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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07. 2022

제13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13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         


누구를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나 봐

숨죽여 쓴 사랑시가 낮게 들리는 듯해

너에게로 선명히 날아가 늦지 않게 자리에 닿기를   

  

I’ll be there 홀로 걷는 너의 뒤에

Singing till the end 그치지 않을 이 노래

아주 잠시만 귀 기울여 봐 유난히 긴 밤을 걷는 널 위해 부를게     


또 한 번 너의 세상에 별이 지고 있나 봐

숨죽여 삼킨 눈물이 여기 흐르는 듯해

할 말을 잃어 고요한 마음에 기억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I’ll be there 홀로 걷는 너의 뒤에

Singing till the end 그치지 않을 이 노래

아주 커다란 숨을 쉬어 봐 소리 내 우는 법을 잊은 널 위해 부를게...

  --- (아이유의 노래 <Love Poem> 중에서)   

  

“오랜만이네...”     


분명히 나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수정은 나를 무시하고 자기의 차 쪽으로 걸어갔다. 

얼핏 화가 스쳐 지나갔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과거를 참회한다는 뜻이고, 이 정도 대우는 능히 감당해야 한다.    

 

“나야...”    

 

사실은 이름을 말하려고 했다. 

‘명근이야.’라고 말한다고 한 것이 ‘나야’라고 말하고 말았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서명근이고, 서명근이 나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명근입니다.’ 하는 것과 ‘나야.’라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십년도 넘게 안 본 사이에, 불쑥 만나서 하는 첫마디가 ‘나야’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지만, 친구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친구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한 나의 태도에 수정은 당황한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나는 결혼 생활 3년 동안, 한 번도 수정에게 마음을 열어본 적이 없다. 마음을 열기는커녕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여 괴롭혔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나야’라고 말하다니...   

  

“잊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우리가?”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행동한다. 이성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몸이 먼저 알아서 반응한다. 

나는 당황하는 수정을 보며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웃으면서 사과 비슷한 말을 하려고 했는데, 막상 뱉은 것은 비꼬는 말이었다. 마치 악덕 채권추심 깡패가 능글거리듯이, 나는 그렇게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이래선 안된다! 옛날의 나는 죽었다. 이제 나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한다. 사라진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쓰러진 아버지의 육신을 되살려야 한다.   

  

“호호!”    

 

수정이 살짝 웃어보였다. 나는 다행이다 싶어 얼른 수습하는 말을 꺼냈다. 

아마 수정과 지낸 모든 시간을 통틀어 가장 온순하고 따뜻한 말이었을 것이다.   

  

“볼일이 있어서 오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그냥 와봤어. 잘 지냈어?”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에 불꽃이 번쩍 일었다. 만화책에서 그런 그림을 본 적은 있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분명히 내 눈에 번개가 번쩍였고, 이미 수정의 손은 제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네 따위가 감히! 또 나타나면 그땐 진짜 불지옥을 맛보게 될 거야.”  

   

글로 적어 놓으니 엄청 흉악한 말인데, 막상 들을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이 없었다. 

수정은 또박 또박, 감정 없이, 책을 읽듯이 말을 마치고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부릉! 떠나버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말이었다. 

눈물 듬뿍 흘리는 감동의 상봉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만감이 교차하는 멜로드라마틱한 만남이 될 것 같았다.      

나란 인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 아닌가? 개과천선, 탕아 돌아오다, 뭐 그런 종류의 착잡한 만남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어난 결과는 간단하고 깔끔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를 몰아 카이스트로 갔다. 대전에 온 목적, 길메시 교수를 만나기 위해서다.      

수정에게 맞은 뺨이 여전히 욱신거렸으나 기분은 상쾌했다. 매 한 대로 그동안 저지른 악행이 지워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속죄의 시작은 한 거 아닌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이렇게 시작하다 보면 나중에 창대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운 이름 진주에게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서진주. 나의 딸... 

솔직히 딸이라고 말하는 것도 부끄럽다. 생물학적으로는 아빠지만 실제로 내가 진주의 아빠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빠로서의 역할은 고사하고, 마음에서 한 번도 진주를 딸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왜 그랬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고 안타깝지만, 당시의 나는 너무 절박했다.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했다.    

 

진주를 데리고 수정이 떠난 후 나는 두 사람을 잊었다. 

