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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12. 2022

제15화; 33인 비상 회의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15화; 33인 비상 회의          


지리산은 큰 산이다. 아니, 지리산은 산이 아니다. 하나의 세계다.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과 능선과 무수한 초목들의 아우성으로 이루어진 지리산 월드다. 지리산에 든다는 것은 흔들리는 세파를 벗어나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지금 화목병원 원장 유태민은 지리산을 오르고 있다.     


절차는 복잡했다. 구간 구간마다 안내자가 바뀌었고, 그 때마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한 보안검색이 있었다. 

산을 오르는가 싶으면 내려가고, 다시 올라간다 싶으면 더욱 깊숙한 계곡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말 사람의 손이 닿은 적이 없을 것처럼 보이는 심심유곡을 들어가면서, 태민은 저절로 긴장감이 높아지는 것을 느꼈다.     


산은 막상 겪어보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줄 알았는데 저런 면이 있고,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나면 그 너머의 무엇을 보여준다. 

지리산의 심오함에 감탄하면서, 태민은 모든 자연이 이렇게 신비할 거라고 추측해 본다. 그다지 겪어보지는 못했으나, 바다 역시 산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문득 바다가 궁금해지는 태민이었지만, 버뮤다 삼각지대의 심해기지에 태양인들의 본부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의 인생은 자연보다 더 변화무쌍하다.  

   

“예상보다 진도가 빠르군. 근데, 가봐야 소용없을 텐데.”     


민도길의 처참한 죽음으로 속칭 ‘도깨비들’에게 비상이 걸렸고, 회의 소집으로 가봐야 한다는 태민의 말에 재림은 슬쩍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님아, 내 옆에 있어. 문 밖은 위험해. 더군다나 님은 저들이 노리는 목표잖아.”

“벌써 세 명째 희생자야.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어떻게?”

“의논해 봐야지.”

“뭘?”

“누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안다고 달라질 건 없어.”

“싸워봐야지. 자기는 왜 그렇게 부정적이지?”

“끝을 알고 있으니까. 님들은 결국 소멸할 거야. 아주 극소수의 인원만 빼고.”

“그 끝이 뭔데? 종말론이라도 되나?”  

   

태민 옆에 있던 지혜가 끼어들었다. 

사실 요 며칠 이들은 매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고, 그 중심에는 재림이 있었다.      

호남이 재림의 말을 듣고 유턴한 덕분에 자동차 충돌을 피한 사실이 알려진 이후 미완과 황인경도 재림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 


가벼운 부상을 치료하고 호남의 집에 다시 모인 이들은 재림의 영도 아래 하나가 되었다.      

재림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것이다.    

 

“하지 마라.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먹고 마시고 놀고 자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했다. 노래하고 춤추고 어울려 게임하고 수다 떠는 게 다였다.      

그 상황을 제일 반긴 건 지혜였다. 워낙 놀기를 좋아할 나이이기도 하지만, 항상 진지하던 아빠 태민이나 미완법사가 웃으며 장난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도깨비 아줌마 호남이 그렇게 노래도 잘하고 멋진 여자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지혜는 내심 재림에게 고마워하던 중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택배기사가 배달을 왔는데 재림이 시원한 물을 한 컵 건네주었다.    

 

“고마워.”

“여기서 쉬어. 가지마.”     


재림이 쫓기듯 물을 들이키는 택배기사에게 말했다. 택배기사는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

“그만 하라고, 일. 당분간 내 곁에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 택배가 아직 남았어. 배달 가야돼.”

“가지 말라고. 배달. 밥도 안 먹었잖아.”  

   

갑자기 청년의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태민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걸렸어! 재림의 자장 안에 들면 마음대로 마음을 쓸 수가 없어. 

저게 무슨 능력일까? 타심통도 아니고, 염력을 쓰는 것도 아닌데 상대의 의지를 완전 무력화시킨단 말야.’    

 

택배기사가 머물기로 한 것을 본 호남이 부리나케 외출채비를 하고 나왔다.     


“잠깐 갔다 올게.”

“나도 갈래.”   

  

지혜가 낼름 따라붙었다. 택배기사와 나란히 들어오던 재림이 물었다.    

 

“왜?”

“이것저것 살 게 많아. 금방 와.”

“가지마. 아무 것도 하지 말라니까.”

“먹기는 해야지. 다 떨어졌어.”

“안 먹어도 되는데.”

“우린 그렇다 쳐도 여기 기사님은 먹어야지.”     

호남이 택배기사를 보며 말했다.     

“간단하게 빵 정도면 돼.”

“빵도 없어.”

“...자!”   

  

기적은 농담처럼 참 쉽게 일어난다. 잠시 호남을 쳐다보던 재림이 불쑥 손을 내밀자 먹음직스런 빵이 나타났다. 

호남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민과 미완 황인경도 깜짝 놀라 시선을 집중했다.     


“오! 단재림! 멋진데? 나는 뭐 없어? 난 자몽주스.”     


