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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21. 2022

제18화;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18-2화;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미쳤어?”     


진주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자신의 몸이 공중에 둥둥 떠서 움직이고 있었는데, 진주는 그게 공연히 신이 났다. 

물론 꿈이겠지만, 이렇게 지겨운 세상을 멀리 떠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참혹했다. 도시는 폐허로 변했고, 가끔 빈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들은 황량함을 더할 뿐이었다. 

이상한 물체도 보였는데, 액체 상태와 고체 상태를 자유롭게 오가는 새로운 형태의 괴물체였다.      

나중에 안 바로는 동물의 썩은 시체가 부패해서 발생한 액체에서 만들어진 신 물질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인류 멸망 이후 망가진 지구를 책임질 새로운 개체의 등장인 셈이다.    

 

“앗! 아이언 맨이다!”     


산 속 동굴에서 자신을 데려온 사람을 보고 진주가 소리 질렀다. 정말 아이언 맨과 똑같은 차림의 사람이 마스크를 벗었다. 

우리가 아는, 세계적인 로봇 공학자이고 태양인의 앞잡이였던 길메시 교수였다.  

   

“거봐. 오늘 분명히 손님이 올 거라고 했잖아.”

“손님 맞아요? 군식구 아냐? 지금 우리도 먹을 게 없어서 굶어죽을 지경인데...”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요망한 늙은이. 지금 내 손에 죽어볼텨?”

“어라? 요 놈이 많이 컸네! 손이 발이 되게 빌 땐 언제고, 인제 멱살을 잡아?”

“멱살 안 잡게 됐냐고. 살려달라고 빌었지, 이 꼴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요 놈아.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게 잘 좀 하지 그랬어?”

“너나 잘하세요. 우리마저 죽고 나면, 누가 영감을 찾기나 할까봐? 

같이 끝나는 거라고. 다 죽는 거야. 몽땅!”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저 아이에게 기대를 걸어 보자고.”     


티격태격 말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진주를 쳐다보았다. 진주는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자 살짝 긴장하였다. 

두 사람은 바로 백면과 영랑이었는데, 주고받는 대화로 보아 백면이 다시 영랑을 소환한 모양이었다.

     

“저들은 강해. 불멸하고 영생한다고 하지. 

허나 우리 인간은 약해. 불멸은커녕 매 순간 닥치는 시간의 파도를 넘기에 허덕거리지.      

하지만 그게 우리 인간의 위대한 점이야! 시간의 파도를 탈줄 안다는 것! 

저들은 시간이 영원한 줄 알아. 사실은 순간이라는 걸 모른다고.      

위태롭게 시간의 파도를 타본 사람만이 영원을 경험하지! 스스로 영생한다고 믿는 자들은 이미 죽어있는 거야.      

왜냐? 영원은 순간 속에만 존재하거든. 영원 속에는 순간들의 썩은 시체들만 즐비할 뿐이지. 

저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사는 좀비 같은 존재야.”    

 

처음에는 영랑이 말하는 것 같더니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진주는 비몽사몽 의식이 가물가물하는 중에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시야는 흐렸으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나는 있는가? 내가 보는 이 세상은 있는가? 

내가 듣고 느끼는 이것들은 진짜인가? 아니다!      

다 버려버려.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것에 종속된다. 태양인들이 자신들의 존재인 빛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그럼 나는 없는가?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의 그림자이다. 없다고 하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없지 않다. 나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것을 알아야만 태양인을 이길 수 있다!”  

   

갑자기 배경의 공간이 사라지고 순 백색의 허공이 나타났다. 

그 위로 진주가 겪은 과거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인상적인 사건들이 보였다 사라져갔다.      

진주는 자신이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에게 수련을 받는 네오 같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내 의식 속에 들어와서 나를 새로 프로그래밍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는 같은 나인가? 

나는 어제 태어나서 오늘을 살고 내일 죽는다. 같으면서도 다르다.      

태양인은 어떠한가? 그들은 죽지 않는다. 따라서 태어남도 없다. 잠시 물리적인 형태를 빌어 영생하는 존재이다.      

