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 크리스털!”
이 말은 수정이 아빠 오미소에 대해서 기억하는 단 하나이자 모든 것이다.
아빠는 바빴다. 집에 없는 시간이 많았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어린 수정은 아빠에게 매달렸다.
오미소는 그런 수정에게 항상 미소를 지었다. 수정이 잘했건 잘못했건, 심지어 인종차별 문제로 학교에서 크게 싸웠을 때도, 퇴학까지 거론되는 험한 상황이었는데 오미소는 수정에게 말했다.
“데일리, 크리스털!”
데일리는 ‘Do As You Like It'을 줄인 말이고, 크리스털은 수정을 부르는 말이다.
’네 마음대로 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때로 그 뒤에 ’You Are The One.'을 붙일 때도 있었지만, 어쨌든 ‘데일리 크리스털’은 수정과 아빠를 연결하는 둘만의 암호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진주가 어떻게 그 말을 알고 있을까?
“네가 그 말을 어떻게 알아?”
“알아.”
“어떻게?”
“만났어. 만나서 엄마 얘기 다 들었어.”
“누구? 아빠를?”
“응. 할머니도.”
“...”
“꼭 전해달라고 했어. 데일리 크리스털!”
“거짓말 마. 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얘기했잖아. 할아버지 할머니 만났다고.”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잘 생겼어. 검은 테 안경 끼고. 멋있는 아저씨였어.”
“아빠는... 죽었어. 엄마하고 같이, 차 사고로 죽었다고!”
“...”
“그것도 내 앞에서. 우린 같이 타고 있었어. 나 혼자 살아남았지.”
수정의 아버지 오미소 박사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핵물리학자였다.
학계에서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국적이었지만, 워낙 뛰어난 논문을 계속 발표해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 주류 학계의 중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오미소는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마주오던 화물차가 중앙선을 침범하여 오미소의 차를 들이받았는데, 운전석의 오미소와 조수석의 부인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뒷자리에 탔던 딸 수정만 살아남았다.
사고를 낸 트럭의 운전자는 도주하였고, 사고 현장에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바로 서우석이었다. 서우석은 현장을 확인하고 기절해있던 수정을 구해서 사라졌다.
그 이후의 일은 우리가 아는 그대로이다. 수정은 우석의 아들 명근과 결혼하였고, 진주가 태어나게 되었다.
“네 말을 믿으려면 아빠가 살아있다는 걸 믿어야 돼.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걸 믿어야 된다고.”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죽은 사람을 만났다고? 어젯밤에 저승이라도 다녀온 거냐?”
수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조롱하는 의도가 명확한, 누가 봐도 기분이 나쁠만한 그럴 웃음이었다.
그러나 수정은 그걸 절제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진주가 상기시켜준 그날의 사고는 수정의 인생을 통째로 뒤바꿔놓은, 행복한 생활에서 한순간에 황무지로 팽개쳐놓은 엄청난 재앙이었으니까.
엄마 아빠의 죽음은 수정에게 저주였는데 뭐라고? 아빠를 만났다고? 엄마 아빠가 살아있다고?
나를 저주받은 삶 속으로 몰아놓고, 살아서 그냥 보고 있었다고? 그 말을 믿으라고?
“엄말 이해해. 당황스러울 거야.”
“당황 아니야. 황당이지.”
“나중에 다시 얘기할까? 엄마 진정되면.”
“진정? 미국이 얼마나 넓은지 아니?”
수정의 눈이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때의 악몽이 떠올라 깊이 가라앉아 있던 불안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네 나이였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 팽개쳐졌지. 넓은 운동장 가득히 깨진 병들이 널려있고, 그 한 가운데 나 혼자 서있는 거야. 맨발이라 움직일 수도 없지.
사람들이 다 깨진 병조각처럼 무서웠어. 그때 네 할아버지가 나타났지.”
“할아버지?”
“서우석씨. 네 아빠의 아버지. 나는 그게 썩은 동아줄이었대도 잡았을 거야.”
“그 할아버지, 쓰러지셨어.”
“뭐? 네가 어떻게 알아?”
“알아. 우리가 도와줘야 돼.”
“너 세 살 이후로 만난 적 없어. 근데 뭘 도와줘? 기억도 안 날걸?”
“난 다 알아. 아빠도, 아빠의 아빠도, 엄마의 아빠도 다 알아.”
심지어 수정이 모르는 것까지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못했다.
서우석이 태양인이고, 오미소는 태양인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과학자였으며, 오미소가 서우석의 지시를 어기고 독자적인 노선을 걷게 되면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때로는 과거의 사실을 모르는 게 좋을 때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 과거는 현재의 진로를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우리는 과거보다 미래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균형점이지만, 과거가 기승을 부리면 현재는 부패한다.
진주는 지금 미래의 공기로 오염된 현재를 환기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알게 됐어.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까지 다.
이제 곧 종말이 올 거야. 인간들은 망한다고.”