지혜가 손뼉을 치며 소리 질렀다. 

그 말에 재림이 비어있던 왼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는 검붉은 색의 포도주스가 놓여있었다.    

 

“포도네? 자몽주스라니까.”  

   

지혜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림이 손에 있는 빵과 주스를 옆의 택배기사에게 주었다. 택배기사는 몸을 90도로 굽혀 인사하며 그것을 받았다.    

 

“이것은 나의 피요 살이다. 나는 나의 살과 피로 님들을 먹일 것이다. 

부디 내 말을 믿고 따르라. 마음대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자신을 죽이고 나를 따르면 내가 끝까지 보호하리라. 

다시 한 번 간곡하게 이르노니, 님들아! 부디, 제발, 아무 것도 하지 마라. 아무 것도!”     


그렇게 그들은 다시 하나가 되었다. 

농담을 듣고도 웃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병든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 역시 마음이 병든 사람이다. 

다행히 믿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다소의 미혹을 가진 사람은 있었으나 의심하기에는 본 것이 너무 확실했다.      

만약 재림이 그 기적을 행한 후에도 멀쩡했다면 믿음이 덜했을지도 모른다. 재림은 빵과 주스를 만드는 기적 이후 기력을 소진하고 쓰러졌다. 제일 먼저 발견한 호남이 놀라 태민을 불렀고, 모두 달려와 걱정에 빠졌다.     

“괜찮아. 갑자기 에너지를 소모해서 그래. 자연을 거스르는 건 엄청난 운기를 필요로 하거든.”     


미완법사의 설명은 간단했으나 적절했다. 사실 이런 일은 호남도 여러번 겪어본 것이다. 신기가 들었다가 갑자기 빠져나갔을 때 일종의 진공상태 비슷한 것이 된다. 비워진 육체가 다시 생기로 가득 찰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두 시간 정도 지나서 재림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인경과 택배기사는 기적체험 이후 재림에게 확 빠졌는데, 황인경은 SNS를 통해 ‘예수가 재림했다!’고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던 차 태민에게 비상소집 통지가 왔고, 태민은 약간의 고민을 해야 했다. 

분명히 가야 하는 일이었지만 재림이 허락을 하지 않을 게 뻔했다.    

  

“비상소집? 왜 나한테는 안 왔지?”  

   

고민 끝에 미완에게 의논을 하니 그는 자신이 빠진 것에 의아해 했다. 

사실 재야의 모든 행사에 두 사람은 항상 함께 해왔다. 주도적 위치에 있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확고한 세계를 확립하고 있었고, 전통적 정신수련의 계승자임을 자부하던 터였다.      

그러나 이번 민도길 피살의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 미완이 제외된 것이다. ‘33인 회의’라고 명칭을 못 박은 걸 보면 최정예 인원만 모인다는 뜻인데, 누가 주최한 건지는 몰라도 미완으로서는 불쾌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조건 가야지... 먼저 가던지. 얘기는 내가 나중에 할게.”    

 

재림 앞에 서면 정신적으로 무력해진다는 얘기를 하자 미완이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염력이면 파장이 느껴지는데 재림은 그게 없다. 재림의 세계는 일종의 블랙홀 같은 것이어서, 상대의 생각을 빨아들여 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의 진공상태가 된 상대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하면 거부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명령으로 입력된다.      

그런 강력한 정신세계는 현존 물질계도 조종할 수 있는데, 지난번처럼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도 그러한 강력한 정신 에너지 때문이다...     


“그냥은 못 가. 그건 예의가 아니지. 아무리 어려도 선생님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잖아.”

“설득해 봐야지.”

“설득이 돼?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말투가... 의심하는 건가?”

“의심까진 아니고, 의문은 있지. 

도대체 저 사람은 뭔가? 어쩌자는 건가? 뭐 그런...”

“이왕 이렇게 된 거 믿어보자고. 믿고 가보자고.”

“어디까지?”

“갈 데까지.”     


예상 밖으로 재림은 강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태민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면서 왜 가지 말라고 안 하느냐?’하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재림이 웃으며 말했다.   


“세상일에는 세 종류가 있어. 

해야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 

이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야.”

“나한테는 꼭 해야 되는 일인데.”

“그건 님의 생각.”

“생각 아니면 어떻게 판단을 하지?”

“그걸 하지 말라고. 판단, 생각, 꿈, 계획, 그런 것들. 

그냥 살아. 아무 것도 하지 마.”

“그것도 판단이고 생각 아닌가? 그냥 살아라, 하지 마라...”

“아니야.”   


막상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하니 오히려 태민의 말문이 막혔다. 

모처럼 생각의 파장이 열려있는 느낌이어서 태민은 적극적으로 대응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그저 가르치고 있는 거야. 지도를 읽어준다고 할까? 

님이 ‘이것이다’라고 하면 그건 님의 생각을 말하는 거지만, 내가 ‘이것이다’라고 하면 그건 그냥 그렇다는 뜻이야.”

