 다 괜찮습니다.
보는 나만 챙기고 다 내버려 두세요.”
원래 이 아침체선은 미완법사가 강의하는 시간이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전화가 와서 대신하게 된 것이다.
황인경이 맡은 어제 오후 강의도 휴강했다고 하고, 이후 선원의 강의가 당분간 휴강한다고 하니 뭔가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수정도 한때 체선 강의를 맡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새삼스러울 것은 없으나, 이제 독립해서 나간 신분이라 조금 낯설기는 했다.
돌이켜보면 이곳은 수정에게 고향 같은 곳이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재활병원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수정이 거의 세상을 포기한 채 함부로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미완법사는 유일하게 수정을 보듬어주는 안식처 역할을 했다.
‘봄비 같은 사람...’
수정은 미완을 그렇게 표현한다. 적어도 수정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혼 후, 아니 결혼 직후부터 수정은 펄펄 끓는 주전자였다. 어쩌면 그 이전, 아빠 엄마가 죽은 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끓는 수정의 몸과 마음을 미완은 봄비처럼 소리 없이 적셔서 식혀주었다.
어쩌면 그렇게 알맞게 내렸을까? 비가 오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맞다보니 몸이 식었다. 몸이 식으니 마음이 가라앉아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갑작스런 자동차 사고로 엄마와 아빠가 죽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을 서우석이라고 밝힌 중년남자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은 아빠의 친구이자 후견인이었으며, 수정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했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수정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우석에게 이끌려 그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우석의 아들 명근과 벼락결혼을 했다.
“3년만 살아라. 네 평생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하게 해줄게.”
우석은 수정에게 그렇게 말했다. 결혼을 하기 전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남들은 평생 같이 사는 게 결혼 아닌가? 그까짓 삼년? 그렇게 생각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실제 결혼 생활은 상상 이상이었다. 삼년이 아니라 일 년 한 달, 하루도 견디기 쉽지 않았다.
“군대 갈래, 결혼 할래?”
우석이 명근에게 그렇게 물었다고 한다.
명근은 결혼을 택했고, 결혼 기간 내내 수정을 괴롭히기 위해 온갖 짓을 다했다. 그 세세한 과정을 언급하는 것은 불쾌하고 부적절하여 생략하기로 한다.
결혼 2년차에 딸 진주가 태어났다.
임신을 했다고 해도 명근의 행동은 변화가 없었다. 전혀 아빠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남편 명근이나 시아버지 우석, 그 밖에 시집의 누구도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네 맘대로 해. 네 딸이잖아.”
이름을 뭐라고 할까 물어봤을 때 시아버지 서우석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왜 수정이 웃음이 났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 집안에 대한 마지막 미련이 끊어진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결혼 3년이 되자마자 이혼하리라 확실히 결심한 것도 그때였다. 마음을 정리한 수정이 아이의 성을 자신의 성인 오 씨로 하겠다고 했으나 서우석은 안된다고 했다.
수정이 서우석으로부터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것은 그게 유일한 경우였다.
3년이 되는 날 수정은 이혼하겠다고 말했고, 우석은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절차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석은 수정 몫으로 대전과 세종 시에 상당한 부동산을 마련해 주었다. 지금 아관문 선원이 입주한 건물도 그때 받은 것이다.
당시 미완법사는 선원이 아니라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혼하고 대전에 내려온 후 수정은 술과 더불어 살았다.
명근이 그렇게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릴 때 한 번도 술을 마셔본 적이 없던 수정이었다. 명근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을까? 아니면 지옥 같은 결혼생활에서 벗어난 해방감의 표현이었을까?
술에 취하면 수정은 소리 내어 울었다. 수정이 울면 어린 진주도 따라 울었다.
건물주가 아니면 벌써 쫓겨났을 것이나 다행히 누구도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밤이 깊어지면 슬그머니 새벽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미완이 다가와 진주와 놀아주었을 뿐이다.
인도에 간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TV에서 압사라(Apsara)라는 춤추는 여신을 보았는데 마음에 들었다.
그 방송은 앙코르 와트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그걸 보려면 캄보디아에 가야 했다. 그러나 무식했던 수정은 막연히 인도라고 생각하고 덥석 진주를 데리고 인도로 떠났다.
어쩌면 그렇게 죽어버리려고 떠난 여행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수정은 극도의 우울감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렇게 따져보면, 운명의 톱니바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낯선 곳에 가서 춤추는 여신이나 실컷 보고 죽어야지 했던 여행이 수정을 살아나게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가해지면 그때 하도록 하자.
지금은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한 시점이다. 어쩌면 참혹한 미래가 전개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쨌든 수정은 인도 여행을 통해 새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건실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좋게 말하면 ‘자유인’이고 흉보듯 말하면 ‘바람난 여자’로 살았다. 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했다.
딸 진주가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사춘기를 겪은 진주가 최강의 반항아가 되어버린 것은 분명 수정의 영향이 크다고 할 것이다.