“잘 됐구나! 기다리던 일이야. 그 얘길 너한테 들을 줄은 몰랐지만.”
수정은 갑자기 짜증이 났다. ‘또 시작이구나!’ 싶었다.
고난의 시간인 것 같았던 삶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던 참이었다. 수정 자신이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물론,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진주도 최근 정착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행복의 시간이 왔나보다고 생각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내 주제에 행복은 무슨...’
행복은 한 여름 땡볕 아래의 아이스크림 같은 것이다. 잠깐 기쁨을 주는가 싶다가 사라져 버린다. 끈적끈적한 점액질의 불쾌감만 남긴다.
불행한 사람은 행복을 먹지 말아야 한다.
“가끔 엄마 아빠가 사고로 죽은 게 참 잘된 일이란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순식간에 모든 걸 끝내버리면 얼마나 좋아?
...그래 말해봐. 우리는 어떻게 끝나니?”
“엄마가 그렇게 빈정대면 어떻게 얘기해?
난 엄마가 싫어하는 건 안 해. 적어도 이제부터는.”
“고맙구나. 그럼 다 얘기해. 어젯밤에 너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도대체 무슨 일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듣겠다고 약속해. 그럼 말할게.”
“제발! 내 딸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너무너무 알고 싶어.”
“날 믿어야 돼. 알았지?”
“당연히 믿지. 네가 좀비가 됐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게.”
“난 엄말 사랑해. 알지?”
“...?”
갑자지 뜬금없는 사랑 타령에 수정이 멈칫했다. 건성이라도 그렇다고 하려고 했으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 애가 나를 사랑하나? 갑자기, 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딸이 엄마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은 거의 사라졌으나, 사랑한다는 생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언감생심, 자신은 그런 마음을 먹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엄마가 나 사랑하는 거 알아. 나도 엄마 사랑해.
엄마도 알지?”
“그래, 고맙다...”
수정은 불현듯 엄마 생각이 났다. 나는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
수정의 엄마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유명하고 유능한 아빠와 달리 엄마는 조용하고 가정적이었다. 예술을 좋아하고 예쁜 것을 즐겼다.
어릴 땐 그런 엄마를 좋아했으나, 사춘기가 되면서 점점 엄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아빠에 비해서 열등해 보였다. 엄마가 열등한 여자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경멸의 마음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보는 고리타분한 여자...
사실은 엄마를 경멸한 게 아니라는, 미워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것은 진주 때문이다.
사춘기의 진주가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보면서 수정은 자신의 엄마를 떠올렸다.
‘저 아이가 나를 미워하는 게 아니야...
사랑하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는 거야...
사랑한다는 표현을 저렇게 밖에 못하는 거야...’
그래서 수정은 진주가 밉지 않았다. 기다릴 수 있었다.
애증이란 그런 것이다. 자신 속에 있는 미움, 증오가 끝나야 사랑이 시작된다.
이제 수정의 마음에 증오는 사라졌다.
그러나 엄마는 가고 없다. 미워하지 않는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도 이 세상에 없다.
그런데 지금 이 아이가, 17살 밖에 안 된 딸이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다.
40이 다된 여자가 이제 겨우 자신의 엄마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데, 17살 된 이 아이는 어떻게 이렇게 성숙해진 것일까?
수정은 의아해진다. 자신은 딸인 진주를 사랑한다. 맹세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진주의 물음에 수정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한다. 아직 시간이 안 된 것이다.
엄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20여 년이 필요했던 것처럼, 딸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도대체 사랑은 얼마나 더 살아야 가능한 것인가?
사랑을 한다는 것과 사랑을 말하는 것은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다만 각자 사랑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막상 사랑을 말해야 할 때가 되었는데도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내 사랑이 완전하고 순수한 것이 아니어서 부끄럽기 때문이다.
‘말보다 행동’이라고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적어도 수정은 그렇게 생각한다.
행동은 단순해서 그게 100%인지 80%인지 63%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나의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까발려야 한다.
까발려진다. 벌거벗겨진 것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수정처럼 마음에 상처와 굴곡이 많은 사람들은 말이 무섭다. 내 안의 더러움이 무의식중에 섞여 나올까봐 조바심을 한다.
지금 수정이 ‘나도 너를 사랑한다’고 진주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수정의 마음에 더러운 찌꺼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정은 그게 부끄럽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자신에 자괴감을 느낀다.
“갑자기 웬 사랑타령인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이 짜증스런 반응이 나왔다.
전 같으면 자동적으로 불꽃이 튀겼을 테지만 진주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슬쩍 미소를 보였다.
수정은 살짝, 진주가 딸이 아니라 언니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턴 우리가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힘든 시간을 견뎌야 하니까.
앞으로 난 엄마와 떨어지지 않을 거야. 아니지! 엄마가 꼭 내 옆에 붙어 있어야 돼.”
“내가? 왜?”
“날 도와줘야지.”
“널? 뭘?”
“지구를 지켜야지.”
맙소사! 정상인 듯싶으면 이상해지고, 괜찮은 것 같다가 해괴한 소리를 해댄다.