“내로남불...?”

“그렇지!”   


재림이 깔깔대며 웃었다.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아차 싶었던 태민도 덩달아 웃었다. 

원래 신중한 성격의 자신이 불쑥 속마음을 내뱉은 것이 약간 민망했다. 그만큼 태민의 마음이 열려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태민의 열린 마음이 기꺼운 듯 재림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원령 회수를 시작했다는 것은 태양족이 엔드게임에 들어갔다는 신호지. 

그동안 인간을 앞세워 지구를 간접 지배해 왔는데, 그걸 끝내겠다는 거야. 막을 수 있을까?”

“그동안 서로 공존하기로 협약이 됐는데, 왜 갑자기 도발을 하는 거지? 

원령 회수는 또 뭐고.”

“삼시충이라고 알아?”

“조금... 그걸 공부 방편으로 수련하는 사람도 있지.”

“원령 회수란 그 삼시충을 거둬들이는 거야. 정확히 말하면 빛을 회수하는 거고.”    


그러면서 재림은 삼시충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삼시충이란 우리 몸에 기생하고 있는 세 마리의 기생충이란 뜻이다. 

이 세 마리 기생충은 태양인이 인간을 관리하기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벌레로서, 인간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을 통제한다.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만든 원흉이 삼시충인 것이다. 

도교 따위의 서적에 흔히 등장하는 ‘삼팽’이 바로 이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왜 삼시충을 인간에게 주입했나? 알다시피 태양인은 빛의 존재다. 불멸이며 지구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태양인의 빛이 조금씩 줄어드는 걸 알게 됐다. 분석 결과 지구의 생명체가 미량이나마 빛을 집착 소유한다는 게 밝혀졌다. 

다른 생물은 그 정도가 무시할 정도였으나 인간은 그 양과 질에서 손실률이 제법 컸다.   


삼시충은 인간이 만드는 빛을 먹어버리는 암흑물질이다. 인간이 죽으면 삼시충도 죽고 자연 분해되어 자연광 속으로 사라진다. 

문제는 영적 정신적으로 뛰어난 인간들이 삼시충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단전 중단전 상단전에 기생하는 삼시충이 마음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제어하고, 자신이 습득한 빛을 그 벌레의 몸에 집적시킴으로써 암흑 기생충이 아닌 발광 기생체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흔히 그림 등에서 머리 뒤에 보이는 후광은 대부분 태양인을 묘사한 것이지만 가끔 삼시충을 배양하는데 성공한 인간인 경우도 있다.     


근래에 불멸의 육체를 얻는데 성공한 태양인들은 소실된 빛의 회수를 계획한다. 

이를 ‘원령 회수 작전’이라고 하는데, 회수 요원과 장비의 개발을 마치고 작전의 행사를 대기하고 있었다.      

이번 민도길 사건은 ‘원령 회수’가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삼시충 인간들의 원령 회수가 끝나면 나머지 인간들은 쓰레기 처리하듯 집단 처치할 것이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빛은 그 양이나 질에서 무시해도 좋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아! 그러면, 그 검은 안경이...”

“삼시충 판별용이지. 님도 각별히 조심해야 돼.”

“나보고 셋 다 싱싱하다고...”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하마터면 민도길처럼 해골이 잘리는 처참한 신세가 될 뻔 한 것이다.    


“님이 가겠다고 하니 막지는 않을게. 모자는 쓰고 가.”

“모자를?”

“안에 금속성 물질을 넣으면 삼시충 빛이 가려질 거야. 저들의 색출을 피해 봐야지.”     


하단전에 있는 욕망의 벌레를 제어하면 빛으로 변해 중단전으로 올라오고, 중단전에 있는 감정의 벌레를 통제하면 상단전으로 올라간다. 상단전에 함께 사는 삼시충을 통제하면 정수리를 통해 바깥의 빛과 소통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그렇게 영원한 빛의 세계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럼 이 사람들이 다 삼시충이라는 건가?’     


정말 ‘이게 요새로구나’ 싶은 곳에 은닉처가 있었고, 태민이 도착하니 2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는 얼굴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같았다. 재야에 은신해 있던 실세들이 모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오늘 모임은 태극당 선생이 선동했습니다. 말문을 여시지요.”     


갸름한 얼굴의 중년이 사회를 자처했다. 그가 태극당이라고 지목한 사람은 벗겨진 머리에 풍성하게 살집이 있는 노인이었다. 

80이 될까말까한 나이로 봤는데, 100살이 넘었다는 말을 나중에 듣고 태민은 깜짝 놀랐다. 게다가 그는 어린아이처럼 쾌활했다. 


“하하. 일단 빵을 좀 드셔. 여기까지 오시느라 출출할 거 아냐?”  


맥락 없이 빵을 내오자 태민은 문득 어릴 때 먹었던 태극당 빵이 생각났다. 