어차피 뿌린 대로 거두어들이게 마련이다.
폭주하던 수정이 멈춰선 것은 미완이 돌아온 이후의 일이다.
한동안 잠적했던 미완은 태권도장을 폐업하고 선원을 열었다. ‘아관문’이라는 것을 시작한다고 했다.
제법 친해진 사이라, 미완이 ‘손님이 하나도 없어. 자기라도 들어와.’라고 농담처럼 말해서 수정은 아관문의 첫 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수정의 무궤도 비행은 종료되고 수행의 삶이 시작되었다.
체선공부에서 수정은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스승인 미완이 놀랄 정도로 진도가 빨랐다.
아관문이라는 게, 말하자면, 자신을 내던져놓고 봐주는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어쩌면 수정 자체가 내던져진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순간에 엄마 아빠를 잃고 내팽개쳐졌다가, 일종의 정략결혼으로 무인도에 조난된 삶을 살았고, 인도 여행을 하면서 난파선의 위태로운 상태를 지나왔다.
귀국 후 있었던 방만한 섹스 행각도 그런 내던져짐을 방치한 그런 생활이 아니었을까?
체선은 수정으로 하여금 할 일을 마련해주었던 셈이다. 그러한 내던져진 삶을 ‘사는 일’ 말고 그렇게 사는 자신을 ‘지켜봐주는 일’ 말이다.
“얘기 들었어? 자동차 사고가 났대. 큰 사고였다는데?”
체선 시간이 끝나자마자 지소연 교수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수정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닌데다가, 이젠 같이 공부하는 관계도 아니다. 자신은 현재 체선 소속이 아니라 독립적인 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요? 무슨 사고요?”
“미완법사님 말야. 화목 병원 유원장님하고 나란히 가다가 트럭이 들이받았대. 얘기 안 해?”
“그런 얘긴 못 들었죠. 그냥 사정이 생겼다고...”
“사정은 무슨. 사고지, 교통사고. 황인경 선생도 같이 다쳤나보던데?”
“같이 갔거든요.”
“근데 놀라운 사실은, 똑같이 있었는데 유원장님은 하나도 안 다쳤다는 거.”
“그래요? 다행이네요.”
지소연은 수정보다 조금 늦게 체선을 시작했지만 이미 각종 수련법을 두루 익힌 터라 아는 게 많았다. 실제로 체선에 대한 이해도 빨라서 교수요원이 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미완법사는 지소연을 외면하고 수정에게 강의를 맡겼고, 수정이 세종 시로 독립해 나가자 한참 후배인 황인경에게 선원 운영을 지시했다.
그렇게 무시를 당했으면 그만둘 만도 하지만 지소연은 꾸준히 나왔다. 나와서 회원들과 여러 가지 수다를 떠는 게 목적인지도 모른다. 또 여러 가지 정보에 빨라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안 다쳤나 했더니, 유원장님 차가 붕, 날아서 트럭 뒤로 가서 섰다는 거야.
트럭이 받으러 오는 걸 알고 피한 거지.”
“붕 날았어요? 그건 좀...”
“진짜래! 유원장님이 보기에는 얌전한 의사 선생님 같아도, 엄청 고수인 거지.
미완법사님 패!”
지소연이 약간 신이 난 얼굴로 속삭였다. 미완법사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이렇게 푸나보다, 수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웃어넘겼다.
사실 이런 정신수련 세계에 있다 보면 여러 가지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를 듣게 된다. 기공이나 무술 쪽을 하던 사람들이 많이 때문에 영화에서나 볼 법한 다양한 목격담이 나온다.
미완법사의 자동차 사고 이야기도 누군가에 의해 전달된 이야기일 테니 전혀 엉뚱한 말은 아닐 거라고 수정은 생각한다.
수정 자신도 실제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아관문 수련 초기의 일이다. 황인경이 새로 들어와 선원이 활기에 넘쳤다.
미완은 황인경에게 특별지도를 해주었는데, 마침 수정도 도장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무슨 시범인가를 보이다가 미완이 몸을 날리더니 도장의 벽을 타고 올라갔다. 액션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라 신기해하는 찰나, 미완의 몸이 그 속력 그대로 천정으로 올라갔다.
순식간에 천정을 거꾸로 걸어서 반대편 벽을 타고 내려왔는데, 그게 하도 신기해서 수정은 정작 미완이 왜 그 시범을 보였는지 이유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수정은 지소연이 이러한 ‘설명 불가능한 세계’에 관심이 많은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지소연은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인데(정확히 말하면 시간 강사), 그 남편은 유명한 로봇공학자인 길 메시 카이스트 교수이다. 세계 최고의 생체로봇 과학자의 아내가 과학의 반대편에 있는 정신세계에 빠져있는 것이다.
“나중에 또 얘기해요. 빨리 가봐야 돼서.”