태어나지 않으니 죽음도 없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변함없으니 시간이라는 개념이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은 태양인이 인류를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족쇄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그 빛은 정처를 찾지 못하고 떠돌다가 작은 행성 지구에 둥지를 틀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여, 지구는 물질적 공간의 절대치를 넘보게 되었다. 

태양인들이 만들어낸 물질적 발전의 역사가 PPT처럼 보여진다.   

   

“저들은 죽지 않으므로 오늘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 

저들은 울지 않으므로 눈물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지 못한다. 

저들은 불멸 영생하므로 생사의 고통도 알지 못한다. 

태양인은 시간을 모른다. 시간이 주는 변화의 위대함 역시 알 수가 없다. 

그들은 물질적 공간에만 관심이 있다. 시간의 유한성은 우리 인간의 고유한 영역이다.”     


“안녕! 들어는 봤니? 나 단군이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나는 주몽. 동명왕이라고도 부르지. 고구려를 내가 세웠거든.”

“나는 대조영. 발해를 세웠지.”

“나는 웅녀야. 곰으로 살다가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됐지. 

힘들면 마늘을 먹어. 좋아. 아주 좋아.”

“반갑다 진주. 나는 자네트. 잔 다르크라고 해야 알려나? 

잘 해낼 거라 믿어.”

“너 반짝거리는 거 알고 있어? 나야, 캡틴 마블.”     


다양한 인물들이 진주 앞에 나타나 인사를 했다. 

특이한 것은 모두 인사를 한 다음 진주를 안으려고 했는데, 안아지지가 않았다. 허공을 감싸며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아무도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인물들이 나타났다. 진주는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차츰 익숙해졌다. 

아는 인물도 있고 모르는 인물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진주를 격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진주는 점점 그들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들과의 포옹도 이루어졌다.  

   

“나야 유관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겨야 돼. 절대로 지지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는 윤동주.”

“환상 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 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결코 시간이 멈춰질 순 없다.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 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오빠 알지?”

“당신은 괜찮은 사람이에요 엄청. 좋은 사람이에요 엄청. 

알고 있죠? 나의 아가씨.”    

 

서태지가 웃으며 다가와 포옹을 하더니 이어 아이유가 조심스럽게 진주를 감싸 안았다. 

진주도 아이유를 마주 안았는데, 갑자기 아이유가 진주의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버렸다. 

깜짝 놀라 당황하는 차에 익숙한 얼굴의 여자가 앞에 다가와 섰다.   

  

“툰베리예요. 지구를 살려주세요, 꼭!”

“아빠가 지켜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니까 죽어도 살아 있어야 돼. 다시 만날 때까지.”

“엄마는 걱정 마. 너만 걱정 해. 알았지?”

“괜찮아. 네가 주인공이잖아.”     


툰베리와 아빠와 엄마와 미완법사가 차례로 다가와 진주와 합해졌다. 

그리고 낯선 듯 친숙한 얼굴이 진주 앞에 나타났다.   

  

“안녕.”   

  

그것은 진주였다. 

진주는 앞에 있는 또 다른 진주가 자신과 똑같은 모습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어릴 적의 모습부터 늙어버린 모습의 진주까지 번갈아가며 보였다.      

아니, 그 모든 세월이 합쳐진 모습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진주가 모두 합쳐진 모습이 앞에 서 있었다. 

    

“잘 해보자. 파이팅!”   

  

앞의 진주가 다가와 진주를 안았다. 

진주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힘껏 마주 안았다. 진주가 진주를 안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한다. 살아남아야 한다...      

진주는 단군 이래 조상과 동시대 인물들이 해준 격려가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나이자 그들이고, 나는 우리 모두이다. 

모든 미래와 모든 과거는 현재라는, 나라는 한 점에 집중되어 있다! 

그 무엇도 나를 없앨 수 없다! 


****

  

진주는 번쩍 눈을 떴다. 어두웠지만 익숙한 공기가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방안,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슬며시 팔을 올려 두 손을 살펴보았다. 이어 얼굴도 쓰다듬어 보고, 슬쩍 가슴도 만져보았다.    

 

‘분명히 나야...’ 