태민의 집이 신당동이어서 장충동에 있는 태극당 빵집에 몇 번 갔던 기억이 있다.    


“이거 먹으니 태극당 생각이 나네요. 서울 장충동에.”    


태민이 단팥빵을 먹으며 농담을 했다. 

서로 인사도 나누기 전이라 그냥 먹기만 하기가 어색했다.  


“맛이 어떠신가?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그거보다 못해? 우하하!”   


태극당이 깔깔 웃었다. 태민도 마주 웃으며 말했다.    


“훨씬 맛있습니다. 거기 껀 팥이 좀 적어서... 

이게 팥도 많이 들어서 좋네요.”

“에이! 그런 말 말어. 우리가 그래도 팥을 제일 많이 넣어.”

“예?”

“하하. 이 태극당께서 그 태극당입니다.”

“아니... 그 분은 돌아가신 걸로 아는데?”

“돌아간 게 아니라 돌아왔지. 여기로. 우하하!” 


태극당의 웃음에 모두 기분 좋게 웃었다. 죽었다는 사람이 산 속에 멀쩡히 살아있다니 이상한 일이 분명한데도, 태민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이상했다.


“빵이나 굽는 늙은이가 세상에 무슨 볼 일 있겠어? 

근데 말이지, 상황이 녹록치 않더라고. 나라도 뭘 맹글어서 내놔야 할 판이라 이거야.”

“도길이 당할 정도면 우리 누구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지요.”

“그렇게 죽다니... 피가 거꾸로 솟아요. 대가리가 화산처럼 터질 것 같습니다.”

“전쟁하잔 얘기지요.”

“듣자하니, 원령회수라더군요. 태양인의.”

“태양인이 갑자기 왜? 협정 파기 아닌가요?”

“원령이라고 하고 원광이라고도 하는데, 저놈들 마지막 단계의 조치야. 

나도 오다가다 주워들은 게 있을 거 아냐? 그래서 뭔 일인가 봤더니, 근자에 실무를 보던 태양인이 행방불명됐다 그러더라고. 서 뭐시기라고. 

아마 그 일하고 연관이 있지 않나 싶어. 계획을 진행하는 핵심멤버가 사라졌으니, 뭔가 서둘러야겠다 싶은 거지.”     


태극당이 여전히 웃음기 띈 얼굴로 두런두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계속 인상을 쓰고 있던 흰 수염의 남자가 짜증스럽게 이어받았다.   


“우리 쪽에서 영혼 납치라도 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누군지 찍어만 줘. 이번엔 그 놈을 납치해 올 테니.”

“회수.”

“회수건 납치건. 아, 머리가 대가리고 엉뎅이가 궁뎅이 방뎅이지. 따질 걸 따져.”

“들은 얘긴데요. 원령회수는 삼시충을 통제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한답니다. 

보아하니 제형들은 고수반열에 있는 듯 하니 부디 조심들 하십시오. 

삼시충은 상단전에 올라오지 않게 하단전에 내려두시고.”

“그걸 놈들이 어떻게 아누?”

“안경 같은 걸 씁니다. 제가 얼마 전에 당했잖아요. 두 놈이 짝으로 돌아다닙니다.”

“어? 잡았나?”

“제가 겨우 도망쳤습니다. 쎕니다. 

말이 서툰 거 봐서는 연변 사람 같기도 하고.”

“어, 그래? 그럼 북한제야. 북쪽이 우리보다 맘대로 일하기 편하잖어? 

그러니까, 뭐 맹글고 그러는 거는 북쪽에서 맡는 경우가 많아.”

“그자들이 북한제라구요?”

“공안 로봇이지. 사람이나 똑같애. 더 쎄지. 죽을 일도 없고. 

북에서는 상용화단계라더니, 남에도 투입이 됐군.”

“그랬군요! 사람이 아니라니, 놀랍습니다.”     


태민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제 정말로 인간과 기계를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에서 보던 것이 현실이 되는 걸 보면, 꿈에서나 가능한 그런 것들도 모두 이루어지는 때도 멀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내가 하나 맹글어 봤어요. 

이 양반이 와야는데... 그게 뭔고 하니...”

“옛다!”     


50쯤 되어 보이는 팔팔한 중년남자가 불쑥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았다. 

태극당이 반색하며 일어났다.     


“왔수?”

“왜 나냐고. 왜 꼭 내가 자기 심부름을 해야 돼?”

“싫으면 싫다고 해. 안 시킬게.”

“싫다고.”

“싫어?”

“그래, 싫어.”

“알았어. 안 시킬게.”

“싫다고 하기 싫다고. 마침 드론 타보고 싶었는데, 잘 됐어.“

“드론으로 왔어? 헬기 타라니까.”

“무음 헬기 나오면 탈게. 드론 좋아. 나 완전 새됐어.”   


중년남자가 싸이의 노래를 부르며 새 모양을 지어보였다. 