애초부터 내 마음에 그들의 자리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괴롭히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렇게 살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쓰러져 정신이 나갔고, 나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흔적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에 대한 반항 깊숙이 숨어있던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그림자를 발견했고, 그 그림자는 점점 변해서 까맣게 잊고 있던 진주의 존재를 되살려냈다.      

진주에게 내가 어머니같은 존재라는 뜻일까? 내가 어머니를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듯이 (그런데 그 어머니가 정말 외계인이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진주도 나를 외계인처럼 생각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발버둥치던 나의 사십년 세월이 떠오르면서 혹시 진주도 나처럼 사랑받지 못한 상처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찾아 떠난 길이 나를 딸에게로 인도하고 있었다.  

   

방태준 회장의 사망 소식을 들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세간에는 지병 때문에 죽었다고 보도되었지만 사실은 자살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사망 보도가 나온 다음 날 내가 받은 우편물에 방회장의 편지가 있었다.      

그건 일종의 유서였다. 정정옥을 만나 태양인들의 앞잡이가 된 자신의 과거에 대한 반성과, 대일청구권 한일협정 등으로 일본과의 과거사를 왜곡시킨 것에 대한 사과와, 태양인의 계획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 장의 편지는 내게 보낸 것이었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는 외침처럼, 자신을 대신해서 태양인의 음모를 세상에 폭로해 달라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아주 상세하게 길메시 교수의 이중 행동을 열거해 놓았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하에, 그의 로봇공학이 어떻게 태양인들의 계획에 이용되고 있는지를 설명했다. 

    

나는 최민과 편지 내용을 어떻게 언론에 알릴지 의논했다. 

아버지를 찾는데 한계를 느낀 나는 최민에게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고 최민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나, 나름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헛수고야. 믿어주지도 않을 거고, 괜히 역공이라도 당하면 곤란해져. 얼마나 막강한 상대인지 알잖아?”   

  

사실 나는 방회장이 내게 남겨준 녹음을 수십번 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조그마한 단서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어미 하나도 흘려듣지 않았다. 거의 외울 정도다.      

나는 방회장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제로 그들과 함께 살았고, 결정적으로 그들의 실체도 직접 보았다. 

지금도 믿어지지 않지만, 논현동 지하에 있는 그들의 비밀기지도 목격했다. 그러나 최민의 말대로, 그것을 사람들에게 밝히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방회장 얘기는 철저히 블로킹 당할 거야. 게다가 길메시? 

길교수는 살아있는 권력이야.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  

   

그러면서 최민은 옛날 황우성 교수 사건을 얘기했다. 

당시 살아있는 권력이던 황교수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길게 설명했는데, 핵심은 ‘반박 불가능한 결정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거였다.

      

최민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황우성 교수도 길메시처럼 태양인의 앞잡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용당하는 중에 버림을 받은 것이다. 황교수의 실책으로 폐기된 것인지 폐기되어서 그런 사건이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중도에 탈락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저들은 쓸모가 다하면 언제든 쓰레기처럼 버릴 존재들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 인간이 아니니까.  

   

“목적을 분명히 해. 아버지야, 길교수야?” 

    

내가 방회장의 편지에 빠져 어떻게 하면 길메시의 정체를 폭로할까 고민하자 최민이 따끔하게 충고를 했다. 

그렇다. 지금 나는 아버지를 찾고 있는 중이다. 길교수에게 무릎을 꿇어서라도 아버지의 행방에 관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래서 똑똑한 친구 하나쯤 곁에 두면 편하다. 최민과 가까워졌을 때 나이를 따져보니 나보다 한 살 위였다.     

“형할래, 친구할래?”    

 

나는 인상을 쓰며 물었고, 최민은 친구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40 평생에 처음 생긴 친구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여러 가지로 나를 변화시켰다. 친구를 만들어주었고, 과거를 복원시켜서 딸 진주를 되살아나게 했다. 

전 여편 수정을 만나게 된 것은 이미 앞에서 얘기한 바 있다.    

 

“인사해. 우리 남편.”   

  

TV 드라마 같은 데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소개하는 부부들을 보면 부러운 생각이 든다. 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이따위 사소한 일상을 부러워한다는 것은 그동안 내 삶의 메뉴에 존재한 적이 없다. 그 모습이 좋아 보이면서 잊었던 ‘가족’이라는 말이 내 안에 들어왔다.     