지소연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말을 받아주다 보면 같이 점심을 먹자고 할 것이고, 또 이것저것 폭풍수다를 떨어댈 것이다.
사실 지소연은 수정에게 관심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수정이 시작한 수행에 대해서 궁금하다. ‘요가 수업이에요.’라고 간단히 대답하고 말았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들어간다.
그 내용을 알면 지소연은 신이 나서 여기저기 떠들어댈 것이다. 없는 이야기까지 보태서 이야기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수업을 들으러 오겠다는 것을 거절했다.
어차피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많은 수강생을 받을 생각도 없다. 정말 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게 수정의 뜻이다.
그래서 소수의 선별된 사람만 받는다. 말하자면 회원제 클럽인 셈이다.
클럽의 이름은 <데스스토커>. 여성 전용으로 남성의 입장은 허락되지 않으며, 회원이 되면 맹독성 전갈인 데스스토커 암컷 완성체의 타투를 그려 넣는다.
이렇게 소개를 하니 폭력적인 급진 페미니스트 단체 같은 느낌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수정은 단지 자신처럼 심적 고통과 방황을 겪는 여성들과 그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치유해나가는 공간을 제공하려는 것뿐이다.
“오랜만이네...”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보고 그냥 지나쳤다. 선원을 나와 건물 앞 주차장으로 가려는데 근처에 있던 어떤 남자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수정이 무심하게 지나쳐 자동차 앞에 서자 따라온 남자가 말을 건넸다. 익숙한 얼굴이었으나 기억에 없었다.
“누구신지...?”
예의를 다한 미소를 지으며 수정이 묻자 남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나야...”
“,,,?”
“잊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하!”
그 순간에 왜 웃음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왜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잊을 수 없는, 어찌 생각하면 한 순간도 잊은 적 없다고 해야 할 사람이었는데 왜 보자마자 알아보지 못했을까.
“볼일이 있어서 오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그냥 와봤어. 잘 지냈어?”
잘 지냈느냐고?
어느 날 갑자기 부모를 잃고 천애고아가 된 자신에게, 다정한 위로와 따뜻한 격려가 간절했던 자신에게 지옥 같은 시련의 나날을 겪게 해준 남자가 지금 잘 지냈느냐고 묻고 있다.
한때는 정말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고 괴롭혔는지 알고 싶었다.
천번 만번 생각해봐도 그렇게 학대를 당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말해 봐요. 저 진짜 생각 많이 해봤는데, 정말 모르겠거든요”
우리 한국영화 중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의 주인공 선우를 연기한 이병헌은 김영철이 연기한 조폭 두목 강 사장에게 피바다의 복수극을 펼치면서 이렇게 묻는다. 사장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충성했는데 왜 자신을 처단하려했는지 궁금한 것이다.
우연히 그 묻는 장면을 본 수정은 일부러 영화를 찾아서 봤다. 흔한 남성용 액션 영화였지만 수정은 지금도 가끔 그 영화를 본다. 이병헌의 그 질문이 아직도 마음을 움직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직 수정은 그 질문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이게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김영철이 이병헌에게 말한 답이다.
수정도 답을 듣고 싶었다. 인터넷에는 ‘넌 내게 목욕 값을 줬어’ 등으로 패러디되고 있는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답이라도 얻어내고 싶었다.
복수는 그렇게 시작된다. 상대에 대한 증오심보다, 왜 상대가 나를 해치고자 했는지를 알고 싶은 욕망, 그게 복수극의 추동력이다.
인도로 떠난 것은 그런 복수에의 욕망을 피해 달아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수정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어느 정도 단절에 성공했다.
10년이 넘는 시간 탓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 원수를 직접 보고서도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소각에 성공했다는 걸 의미하지 않을까? 소각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상당한 이격 거리를 확보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수정은 기분이 나빠졌다.
분명히 객관적인 감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정리가 되었는데, 그를 알아보자 웃어버린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웃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덤덤하게 대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웃었다는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감정이 일었다는 걸 의미한다. 웃음을 잃어본 사람은 한번 웃는데 얼마가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한지를 안다.
수정처럼 우울증의 바다에 빠졌던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산다는 것은, 살아서 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엄청난 활력을 필요로 한다.
숨 한 번 쉬기가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아는 사람들은 그냥 평범하게 하루 한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경이롭다.
그런데 누군가를 보고 웃었다? 그건 대단한 마음의 격랑이 일어났다는 뜻이다. 가장 사소하게 취급해서 그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이 어이없어서 웃은 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웃지 않았어야 했다.
그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기치 않게 다시 만났다고 해도 절대로 웃으면 안 되는 거였다. 단 한 끗의 에너지도 그따위 인간에게 써서는 안되는 거였다.
수정은 그게 억울했다. ‘데스스토커’의 이름으로 사형선고를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시 이 인간을 죽여야 한다. 이 남자, 자신의 전 남편 서명근을 죽여야 한다... (제 1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