태민을 비롯한 몇 명이 실소를 했다. 100살 넘은 노인과 50 안된 중년이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이 정상은 아니었으되, 그리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태민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새로 온 중년남자는 박창호였다. 오래전 미완법사가 ‘애송이’ 소리를 들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전설 속의 사내가 가져온 물건은 무엇일까? 태극당이 가방을 열어젖히자 낯선 물건들이 눈에 들어왔다.     

태양인과 도깨비 인간(이하 줄여서 ‘도인’으로 칭하겠음)의 싸움은 오래된 것이다.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태양인들은 알고 있겠지만 관심이 없고, 도인들은 대체로 기록을 남기지 않으니 구전 말고는 전해지는 게 없다. 대체로 호모 사피엔스가 정착해서 문명을 발달시키면서, 즉 농경사회가 되면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두 세력의 싸움은 ‘인싸’와 ‘아싸’의 싸움이기도 하고, 주도세력과 비주류의 싸움이기도 하다. 

발전의 명목으로 태양인들이 사회의 조직화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도인들은 예술과 철학을 논하며 호모 사피엔스의 이상적 삶을 위해 분투해 왔다.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번 싸움은 양상이 다르다는 데 있다. 그동안은 싸움이라고 해도 상호 견제와 균형으로 인류의 발전이라는 공동선을 위해 기여해 왔다. 

그러나 이번 태양인의 도발은 도인세력을 죽이려는 의도가 명확하다. 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에서 태양인이 단독자로서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졌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도인들도 생존의 차원에서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요건 레이저 건이고, 요건 레이저 검이야, 단검. 호신용으로 갖고 댕기라고.”   


각자 하나씩 배급을 하고 나서 태극당이 무기를 들어 보이며 소리 질렀다. 

레이저 건을 박창호에게 겨누고 쏘는 시늉을 하자 박창호가 번개처럼 바닥에 엎드렸다.    


“깜짝이야! 이 간나야, 그 따위 장난 관두라!”

“우하하! 언니도 무서운 게 있기는 있네?”     


태극당이 박장대소를 하고 같이 있던 모든 사람이 동시에 웃어댔다.    


“애송이들! 뭐가 그리 재밌나?”

“재밌는 게 아니라 좋아서 그럽니다.”

“좋아? 내가 죽을 지경 되는 게 좋아?”

“앞으로 백년은 더 사실 거 같아요. 동작이 우리보다 더 빠르시니.”

“이거 필요 없겠는데? 절대로 안 잡히시겠어.”

“당연하지! 옛날 일제 시대에 내 별명이 뭔지 알아? 

비사이로 막가야. 엄청 빨랐다고.”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도대체 박창호와 태극당은 진지할 틈이 없었다. 

절체절명의 위기가 와서 긴급회동을 공지한 것도, 필살의 무기인 레이저 건을 급히 만든 것도 태극당 자신이건만 숙제를 잊어버린 초등학생처럼 마냥 즐거운 모양이었다.   


“어떻게 알고 이런 걸 준비하셨는지? 선견지명이 있으세요.”   


뭔가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태민이 진지충이 되어 물었다. 

칭찬을 받자 기분이 좋아진 태극당이 껄껄 웃었다.     


“우하하! 내가 뭘 맹그는 게 취미잖어? 

근데, 남들이 맨드는 거 하면 백날 해봐야 헛거야. 남이 안하는 거 해야 알아준다 이 말이지. 

그래서 이 궁리 저 궁리 대갈통을 굴려보는데, 퍼뜩 이게 떠오르더라 이거야. 

저 놈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레이저거덩.”    


태극당이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으니 보충설명을 좀 하자면 이렇다. 

앞에서도 언급이 된 것처럼 태양인은 빛의 존재다. 빛 덩어리로 영생한다. 부분적인 손실은 있어왔지만 존재 자체가 위협받은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제가 생긴 것이 원자력 때문이다. 사실 원자력은 태양인들이 아예 빛을 창조하려는 계획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그 과정에서 원자폭탄이 나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본격 사용하였다.      

그러나 빛 존재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치명적인 부작용이 발견되었다. 원자폭탄의 빛이 태양인의 빛몸을 쪼개버리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히로시마에 있던 태양인 하나가 원광이 분해되었는데, 모든 수단을 다했으나 원상회복에 실패했다. 태양인 최초의 공식 사망이었다.     

그러다가 태양인들은 체르노빌 테러를 당하게 된다. 원폭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빛 창조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태양인들은 원자력 발전을 내세워 은밀히 그들의 연구를 계속해 왔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는 우크라이나 도깨비들의 테러에 의한 것으로, 1명의 태양인이 사망하였다. 


‘태양인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도인들 사이에 은밀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1000분의 1초씩 끊어서 강력한 레이저를 발사시키면 태양인의 몸이 봉합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태극당이 만든 레이저 무기는 이 원리를 발전시킨 것이다. 


 “급하게 맨들어서 약점이 있어. 한번밖에 못 써. 