“인사해. 우리 여편. 그리고 우리 딸...”  

   

아직은 닭살 돋지만 그냥 그런 광경이 떠올랐다.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들처럼 내 짝이 나를 남편이라고 불러주고, 딸이 나를 아빠라고 불러주는 그런 날이 왔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내 짝이 나를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나도 그를 ‘여편’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부부라는 게 그런 거 아닌가? 남편과 여편, 남녀 반쪽의 편이 만나 한 편이 되는 것 그것이 부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수정을 떠올렸던 것 같다. 

길교수를 만나러 대전에 오기로 했을 때 문득 수정이 대전으로 갔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이혼 후 수정을 내보낸 다음 아버지는 굳이 내게 설명을 했다. 혹시 마음 내키면 찾아보라고 주소도 건네주었던 것 같지만, 나는 바로 찢어버렸다.      

그리고 최민의 도움을 받아 겨우 수정의 소재를 알아낼 수 있었다. 수정이 산다는 건물에 갔으나 이사를 간 후였다. 


너무 늦었나 싶어 암담해하는 차에 거짓말처럼 수정이 내 앞에 나타났다.


****


운 좋게 수정을 만난 것에 비해 길 메시를 만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처음에는 아예 전화나 문자 메일 등 아무런 연락도 받지 않았다. 학교에 찾아가면 만날 수는 있겠다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길 교수는 아버지가 최근까지 만나온 중요한 인물이다. 어떻게든 그가 스스로 입을 열도록 해야 한다...     

이런저런 과정은 생략하자. 어쨌든, 인내와 정성으로 길 교수에게 사정한 결과 약속이 잡혔다. 

아침에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어렵겠다. 취소하자’는 연락이 왔으나 나는 가겠다고 했다. 

일단 얼굴만이라도 봐야 했다. 그래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나는 약속시간보다 이르게 길 교수의 연구실에 도착했다.  

   

“집요하시네. 일단 갑시다.”   

  

약속시간에 맞춰 갔으면 못 만날 뻔했다. 

마침 연구실을 나서던 길 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나를 데리고 건물을 나왔다.    

 

“타요. 가면서 얘기 하자고.”     


길 메시가 주차된 자신의 폭스바겐 투아렉에 오르며 같이 탈 것을 요구했다.  

   

“어딜...? 저도 차 가져왔습니다. 따라 갈게요.”

“월정사까지? 얘기하자면서?”

“예.”

“타라고. 시간 없어. 

정 뭐하면 대리 불러요. 월정사로 오라고 해.”     


나는 택배 실리듯 길 교수의 차에 올랐다. 

월정사까지 가는 동안 얘기를 나누자는 것이니, 그로서는 크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 터였다.   

  

“그거 가져왔죠?”

“그럼요.”

“다 삭제했어요? 남겨놓고 그러면 안 돼.”

“아직 안했죠. 뵙고 난 다음에 할 겁니다.”

“어? 얘기가 다른데?”

“내리자마자 삭제하라고 할게요.”

“그래요. 솔직히 나 그거, 전혀 신경 안 써요. 

알잖아? 방회장 말 누가 믿는다고. 안 그래?”  

   

길 교수는 일단 방회장의 문서 얘기부터 했다. 

길 교수가 만나주지 않아서 여러 가지 얘기를 했는데, 그 중에 길 교수에 대한 방태준 회장의 폭로 문서 내용이 있었다.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더니 그렇지 않았나 보다.     


“하나만 물어봅시다. 방회장 말, 어떻게 생각해요? 

자기도 내가 저 사람들 앞잡이라고 생각해? 대충 상황은 알 거 아냐?”

“잘 모릅니다. 방회장님이 얘기한 정도 밖에.”

“아버님도 전혀 말씀 없으셨고?”

“예.”

“그 양반 참... 나 정말 깜짝 놀랐어. 어쩜 그렇게 배신을 때리나? 

이십년을 같이 일했는데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다니.”

“사고는 아니라는 말씀이시네요?”

“뭐... 다 안다고 보고 얘기할게요. 

저 사람들, 사고 실수 그런 거 없어. 우리 인간의 영역에서나 쓰는 용어들이지.”

“계획된 일이다...”

“다 계획된 일이지! 큰 틀에서, 지구 역사 전체가 저들의 계획대로 진행되는 거니까. 

