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내 집처럼 쉽게 열렸다.
순간 진주는 짧은 심호흡을 했다. 아닌 척 했지만 내심 떨렸던가 보다.
‘내가 가는 길이 역사다. 우린 이길 것이다.’
진주는 자신을 세뇌하듯 다짐하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소리 없이 들어가는 사람들...
백가지 얼굴의 남자 백면이 진주의 뒤를 따르고,
그 뒤로 길메시 교수가 장총 같은 것을 들고 들어갔다.
마지막은 중국집 식칼을 든 털보 남자였는데 지리산 회의 때 보았던, 영화 <올드 보이>의 남자 오대수였다.
현재 시간 밤 2시 50분. 지금부터 10분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이미 도상 연습을 했던 터라 일행은 빠르게 실내로 스며들어 갔다.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세상일은 항상 예외란 게 있으니까.
비상 경보장치를 해제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여기는 논현동 서우석의 집.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일이지만, 진주도 여기서 20여 년을 살았기 때문에 아주 익숙하다.
진주는 지금 그 미래를 바꾸기 위해 과감한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중이다.
어두운 실내에 들어서며 적외선 안경이 달린 마스크를 쓴다.
“시간도 없는데 이걸 꼭 써야 돼?”
사전 리허설 때 길 교수가 불평을 했지만 진주는 강하게 밀어붙였다. 20여 년 사는 중 딱 한번, 갑작스럽게 수면가스가 뿜어진 걸 보았기 때문이다.
집의 시스템은 컴퓨터에 의해 자동 운전되는데, 그날 컴퓨터가 비상상황으로 판단하고 수면가스를 살포했던 것이다.
이유? 그건 아무도 모른다. 궁금한 건 인간의 몫이지 태양인이나 컴퓨터의 것은 아니다.
‘저기...!’
진주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일행이 모두 시선을 집중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골동품이 보였다.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다고 할까?
이제부터는 사소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니까.
‘하나 둘 셋!’
진주의 손가락 신호에 맞춰 약속된 행동들을 했다.
백면이 램프 모양 용기를 길 교수 앞으로 내려놓자, 길 교수가 들고 있던 총구를 용기 입구에 들어 밀었다.
푸슉-!
바람 빠지는, 어찌 들으면 방귀 소리 같은 총소리가 나면서 용기 입구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은 잠시 램프와 총을 휘감아 돌며 발버둥 치더니 용기 속으로 발려 들어갔다.
파라락!
들어간 듯 하던 빛의 물체가 다시 나와 퍼덕거렸다.
여러 개의 가느다란 다리를 발버둥치는 것이 문어와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얀 옥색으로 빛나는 문어...
그러나 길 교수 총의 강력한 흡입력에 빛의 문어는 결국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닫아!”
길 교수가 소리치자 진주가 준비된 도구로 총구를 막아버렸다. 처음으로 태양인의 몸체를 포회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진주와 길 교수는 손을 들어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실 며칠 전 만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길 교수는 수십년 동안 태양인들의 영도 하에 잘나가던 사람 아닌가? 더군다나 그는 백성원과 함께 극동지역 인간 관리의 책임자였다.
그러나 갑자기 찾아온 생면부지의 진주는 길 교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처음에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길 교수는 과학자다. 진주의 반박 불가능한 논리와 증거 제시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를 체험하고 온 진주는 완전히 다른 사람, 전사가 되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든 것을 아는 전지력과, 의심과 망설임을 모르는 강한 실천력을 가졌다.
그런 진주가 길 교수를 포섭해서 처음 개시한 작전이 바로 이것, 태양인 극동지역 본부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극동 본부의 박효주를 비롯한 세 태양인을 포획하고, 식물 상태에 있는 서우석의 몸체를 가져가는 것이 목표였다.
“Impossible!"
"I'm possible!!"
불가능은 없다. 진주는 20년을 그들과 함께 살았다. 그들의 루틴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들 태양인들은 매일 밤 3시가 되면 인간의 육체를 벗어나 그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워싱’이라고 했다.
매년 정기적으로 버뮤다 해협의 태양인 본부에 가서 정석으로 위싱을 받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워싱도 하는 모양이었다. 말하자면 세차장 세차가 아니라 손수 세차라고나 할까?
그들이 워싱을 하는 동안 집안의 모든 것은 셧다운되었다. 일체의 행동이 금지되었다.
단 하나의 예외... 서우석은 유난히 진주를 예뻐하여 워싱 과정을 지켜보도록 했다.
나중에 이것이 논쟁거리로 대두된 적이 있다.
‘미래의 서우석은 과거의 진주를 위해 정보를 제공한 것일까?’
많은 가설과 논증이 있었지만 합의된 결론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일어난 사실, ‘미래의 서우석이 과거의 진주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서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한다.
인간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그것, 변화를 인정하고 적응하려고 노력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진주는 그러한 노력의 결정체라 할 만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염원이 한 점 진주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해야 돼? 시간도 없는데.”
<올드 보이>의 오대수는 조금 험한 일을 맡았다. 태양인이 워싱을 할 동안 그들의 육체는 잠들어 있다. 당연히 박효주와 부경 부진 자매도 잠들어 있었고, 오대수의 임무는 그들 몸을 잘게 써는 일이었다.
“반드시!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오대수가 투덜거렸고 진주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오대수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그들의 몸을 발라버렸는지는 생략하기로 하자. 그건 태양인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지 우리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한 것은 아니니까.
간단히 부연설명을 하자면 이건 ‘능지처참(陵遲處斬)’이라는 형벌을 간소화한 것이다. 능지처참은 대역죄 등 최악의 죄를 범한 자에게 내리던 최대 극형으로, 온 몸의 살과 뼈를 바르고 저며서 서서히 죽게 만드는 형벌이다.