이게 에너지를 엄청 잡아먹거덩? 그러니까 결정적일 때만 쓰라 이거야. 

그리고 명심할 꺼는, 꼭 머리에다 쏴야 돼. 송과샘을 부셔버려야 되거든.”

“이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닌 것 같소만... 

저들을 저지할 강력한 대응책이 있어야 하오.”     


모두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깨며 가장 젊어 보이는 사내가 청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좌중이 모두 알다시피 저들은 엔드게임에 들어갔소이다. 원령회수는 그 초기단계일 뿐이지요. 

이어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 하지 않습니까? 매뉴얼대로 갈 거예요. 

우리 인간은 모조리 소탕될 겁니다.”

“그래서 내가 이거 맹글었잖아. 싸워야지.”

“어차피 지는 싸움이에요. 지구 문명의 헤게모니는 저들이 쥐고 있습니다. 

곧 개벽이 올 것이고, 666명의 인간만 선택되겠지요.”

“최소한 늦출 수 있는 방법이라도...”     


태민이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의견을 구했다. 

사내가 그 말을 끊으며 얘기를 이어갔다.   


“늦춰요? 말해 보시오. 태양이 뜨고 지는 걸 늦출 수 있소? 

일초라도 늦춘다면 내가 형씨를 스승으로 모시겠소.”

“그렇다고 투항하자는 뜻은 아닐 터?”

“투항이 아니라 항복만이 유일한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항복? 에이! 그건 아니지.”

“내가 해봐서 아는데, 항복한다고 행복해지지 않아. 우하하!”     


태극당이 자신의 개그가 마음에 드는 듯 크게 웃었다. 

사내가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싸움이란 적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태양인을 찾아낼 방법이 없어요. 철저히 숨어있지요. 

나서서 일하는 것은 저들에게 영혼을 팔고 부귀영화를 얻은 인간들입니다. 

우리도 숨어서 때를 보자구요? 대재앙이 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엔드게임을 시작했다는 것은, 저들이 불멸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몸으로 태양인들이 이사를 하고 나면 우리 인간은 끝입니다!”

“선생이 말하는 항복이란 뭐죠?”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였으나 태민은 존칭을 써서 물었다. 

이 자리에서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지하는 겁니다. 우리가 뜨는 태양을 멈출 순 없지만, 나 자신을 멈추는 건 가능하니까요.”

“그런다고 저들이 정지할까요?”

“아직은!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우리가 모두 멈추면, 저들도 멈출 수밖에 없어요.”

“멈춰? 뭐를?”

“일상을. 아무 것도 안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 모두. 

그럼 저들도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어요. 아직은 인간의 힘이 필요하니까.” 


사내의 말을 들은 태민은 문득 재림을 떠올렸다. 

우연의 일치일까? 재림도 시종일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재림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일까? 알고 있다면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태민이 생각을 계속할 틈도 없이 태극당이 말을 받았다.   


“엉망진창이군! 간디 흉내라도 내보겠다는 건가? 

그럼 이건 어떡하고?”    


태극당이 살짝 흥분하며 레이저 건을 휘둘렀다. 사내는 흔들림 없이 미소를 지었다.    


“우릴 지켜야지요. 감사하게 쓰겠습니다.”

“호신용은 이거고, 이건 놈들을 물리치라는 거야.”   


태극당이 검과 총을 양 손에 들고 흔들어 보였다. 사내의 말투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싸움이 안돼요! 체르노빌 때 경험했잖아요? 

놈들 하나 잡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랐습니까? 새로운 접근이 필요합니다.”

“...애송이! 넌 누구야?”  


듣고 있던 박창호가 이제야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는지 불쑥 물었다. 

그 말에 사내가 물끄러미 박창호를 쳐다보더니,     


“애송이라고 말하는 애송이는 누구야? 

사람을 불렀으면 먼저 인사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닌가?”

“무시기?”    


박창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입은 웃고 있었으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한 기세였다. 

살짝 눈치를 살피던 태극당이 수습에 나섰다.  


“우하하! 언니가 잘못했네. 

아무리 애송이라도 면전에서 애송이라고 그러면 기분 나쁘지. 

그럼 이제라도 통성명을 합시다. 우리가 막 살아서 그렇지 망나니는 아니거덩. 

나는 얘기했다시피 태극당이라 허우. 빵 맨드는 사람이고.”   


태극당이 ‘너는 누구냐?’ 라는 눈빛으로 사내를 보았으나 사내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에 말문을 열었던 가름한 얼굴의 중년이 이어받았다.  


“저는 소귀라고 합니다. 청산선사님께 국선도 가르침을 받고 여전히 수련을 계속 중입니다. 

이렇게 제형들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창호는 ‘꼴이 어떻게 되나 구경 좀 하자’는 태도로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빨리 정리가 되는 게 나을 듯싶어 태민이 자기소개를 했다.  


“유태민입니다. 시골의사구요. 사실 제가 얼마 전에 저쪽 요원 두 명의 공격을 받았어요. 