    

이상한 점이 있기는 했지만 평소의 자기 모습 그대로인 게 틀림없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샤워를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진주는 거의 샤워를 하지 않았다. 몸에서 냄새가 날까 걱정할 만도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누구를 만나지도 않으며, 집에서 엄마 수정과 잠깐 스치는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샤워를 하고 얌전히 잠옷까지 입고 잠들었다는 게 진주답지 않은 행동이기는 했다.  

   

‘꿈도 그렇고, 온통 이상한 일 투성이네?’     


정말 그랬다. 재난영화 같은 장면들이 연이어 보였고, 낯선 상황과 낯선 사람들이 나타났다.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것은, 그 모든 이상한 상황을 본 진주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것들이 불길하거나 의심되지 않고 온 몸을 단단하게 무장시킨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자기 확신과 불굴의 사명감이 진주를 보호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있을 때가 아니지. 할 일은 해야지.’     


그레타 툰베리는 15세의 나이에 지구를 살리는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했고, 잔 다르크는 16세의 나이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이제 17세의 진주는 인류의 파멸을 막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결과를 미리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행동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작은 바람이 태풍을 일으키고 작은 파도가 엄청난 해일을 만들어내듯이, 지금 말라깽이 진주는 게임 체인저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모든 시작은 미약하고 사소하다.  

   

거실로 나가니 수정이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진주는 힐끗 화면을 보고 수정 옆자리에 앉았다. 수정이 진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너, 잔뜩 취해서 왔어. 막상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비틀비틀 몸을 못 가누더라도.”

“그래서 나 목욕 시켰어? 나 목욕 싫어하는 거 알잖아?”

“난리가 아니었다니까. 여기저기 막 토하고.”

“그 정도야? 전혀 기억이 안나.”

“다행이다. 너, 그거 다 기억하고 있으면 창피해서 엄마 못 볼걸?”

“주정도 했어?”

“못 믿겠지? 그거 다 찍어놨어야 되는데.”

“흠! 고생했네...”     


고생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똥오줌 싸던 어린 아기 때 이후로 아이를 벌거벗겨 목욕시킨 적이 없는데다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으니까. 

아기였어도 힘들었는데, 다 큰 딸을 씻기는 게 쉬웠을 리는 없다.    

 

그러나, 힘들기는 했으나 수정은 그 시간이 좋았다. 

17년을 키우고 함께 지냈지만, 솔직히 함께 해서 즐거웠던 시간은 기억에 없다. 대부분 힘든 시간들이었다.   

어린 진주를 목욕시키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진주는 짜증내며 울어댔고, 수정 역시 짜증나고 화났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던 것 같다. 진주를 키우는 것이 형벌처럼 느껴진 때도 많았다. 

    

그런데 어젯밤 처음, 수정은 함께 하는 기쁨을 느꼈다. 

거의 정신을 잃은 딸아이를 벗겨 욕조에 넣고 수정 자신도 옷을 벗었다. 진주가 몸을 가누지 못하였으므로, 수정은 욕조에 앉아 자신의 몸 위에 진주를 올려놓았다.      

진주의 몸은 거의 인형처럼 가벼웠다. 샤워꼭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진주를 씻기는 동안, 스멀스멀 어떤 감정이 솟아올랐다. 


처음에는 그게 샤워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온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진주의 피부가 전해주는 체온의 따뜻함인가 생각했다.      

그때 알았다. 그건 수정이 진주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었다. 

따뜻한 사랑의 온도였다. 그동안 전하지 못한 사랑의 감정을, 정신을 잃고 쓰러진 딸에게 정성껏 전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바치겠다...’      


그런 마음으로 딸을 씻기고 있었다. 

수정은 진주가 곁에 있음에, 진주를 위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진주라는 존재에 감사했다.    

 

“고마워 엄마.”     


진주가 수정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뜻밖의 말에 수정이 고개를 돌려 진주를 보았다. 

고맙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솔직히 그동안 진주와 수정의 관계란 전쟁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세종으로 이사 온 이후 잠잠해지긴 했으나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언제든 다시 터질 준비가 되어있는 휴화산일 뿐이다. 

그런 진주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온다는 건, ‘이제 그만 싸우자. 화해하자.’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정은 덜컥 겁이 나서 진주를 외면했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자식이 부모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대체로 둘 중 하나다. 