세부적인 결과에서 미세 조정이 있기는 하지만, 대세는 빼박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니까. 

방회장이 답답한 게, 그렇게 무조건 반대해서 어쩌겠다는 거냐고? 저들과 협력하면서 우리가 살 방도를 찾아야지.      

기생충처럼 살자는 거냐 하는데, 기생이 아니라 공생이야 공생. 설령 기생이면 또 어때? 버티다가 멸종되느니 기생충으로라도 살아남는 게 맞는 거야.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다?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환자인 거고, 잘 봐줘야 국뽕이야.“    

 

길 교수는 오랫동안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열심히 얘기를 쏟아냈다. 

호모 사피엔스가 주인이건 말건, 기생충이건 환자건 국뽕이건 난 관심 없어. 

그런 얘기 말고, 우리 아버지 행방을 가르쳐 달라고. 

아버지가 왜,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 얘기를 해 달라고 이 혼자 잘난 교수충아.  

    

“내가 솔직히 머리가 좋잖아. 

어떤 모르는 문제를 내놔도, 두 시간만 주면 다 풀 수 있어. 컴퓨터 있고, 인터넷 있으니까. 종합 분석만 하면 되거든.”

‘잘났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더라고. 서회장이 왜 그랬는지... 

그럴 사람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전혀 없거든? 분명히 의도적인 건데, 왜 그랬을까?”

‘풀어보라니까. 두 시간 줄게.’

“사고가 전혀 없지는 않았대. 

역사상 서너 번? 아주 강력한 도깨비의 공격을 받아서 납치된 일이 있다고 해. 

그 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 그렇게 1, 2차 대전을 겪은 후로는 서로 극단적인 공격은 안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공격 받은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사고는 아닌 거지. 그러면 의도적일 수밖에 없잖아? 

근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자기의 의도가 없다는 거야. 

우리 인간은 각자가 개별적 인격과 개성을 갖지만, 이 사람들은 그게 없어. 대의만 있지 우리처럼 개인적 욕망이 없단 말이야.”

“의도가 있어야 하는데 의도가 없다...”

“그렇지!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 같은 거지.”

‘그래서? 우리 아버지는 어디로 갔느냐고? 이 잘난 척하는 수다쟁이야!’    

 

내가 억지로 화제를 아버지 쪽으로 돌려봤지만 길 교수는 또 자기 얘기로 돌아갔다. 방태준 회장이 하던 일을 어떻게 해서 자기가 이어받았는지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방회장이 반인류적이라는 이유로 생체로봇 개발을 거부하면서, 저들은 좀 더 장기적으로 프로젝트를 맡아줄 사람을 물색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과학고 학생이던 길 메시가 후보에 올랐고, 그들의 지원 하게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러면서 왜 방회장이 틀렸고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를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의 말에서 절반은 잘난 체이기 때문에 내가 핵심만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다. 

방회장도 저들 태양족이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왔다는 점은 인정한다. 생체로봇도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태양인들은 생체로봇을 완성시켜 불멸의 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자신들의 영혼을 로봇에 이주시켜 몸과 마음의 불멸을 완성하려 한다. 

그 시점이 되면 태양인은 더 이상 지구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인류의 종말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협조할 수 없다!    

 

그러나 길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도 그들의 계획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명예 때문만은 아니다. 묻어가자는 것이다. 

저들의 꿈인 생체로봇을 완성시켜서, 저들이 이주하듯이 인간의 뇌를 이주시키면 우리 인간 역시 불멸의 몸을 가지게 된다.      

태양족은 뇌 연구에 관심이 없어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연구를 진행시키고 있다. 대사를 안 하기 때문에 병도 없다. 호모 사피엔스와 태양족이 함께 공존하면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된다. 

극비리에 진행되는 연구지만 지금 완성단계에 와 있다. 몇 년 후면 세상이 깜짝 놀랄 뉴스를 듣게 될 것이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혹시 중요한 포인트를 빠트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는 불멸 따위는 전혀 관심 없으니까. 

백세 시대 얘기를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백세까지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백세는커녕 60살이래도 절대 사양이다. 

매일 잠들기 전, 제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빌어본 적 있는가? 꿈이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살하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련다. 

차마 이루지 못한 꿈, 아버지에 대한 미움으로 버티고 미뤄둔 꿈, 자살.     