겨우 피했는데,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좋은 방안이 마련되길 바랍니다.”

“저는 시골교회 목사입니다. 이름은 홍 다니엘이라고 하고요. 

그런데, 그 요원들이 어떻든가요? 무기를 쓰나요? 

저는 무술을 못해서 방어가 안 되는데...?”    


내내 잠자코 있던 모자 쓴 남자가 태민을 보며 걱정스레 묻는다. 

태민은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나왔다.  


“하하. 잘 숨어 지내세요. 모자 꼭 쓰고 다니시고.”

‘아! 모자 쓰면 돼요?“

“놈들이 검사를 하거든요. 삼시충이 빛을 내는지 확인합니다. 

모자로 그 빛을 감추면 안전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제 기도 하는데, 갑자기 모자를 쓰라고 응답을 주셔서... 

그것도 이렇게 호일을 잔뜩 넣어서.”   


다니엘이 모자를 벗어 보여주었다. 

안쪽에 주방에서 쓰는 알루미늄 호일이 빽빽이 들어있었다.   


“그거 중요합니다! 그래야 빛이 안 새어 나가거든요.”

“주여! 믿습니다!”

“그럼, 모자 쓰고 이 총 갖고 있으면 완벽하네!”     


태극당이 홍 목사의 모자를 쓰더니 레이저 건을 갑자기 사내에게 겨누었다. 

박창호와 다르게 사내는 놀라지 않았다.    


“잘 어울리시네. 모자 꼭 쓰고 다니시고.”

“겁 안 나나?”

“겁나면 여기 왔을까?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함정? 내가 그런 짓 할 사람으로 보여?”

“그럼 어떻게 명단을 만들었는지 말해 보시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불렀지?”

“그냥 알아냈어.”

“어떻게?”

“슬쩍.”

“훔쳤단 얘기군.”

“휴민트...”    


추궁당하는 양상이 되면서 태극당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태민이 태극당을 거들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궁금했습니다. 

거의 처음 보는 분들이고, 또 그동안 교류하던 사람들이 많이 빠져있고... 

남자들만 있는 것도 조금 이상하구요.”

“원래 이 바닥이 여자들을 안 쳐줍니다. 아주 보수적이지요.”

“아, 예...”     


태민 옆에 앉아있던 단정한 머리의 남자가 속삭였다. 

태민이 빤히 쳐다보자 남자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저는 주은택입니다. 시를 쓰지요. 대학 교수구요.”

“난 비상소집이라서, 한판 할 줄 알았더니. 괜히 왔네!”   

  

짜증내던 흰 수염의 남자가 투덜거렸다. 

참가자의 면면이 직업을 밝히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싸우게 되면 싸워야지요. 저도 준비는 됐습니다.”     


주은택이 보기와 다르게 깐깐하게 대꾸를 했다. 흰 수염 남자가 콧방귀를 뀌며,    

 

“흥! 교수에 의사에 목사에... 볼만 하겄소!”

“하하. 그런 형씨는 뉘신지?”    

 

태민이 성질을 누그러뜨리며 물었다. 흰 수염 남자가 표정을 풀며 웃음을 보였다.  

   

“유형을 우습게 아는 건 아니니 오해 마쇼. 말이 그렇단 얘기지.”

“절 아시나?”

“유형이야 유명 인사니까. 이 바닥에서 시골 의사 모르면 헛깨차지. 난 오대수요.”

“그럼 혹시, 장도리...?”

“그렇소이다.”   

  

흰 수염 남자가 수줍은 듯 웃었다. 좌중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심지어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뭘, 박수까지.”

“근데, 수염이 없지 않았나요? 전혀 몰라봤어요.”

“안 깎았더니.”

“머리는...”

“깎았더니.”

“어쨌든 반갑습니다. 진짜 유명한 분을 여기서 보네요.”   

  

한 남자가 있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던 그는 어느 날 난데없는 납치를 당한다. 

위치를 알 수 없는 작고 밀폐된 방에 감금되어 지내게 된 15년 세월. 그는 배달되는 군만두만 먹으면서 매일 증오를 기름 삼아 무술을 단련했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하자 탈출을 시도한다...  

   

<기생충>과 함께 가장 잘 알려진 한국영화인 <올드 보이>의 앞부분이다. 

이후 복수극과 복수의 복수극이 뒤엉키면서 극적인 반전이 되풀이되는 영화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오대수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오대수가 현재 지리산에 와 있는 그 오대수다. 오대수의 얘기를 영화적으로 살짝 각색한 것이 영화 <올드 보이>라는 말이다.     

영화 <올드 보이>에 나오는 유명한 액션장면이 바로 ‘장도리 액션’인데, 그게 재야 싸움판에서 오대수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건물 지하 주차장 CCTV에 찍힌 장면을 박찬욱 감독이 나름 실감나게 영화 속에 그려냈다.      