“시간 관계상...”
시간이 없어서 절차대로 하지는 못하고 대강 사지와 머리를 분리시키는 정도에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덜렁, 한 장의 선언서를 그들 시신 위에 던져 놓았다. 시간 상 낭독은 생략되었다.
‘오 등은 자에 아 인류의 자주민임과 지구별의 주체자임을 선언하노라...
각각의 주체들이 동등하고 화해롭게 공존하는 그 날까지
우리는 불굴의 투지로 싸워 이길 것이다.’
“됐어요. 이게 할아버지를 구하러 가요.”
10분의 시간이 거의 소진되고 있었다.
일행은 급히 서우석이 누워있는 침대로 갔다.
‘할아버지. 이렇게 뵙네요.’
전쟁터에서 감상은 필요 없다.
백면이 얼른 달려들어 서우석을 옮길 준비를 했다.
“내가 업지요.”
오대수가 등을 내밀었고, 백면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누워 지낸 서우석의 몸은 인형처럼 가벼웠다.
“빨리! 시간 다 됐어.”
마음이 급해진 길 교수가 앞장을 서서 나가기 시작했다.
비상 장치는 꺼놓은 상태지만, 잠시 후면 관리 인력들이 다니기 시자할 것이다. 그 전에 집을 빠져나가야 한다.
“아 참! 선글라스!”
서둘러 나가던 진주가 멈춰 섰다.
“왜 그래?”
“선글라스를 깜박 했어요. 할아버지 선글라스.”
“그냥 가. 시간 없어.”
“안돼요. 먼저 가세요. 금방 갈게요.”
진주는 망설임 없이 돌아서 서우석의 서재로 달려갔다.
말은 서재라고 하지만 책은 거의 없다. 서우석은 그 곳에서 주로 음악을 들었고, 선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갖가지 종류의 선글라스였다.
‘이거.’
수십 개의 선글라스 중에서 진주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 좋아하는 선글라스가 많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를 쓸 수밖에 없다. 동시에 두 개의 신발을 신을 수 없는 것처럼.
타르트 옵티컬의 아넬... 영화배우 제임스 딘, 조니 뎁의 선글라스로 유명한 모델이다.
서우석, 진주의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던 선글라스.
진주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앞으로 깨어날 할아버지를 위해 뭔가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아차!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오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미 몸을 숨기거나 피하기엔 늦어버린 시간.
“아... 안녕하세요?”
익숙한 얼굴이라 그냥 인사를 해버렸다. 80 정도 되어 보이는 할머니였는데 박효주가 어릴 때부터 함께한, 말하자면 이 집의 터줏대감이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이력 때문에 그는 예외적으로 선택되어 태양인 시대를 살았는데, 그 때 몇 년을 진주도 함께 살았던 것이다. 진주를 귀여워해서 가까이 지냈고, 진주는 그의 죽음도 지켜보고 장례도 지내주었다.
그런 미래의 일이 할머니에게 통한 것일까? 할머니는 반갑게 진주를 대해 주었다.
“그래. 이 시간에 웬일이야?‘
“워싱 끝났거든요. 이것 좀 가져가려고.”
“워싱? 그게 뭐여?”
“그런 게 있어요. 가 볼게요.”
진주가 방긋 웃어주고 돌아섰다. 내가 할머니를 알아보면 할머니가 나를 알아보듯이, 내가 그렇다면 세상도 그런 것이다...
진주는 자신의 행동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집 앞에 나오니 수정이 걱정하며 차 앞에서 서성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차 뒷자리에 올랐다.
“이제 어디로 가지?”
차가 출발하고, 운전석의 길교수가 물었다.
그러나 진주는 밖을 내다보며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보스! 어디로 갈까요?”
그 말에 정신이 돌아온 진주가 밝게 소리를 질렀다.
“아! 인제 오빠한테 가야죠? 할아버지를 구했으니, 이젠 오빠를 구해야죠.”
“오빠도 구하고, 세상도 구하고.”
“맞아요. 그리고 백면, 얼른 비상회의 소집하세요.”
갑자기 지목당한 백면이 의아해 하며 되물었다.
“비상회의? 무슨...?”
“지난번에 영랑이 소집했던 100인 회의 말이에요.”
“지금?”
“네.”
“당장?”
“긴급으로. 즉시 모이도록 하세요.”
“99명밖에 안되는데.”
“100명이라니까.”
“근데 너 말이 좀... 맞먹냐?”
“아이참! 생각해서 그러는구만. 그럼, 할아버지라고 불러줘요?”
“그건 아니지!”
백면이 꽁무니를 빼며 슬쩍 얼굴을 쓰다듬자 젊은 청년의 얼굴이 되었다.
“나를 포함해도 99명이야.”
“내가 있잖아요.”
“너는 너고. 그 노인네들도 모르더라고. 나머지 한 명이 누군지.”
“나라니까요. 내가 그 마지막 한 명이예요.”
“아...! 그럼 네가...”
“이제야 알았나보네?”
“바로 그...”
“쉿! 말하지 마요.”
“나 들었어. 들었는데 어떻게 말을 안 해?”
“하지 마요.”
“왜?”
“비밀이예요.”
“비밀? 그게 왜 비밀이야?”
“비밀이라니까.”
“그러니까. 네가 인류를 구하러 미래에서 온 전사라는 게 왜 비밀이냐고?”
“이 멍청이 할아버지야! 말을 해버리면 어떡해? 비밀인데.”
“아! 그렇게 됐네... 쏘리.”
백면이 머리를 긁적이자 모두 함께 웃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차는 빠르게 시내를 빠져나가 고속도로에 접어들었다.
이미 보란 듯이 선전포고까지 한 상황이니,
이제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전쟁 국면으로 접어들 터였다. (제 22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