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있다면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던 시대는 20세기에 끝났다. 21세기부터는 태양인의 시대이다.’라고 써야 할 것이다.
태양인의 오랜 꿈, 불멸의 몸을 얻으려는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서 더 이상 인류의 몸을 빌려 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버뷰다 삼각지대 해저에 있는 태양인 본부를 중심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던 불멸체 연구는 21세기 들어 급격한 진전을 보게 된다.
사이버스페이스의 활성화는 태양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지구상의 모든 정보를 컴퓨터에 모으고, 태양인이 직접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 순도 높은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태양인들이 오랜 숙원이던 생체로봇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NEMA0009라고 불리는 물질로 만든 이 로봇은 스스로 점검 복구하는 자활기능까지 갖추고 있어서 말 그대로 영원불멸의 몸체인 셈인데, 이로써 태양인들의 여정 -각종 생명체를 옮겨 다니고, 새로운 공간을 찾아 우주까지 헤매던- 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갔다. 힘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가리지 않았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의 구분도 없었다.
수백억 수천억 수조원의 부자와 하루살이 같은 가난뱅이가 공평하게 죽어갔다. 최고의 권력자도 파멸의 쓰나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최고의 재주와 아름다움을 뽐내던 샐럽들도 허망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진정한 종말은 그렇게 차별 없이 다가왔다. 오직 선택된 자들과 강인한 소수의 아웃사이더들만 살아남았다.
선택의 기준은 태양인 몫이었다. 그들은 새로 시작되는 자신들의 세계에 동참시킬 인간을 666명으로 한정했다.
물론 이것은 동북아 섹트에 배정된 인원으로서, 각 구역의 인원을 합한 숫자는 대략 이것의 12배 정도 될 것이다. 그래봐야 아무리 많이 잡아도 1만 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80억 인구 중에서 80만분의 1만 살아남게 된다는 말이다.
인원 선별 작업은 2명에게 맡겨졌다. 백성원과 차병욱이 그들인데, 백성원은 일찍부터 태양인의 앞잡이를 해온 인물이다.
차병욱은 북한 사람으로서, 남한의 길메시와 함께 로봇의 완성에 기여한 공로가 컸다. 원래 길메시에게 맡겨질 것으로 알려졌으나 웬일인지 차병욱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길메시는 이에 강력 반발하고 막바지의 혼란을 틈타 태양인 체제에서 이탈하였다.
백성원이 300명 차병욱이 300명씩 선정하였는데, 나머지 66명은 태양인이 독자적으로 구제한다고 했다. 남북한을 구별해서 두 사람을 나눈 것은 아니고 백성원은 일반인 중심으로, 차병욱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위주로 선발하였다.
어쨌든 두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이 크게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2020년의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 몇 번 강력한 바이러스를 퍼트려 언택트 시대를 만든 후, 태양인은 생체 로봇의 상용화에 돌입하였다. 그와 함께 잔류 인간들의 소개가 이루어지고, 드디어 2025년 백두산을 폭발시켰다.
백두산 화산폭발은 말하자면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가 끝나고 태양인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공식 선언하는 신호탄인 셈이다.
이후 벌어진 일은 앞에서 진주의 의식 흐름을 따라 본 것과 같다.
백두산 화산폭발을 기점으로 복합적인 재앙이 지구를 덮쳤다. 인류를 비롯한 지구 생태계는 급격히 망가져갔고, 안전하게 지하 요새화한 태양인과 선택된 인간들만 안전과 평화를 보장받았다.
SF 영화 등에서 그려지던 아포칼립스 세상이 실제임이 증명된 것이다.
그렇다면 버려진 인간들은 모두 전멸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인류는 시간의 거센 바람을 견뎌내며 진화해온 드문 존재들이다. 태양인과 함께한 것이라고 해도, 지구 발전의 상당부분이 인류의 노력에 기인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
태양인은 자신들의 존재가 없다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고 예상했겠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인간들이 스스로 생존의 길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효율적으로 자생의 길을 모색한 것은 도깨비 인간, 즉 도인들이었다.
도인들은 애초부터 태양인의 존재와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사태에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사실상 오래 전부터 두 세력은 갈등과 견제를 반복해왔던 것이고, 그 맥락에서 태양인이 전면전을 일으킨 것으로 인정했다. 다시 말해서 제3차 세계대전 정도로 인식했다.
그러나 특별한 대응수단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빙하기의 시련을 그저 견뎌서 이겨낸 것처럼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방책이었다.
그게 무슨 방책이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때로는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때도 있다. 상대가 스스로 빈틈을 보이거나 자멸하기도 하고, 전혀 보이지 않던 해결책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한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던지 살아남아야 한다.
도인들은 자연 깊숙이 숨어들어갔다. 산 속 동굴이나 은폐된 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활동반경을 최소화하여 생활했다.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오염되었으므로 먹을 것도 제한되었다. 거의 원시 인류처럼 살아야 했다. 도인들은 현실에 빠르게 적응했다. 적게 먹고 적게 활동하고 적게 교류했다.