하지만 CCTV 장면을 실제로 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때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꽃을 찾아다니는 벌 같기도 하다. ‘경지에 오른 무술’을 보여주는 실제 사례로 전설처럼 남아있다. 

당연히 태민도 일찌감치 그 장면을 보았고, 그래서 더욱 실존 오대수를 만난 게 반가운 것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그들을 보며 태민은 ‘도를 따르는 사람이 참 많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나름 활동 반경이 넓다고 자부했는데, 우물 안의 개구리에 불과했던 거다.     


“우하하! 이제 잘나신 분 소개 좀 들어볼까?”     


돌아가며 각자 소개를 하는 동안 계속 눈알을 굴리며 젊은 사내만을 바라보던 태극당이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사내가 그런 태극당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영감께선 무엇 때문에 내가 그렇게 궁금하신가?”

“우하하! 이따 엄마한테 갈 때 무슨 빵 줘서 보낼까 해서. 뉘 집 자식인지 알아야지.”

“그것 참! 우리 엄마 빵 싫어하는데...”

“멍청한 놈. 니 엄마, 짜장면도 싫어하시지?”

“어? 어떻게 알았어?”

“닭다리도 싫어할걸?”

“맞아! 절대 안 먹어.”

“예라이! 호로자식!”

“허! 이것 참...”    

 

태극당에게 욕을 먹은 사내가 잠시 멋쩍은 표정으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았다. 태민이 상황 수습을 위해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자! 이쯤에서 소개를 하시는 게...”

“어?”  

  

태민의 말과 함께 사내가 두 손을 내렸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젊은 사내의 얼굴이 사라지고 주름 많은 노인의 얼굴이 나타났던 것이다. 모두 놀라 턱을 떨어트렸다.  

   

“뭐야? 너는...?”  

   

태극당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 모습을 보고 젊은 사내, 아니 노인이 크게 웃었다.     


“푸하하! 신형, 나야 나! 속았지?” 

    

태극당을 신형이라 부른 사내는 백면이었다. 

얼굴이 백 개라고 해서 백면(百面)이 된 것인데, 정말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기술이 보고도 믿기지 않을 만큼 신기했다. 

단순히 변장술 수준이 아니라, 정말 얼굴을 바꾸는 성형 수준의 변모였다. 세상에는 참 별의별 기술, 기상천외의 사람이 많다.   

   

“백면! 네가 여기는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내가 소집했으니 당연히 와야지. 안 그래?”   

  

정체를 밝힌 백면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안광을 빛내며 좌중을 돌아보는 백면의 얼굴이 상황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이렇게 재야의 숨은 도인들이 모여드는 걸 보면 확실히 비상상황은 분명하군.’  

  

태민은 뭔가 거대한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하고 약간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단순한 헤게모니가 아니라 생사를 건 싸움인 것이다.     

백면이 어이없어 하는 태극당을 보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깜박 속은 것이 못내 억울한 듯, 태극당은 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놈이 나를 선동해서 앞장서게 하더니. 결국 다 네 놈 장단에 놀아난 것이냐?’   

  

태극당이 열불을 내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것이, 그는 사실 앞에 나서서 사람을 모으고 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가깝게 지내는 박창호처럼, 그저 바람 따라 동으로 서로 휘휘 돌아다니면 그만이었다. 그러다 안면을 익힌 사람을 만나 적당히 수다를 떨고, 말감이 떨어지면 또 바람처럼 흩어지면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태극당은 도인계의 아싸였던 거다. 백면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났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태극당은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백면은 계획적이었다. 

흩어져 있는 도깨비들을  규합하고 태양인의 공세에 체계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태극당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태극당은 발이 넓고 자기색깔이 없으면서 순진했다. 신분이 세상에 공개되었을 경우 생겨날 화제성 면에서도 유리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여론전도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태극당이 소집한 33인 비상회의 명단 역시 백면이 제공한 것이다. 태극당이 ‘휴민트’에게 받았다고 했는데, 그건 바로 백면이 태극당에게 한 말이다. 

태극당을 포섭하기 위해 백면은 약간의 픽션을 가미했다. 자신이 만든 명단이라고 하면 감동이 오지 않을 게 뻔 하기 때문에, 태양인 진영에 심어놓은 휴민트가 건네준 명단이라고 했다.      

태양인의 잔혹한 살육 작전에 대해서도 실감나게 이야기를 해놓았다. 어쨌든 앞으로 태극당은 이 33인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정신교육도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백면도 처음부터 이 사태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도인들이 세상사에 살짝 벗어나 살아가는 게 사실이기는 하나, 백면은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도깨비가 되기 전부터, 혹은 도라는 것을 알기 전부터, 좀 더 정확히 세상에 나오면서부터 백면은 사람의 눈을 피하고 싶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민도길의 죽음에 자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스승 강대성의 진심 어린 봉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하여 영랑과 해모수를 비롯한 조상신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되었다.   

   

바야흐로 과거 현재 미래의 전 인류가 하나로 모여들고 있었다... (제 1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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