어딘가 멀리 떠나려고 하거나 철이 들었거나. 진주는 이제 17살이니 철들려면 멀었고, 그러면 멀리 떠날 생각이라는 얘기다. 

갑자기 진주가 얼마 전에 아빠 얘기를 꺼낸 것이 되살아나면서 수정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수고했어. 나 키우느라고 고생했잖아.”

“너 술주정하니? 쓸데없는 얘기를...”

“진심 고마워. 난 엄마가 자랑스러워. 전에도 지금도. 정말야.”

“얘가 왜 이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좋아도 운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수정은 갑자기 마음이 허전해지면서 휘잉, 바람이 부는 걸 느꼈다.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지금의 진주는 어제의 진주가 아니었다. 

부쩍 성장한 느낌, 속이 꼭 차서 더 이상 수정의 도움이 필요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떠나려 하는구나...   

  

“잠깐잠깐 엄말 미워하기도 했지. 그땐 어렸으니까. 어려서 엄마밖에 없었으니까. 

무서웠거든 세상이. 엄마가 도망갈까 봐 무서웠거든. 

미안해. 속상했지?”

“옛날 얘기 뭐 하러 해? 인제 다 끝난 일인데... 

딸아, 너 잘 컸어. 고마워. 잘 자라줘서, 무사히.”

“고마워. 무사히 잘 키워줘서. 이제부턴 내가 엄마 지켜줄게. 걱정 마.”

“걱정 안 해. 여기로 와서는 나도 안정이 됐어.”

“다행이야. 가슴이 답답하거든.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하하! 너 이상해. 시집가는 딸같애.”  

   

허전함을 달래보려고 수정은 일부러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인생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새로운 변화를 예감하니 무서워졌다. 

과장된 웃음소리에 그 무서움을 실어 보내려 했으나 싣지 못했다.   

  

“근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니? 

솔직히 지금 나, 살짝 무섭거든?”

“무서워? 왜?”   

  

진주가 전혀 예상 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몰라. 네가 멀리 가버릴 것 같아.”

“나 안가 엄마. 금방 얘기했잖아. 이제부터 내가 엄마 지켜준다고.”

“너 다른 애 같아. 

아니... 딸이 아니라 언니나 엄마처럼 느껴져. 이상해.”

“흠! 나도 그래.”

“뭐?”

“나도 엄마가 딸 같다고. 엄마 돌보느라고 고생 많이 한 착하고 불쌍한 딸... 

어린 나이에 혼자 돼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나는 엄마한테 갖은 못된 짓 다하며 풀었는데, 엄마는 아무도 없었잖아. 

할아버지 할머니 갑자기 돌아가시고...”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눈물을 글썽이며 듣던 수정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나온 눈물은 굴러 떨어졌고, 나오던 눈물은 다시 들어가 버렸다. 난데없이 할아버지 할머니 얘긴 뭔가?      

수정은 한 번도 진주에게 죽은 엄마 아빠의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다시 말해서 진주에게 외가란 존재하지도 않는 이름이다.    

 

“이제부터는 엄마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내가 엄마 지켜줄게. 

그동안 엄마가 나 지켜준 것처럼. 엄마는 혼자가 아니야. 알았어?”  

   

수정은 혼란스러워졌다. 마치 떠나갈 사람처럼 얘기하다가 갑자기 지켜주겠다고 말한다. 

수정 자신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부모님의 존재까지 들먹이는 진주의 정신 상태는 뭔가? 

대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데일리 크리스털!”    

 

진주가 수정의 어깨에 손을 얹고 속삭이듯 말했다. 

먼 곳에서 청명한 종소리가 들리는 듯 했으나 이내 사라졌다. 수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진주를 바라보았다. 진주가 살짝 웃었다.   

  

“설마 잊은 건 아니지? 데일리 크리스털!”

“,,,?”

“크리스털! 데일리!”    

 

빛을 받은 수정처럼 반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수정의 눈이 호박만큼 커졌다.    

 

“아! 아빠!”     


그것은 수정의 아버지 오미소 박사의 대사였다. 

어린 수정을 격려할 때 아빠가 쓰던, 일종의 주문 같은 말이었다. 

그걸 진주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수정의 마음은 더욱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제1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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