지금은 아니다. 죽으면 안 되는 확실한 이유가 생겼다. 

아버지를 찾아야 하고, 한 번이라도 딸 진주를 보고 싶다. 허락된다면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싶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아버지가 나를 아버지로 살려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다스베이더처럼 ‘I am your father!'라고 외칠 생각은 없다. 그렇게 뻔뻔하지는 않다. 

다만 아버지한테는 ’I am your son!'이라고 말하고 싶다. 생각만 해도 오글거리지만, 정작 대면을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 마음 간절하다. 

    

옛날 미국영화 중에 <챔프(The Champ)>라는 영화가 있다. 

배우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고,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즈음의 장면만 또렷이 생각난다.      

아버지와 아들이 헤어져 있다가 우여곡절을 거치고 드디어 만난다. 최루성 멜로영화라 잔뜩 울리려고 준비를 했기 때문에 이제 만나면 끌어안고 울어야 한다. 

배우도 울고 보는 관객도 모두 울 것이다. 확실치 않은데 텅 빈 경기장 같은 곳에서 만났던 것 같다.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 울기만 하면 된다. 울다가 끌어안던지 끌어안고 울던지 둘 중 하나다. 그 때, 울어야 할 타이밍에 아빠가 말한다.  

   

“넌 누구냐?”   

  

울 준비가 되어있던 나는 뜻밖의 대사에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대답한다.     


“전 아빠 아들이에요.”     


그 말에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맘껏 눈물을 흘린다. 눈물의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펑펑 울었다.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제대로 불러보지 못했다. 그래서, 만약에 다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요?”

“무슨 말?”

“아버지!”     


그러면서 와락 아버지를 껴안는 거다. 

나는 당연히 울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도 살짝 눈물을 보이지 않을까?     


“아... 그러고 보니, 이상한 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한두 번?”  

   

쓸데없는 얘기만 늘어놓은 게 미안했기 때문일까? 길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꺼냈다. 이미 월정사에 도착해서 내리려던 참이었다. 나는 못 들은 척 먼저 차에서 내렸다.    

 

“조오까?”

“...?”

“어느 날인가, 회장님이 물어보더라고. 조오까가 뭔지 아냐고. 그래서 ‘형이나 누나 자식이 조카 아니냐 했더니 아니래. 그러면서 웃는 거야.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그게 참 이상했어. 서회장은 항상 사무적이었거든. 그러면서 아들이 자기 보고 조오까 그랬다는 거야. 

그럼 욕한 거네요? 그랬더니, 아니래.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래.”   

  

아!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조오까’라고 말하면 그렇게 웃었구나. 

내 말이 아니라,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함성을 듣고 좋아서 웃었구나. 

나는 더욱 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다.  

   

“또 한 번은, 싱글벙글 웃고 있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어. 

아들을 처음 봤는데, 아들이 잘 커서 기분이 좋대. 10년쯤 전? 

내가 놀래서, 아들이 또 있어요? 그랬더니 있대.”   

  

이 사람이 지금 무슨 횡설수설을 하고 있는 거야? 

아버지한테 나 말고 아들이 또 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계인이 바람 피웠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바람피운다는 것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저씨 나 알아요?”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고.”

“휘파람은 불 줄 알아요?”

“몰라. 너는 불 줄 아니?”

“알긴 아는데, 잘 몰라요.”  

   

아버지가 새 아들과 그런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만난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 표정이 행복 가득이야. 

이 사람이 진짜 인간이 되고 싶은가? 그런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 연기라면 최고의 연긴데, 나한테 연기할 이유가 없잖아? 그게 제일 이상했어.”  

   

길 교수는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를 던져놓고 가버렸다. 

멀리 래퍼 투철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의 후계로 투철이 길 교수를 맡게 된 모양이었다. 자세한 얘기는 없었으나, 북한쪽 관계자들과 급한 회동을 한다고 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비밀장소에 그들의 아지트가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따위, 전혀 관심이 없다.  

    

아버지에게 아들이 있다고? 나 말고 다른 아들이 있다고? 

그렇다면 아버지는 그 놈을 찾아서 간 것인가? 갔다면 왜 몸은 버리고 간 것일까? 아니, 그 아이와는 전혀 상관이 없을 지도 모른다...  

    

나는 여러 가지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제 13화 끝)       

이전 12화 제12화; 끊어지지 않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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