수정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뭔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진주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
“그래. 얘기해 봐. 왜, 어떻게 지구를 지킬 건지.”
“엄마가 먼저 대답을 해야 얘길 해주지.”
“무슨?”
“엄마는 날 사랑하나?”
“...”
집요하다. 강한 압박감에 수정은 답답해진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저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아야 한다.
“물론. 사랑하고말고.”
“그렇게 말고. 정식으로 말해줘.”
“정식으로?”
“시인을 하라고. 나처럼. 나는 엄마를 사랑해.”
수정은 숨이 막혔다. 정말 이 애가 미친 건가?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어디까지 이 아이의 말을 들어줘야 하는 건가?
“엄마!”
“닥쳐!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아이의 응석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한번 터진 둑은 막을 수가 없다. 수정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쏘아붙이면서 얼마 전 수정에게 화냈던 게 떠올랐다. 그땐 워낙 무방비로 당한 거라 어쩔 수 없다지만 이번에는 잘 넘길 수 있었는데...
잊었던 아빠 얘기로 당황했지만 근근이 수습을 했다. 그런데 사소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걸리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말... 꿈에서도 하는, 항상 가슴에 담아두고 있던 말 아니던가?
그동안 수행을 통해 마음이 정화되었다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 마음을 닦으려면 몸이 닦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과 다르게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이렇게.
“똑똑! 엄마, 나 들어갈게.”
진주가 노크를 했다. 조금 전 수정은 불같이 화를 내고 방으로 들어와 문을 꽝, 닫았다.
마땅히 멈출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겉으로는 열심히 소리치면서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용두사미, 뱀이 꼬리 감추듯 슬그머니 방으로 왔다. 여전히 화난 척 세게 문을 닫았으나 마음은 편했다.
“화는 풀렸어?”
“화난 거 아냐. 짜증이 난 거지.”
“풋! 똥이나 변이나.”
진주가 웃으며 말했고 수정도 따라 웃었다.
웃음은 따뜻한 성질이어서 위로 올라간다. 기분을 좋게 만든다.
“표현이 그게 뭐냐? 애늙은이처럼. 어린애가.”
“엄마 눈에는 내가 어리게 보여?”
“그럼 어른이야?”
“어제까진 어렸을지 모르지. 하지만 인제는 아냐. 더 이상 어리지도 약하지도 않다고.”
끝난 줄 알았더니 또 시작이다... 피하려고 해도 쫓아와 건드려 싸움을 건다.
얘는 어떻게 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단군 할아버지서부터 광개토대왕, 세종대왕... 황진이, 잔 다르크, 툰베리도 보고.
그 사람, 엄마가 좋아하는 그 사람도 만났어. 라마다...?”
“라마다?”
“그 왜, 라마다 마하르쉬...”
“라마나 마하르쉬?”
“그래! 엄마한테 힘내라고 전해달래.”
“휴우-! 저승이라도 다녀온 거냐?”
한숨이 나왔다. 이쯤 되면 화낼 필요도 없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진주의 상상력에 혀를 찰 뿐이다.
“그 모든 사람들이 나랑 함께 하고 있어.
나는 이 시대의 잔 다르크가 될 거야.”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니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주; 이상의 시 <오감도 제2호> 전문)
제가 시인 이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걸까?
“이상은 안 만났니?”
‘모르면 손 빼라’는 바둑 격언처럼, 마땅한 대응이 생각나지 않으면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상책이다. 조금 전처럼 버럭 화를 내는 실수를 되풀이하지는 말아야 한다.
“만났냐고? 엄마! 무슨 소리야? 지금 내 안에 있어. 여기 나하고 함께 있다고.”
진주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안 믿어져? 못 믿는구나?”
“네가 나라면 믿겠니?”
“그럴 수 있어. 이해해.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나면 엄마도 믿을 걸?
“그래. 들어나 보자.”
어서 말해라. 도대체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애기해 봐라.
어떻게 해서 네가 갑자기 독수리 오형제가,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병구가 되었는지...
그렇게 수정은 진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의 SF 재난영화, 혹은 스펙터클한 판타지 영화의 줄거리쯤으로 흘려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외계인 비슷한 태양인이 등장하고, 엄청난 재앙이 지구를 휩쓸고, 인류가 파멸의 위기에 처하는 이야기...
그런데 수정은 그 이야기에 빠져버렸다. 꼼꼼하게 묘사하는 진주의 진심에 설득당해 버렸다. 방관자적 태도와 의심을 버리고 절박하게 진주의 심정에 동화되어 버렸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어디쯤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곳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중 명근이 나타나 구해주었을 때 짜릿한 쾌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우석의 울타리를 벗어나 진주를 탈출시킬 때 수정의 심정이 100% 생생하게 공감되었다.
그것은 진짜였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수정이 할 수 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 나야. 나라면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야!’
수정의 미래가 수정의 현재 속으로 쑤욱! 들어왔다. (제19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