다른 종류의 인간도 있다. 버려진 지구를 운동장 삼아 유아독존! 스스로 지구의 주인공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험한 환경도 그들의 삶을 구속할 순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태양인의 장비도 탈취하여 독자적인 경찰활동도 벌이곤 했다. 태양인이 버린 지구의 표면을 그들은 보란 듯이 장악하고 지배했다.
이들의 이야기도 흥미롭긴 하나 여기서 다룰 소재가 아니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종말 혹은 종말 이후의 세계를 다룬 수많은 SF 판타지 영화들이 이때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데, 영화 <매드 맥스>시리즈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 같은 것을 참고해서 보면 된다.
각각의 존재들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독자세계를 구축하려고 하던, 일종의 백화제방의 시기였던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선택된, 잔류 인간들이다.
처음에 그들은 환호했다. 종말을 맞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축복이니까. 그러나 축복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온전히 자신들만의 세상이 아니라 태양인의 세계에 기생하는 삶에 불과했기 때문에 점점 문제가 드러났다.
인간들만의 세상이라고 해도 문제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애당초 인간들이란 하나로 화합하기 어려운 족속이다. 앞으로 가라하면 뒤로 가려하는 사람이 나타나고, 웃어야 할 때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긴다. 사람마다 이때의 생각이 다르고 이것에 대한 감정이 다르기 마련이다.
또 같았던 감정 생각도 시간이 지나면 바뀌는 게 부지기수다. 그렇게 다양하고 혼란스럽고 갈등하고 기복이 있는 것, 그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태양인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들이 허용되지 않았다. 단순하고 규격화된 생활만이 강요되었다.
처음에는 그게 자유인줄 알았으나 차츰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전혀 개인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밝혀졌다. 자살하는 사람들, 탈출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태양인들의 계획과 전혀 다르게 벌어진 일들이다. 에덴동산은 애초부터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던 셈이다.
진주의 탈출도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탈출의 결정도 과정도 쉽지 않았다. 일단 바깥 세계는 생존 자체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다. 각종 세균과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있었고, 자연환경도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았다.
다양한 종류의 개별집단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는데, 대부분 외부 생물체에 적대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른 문제는 명근의 반대였다.
명근이 수정과 진주를 죽음의 수용소에서 구해낸 것은 이미 얘기한 바 있다. 그렇게 다시 가족을 이룬 생활에 대해서 명근은 아주아주아주 감개무량해 했다.
다시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최선을 다해 두 사람을 위해 살았다. 자신은 노예처럼 태양인에게 아부하면서 수정과 진주의 안전과 평안을 확보했다.
그러니만큼 명근이 탈출에 반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수정과 진주의 생각은 달랐고, 명근도 모르게 탈출을 준비해야 했다.
확실한 탈출을 위해 수정은 진주를 먼저 내보내기로 했다. 진주가 같이 가자고 했으나 그러기에는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안전을 기원하며 흩어져야 했다.
수정은 생존을 위해 건조한 시간을 견뎌야 했고, 진주는 생존을 위해 미지의 시련을 이겨야 했다.
아! 서우석의 얘기를 빼먹었다.
알다시피 태양인 서우석은 어느 날 갑자기 육체를 버리고 행방불명되었다. 그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태양인의 엔드게임이 시작되었고, 명근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지금 그 과정의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결과만 얘기하면 이렇다.
명근은 아버지 서우석을 찾아 태양인에게 데려오고, 태양인은 서우석을 본부로 데려가서 1년간 ‘특별 워싱’을 받게 한다. 서우석이 오염의 정도가 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온 서우석은 과거의 일탈을 잊고 예전처럼 태양인의 본분을 다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우석이 명근에게 감사해 하거나, 수정과 진주를 가족으로 아끼거나 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명근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게 되는데, 추측컨대 생물학적으로 마지막 태양인 혈통이라는 것을 존중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불멸의 족속이라고 해도 역사는 있는 것이니까 일종의 박물학적 보존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서우석의 배려로 명근과 수정, 진주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 특별대우에도 불구하고 진주가 탈출한 것에 대해 태양인들은 의아해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편안한 삶을 외면한다고?’
그러나 그게 인간의 본질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만 따먹지 마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인간은 무슨 수를 쓰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본능을 지녔다.
지옥 불에 발버둥치는 한이 있어도 천국의 안온함을 견디지 못한다. 태양인은 ‘존재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겠으나, 인간은 ‘지금 여기의 나’를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나의 욕망과 감정과 생각이 무시된다면, 설령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보장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옛날 홍콩영화 중에 <열혈남아>라는 영화가 있다. 그 추억의 영화에 이렇게 절규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루를 살더라도 영웅처럼 살고 싶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생이 아니다. 영생은 필요 없다.
우리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단 하루 한 순간을 살더라도 나답게, 온전히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다.
태양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이 그 부분이다. 일상을 책임지던 생체로봇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세계도 그것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인간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그게 인간을 파멸로부터 구해내게 된다. 태양인의 계획을 저지하고, 태양인의 오류를 바로잡고, 작은 행성 지구를 화해와 공존의 땅으로 되살리는데 성공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다웠기 때문이다.
영원히 잘 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나답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제 17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