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은 침대 위에 죽은 듯 누워 있고, 호남은 그런 재림을 바라보며 홀로 모과 주를 마셨다. 싸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가 뱃속을 자극하는 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심란한 기분이 사르르 가라앉았다.
‘술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꼬?’
아이를 키우며 혼자 사는 여자의 삶에 어찌 소용돌이가 없었겠는가? 습관적이지는 않았지만, 호남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면 술의 도움을 받았다. 신들린 여자여도 때론 힘들고 때론 외롭기도 하다.
살다보면 누구나 그럴 때가 있지 않나?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어쩌면 너무 가까운 사이여서 말하기 민망한 그런 상황 그런 기분들... 이런저런 이유로 호남은 술을 마셨고, 결국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다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다시 아들 재림이 속을 썩이고 있다.
“걱정 안 해도 돼. 이제 잠들었으니까,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걱정 안 해요.”
“그런 사람이 술 마셔? 처량하게 혼자?”
“풋! 좀 처량맞긴 하죠?”
태민이 슬그머니 들어와 호남 앞에 앉았다. 호남이 자신의 잔을 비우고 태민에게 술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 잔 하실래요?”
“좋지.”
“저번에도 겪어봤잖아요. 걱정 안 해요.”
“난 걱정돼, 자기가.”
“죄송해요...”
호남의 얼굴이 붉어졌다.
술이 들어간 탓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
아까 저녁에 재림이 불쑥 기적 같은 마술을 부리고 난 후의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던 재림이 갑자기 기절해 쓰러졌다.
“재림아!”
비를 멈추는 마법을 목격하고 감탄을 금하지 못한 지혜가 놀라 소리쳤다.
“괜찮아. 갑자기 에너지를 소모해서 그래. 자연을 거스르는 건 엄청난 운기를 필요로 하거든.”
지난번 빵과 음료의 기적 때에도 겪었던 일이라 일행은 금세 마음을 놓았다.
“비켜봐. 내가 업을게.”
쾌활한 황인경이 얼른 나섰다. 문제의 소란이 발생한 것은 그 때였다.
“당장 비켜! 어디에다 손을 대?”
아까부터 우울한 표정으로 따라오던 호남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괜찮아요. 가벼운데요 뭐.”
황인경이 재림의 몸을 안으며 말했다.
“그냥 두라고! 내 아들 건드리지 말라고!”
히스테리칼하게 소리 지르는 호남의 태도가 모두가 놀라 멈칫했다.
항상 밝고 상냥하고 여유 있던 호남만 보아오던 터라 놀라움은 더 했다.
“나한테 맡겨.”
보고 있던 태민이 수습 차원에서 끼어들었다.
그러나 웬걸? 되레 불을 들쑤신 꼴이 되고 말았다.
“원장님도 빠져요!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왜들 그래?
놔두라고, 제발!
왜 내 아들 주위에 모여서 애를 못살게 굴어?
다 가버려! 내 아들은 내가 돌볼 테니까.“
호남이 눈물까지 흘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바람에 다들 서로 눈치 보며 그 자리를 피했다.
호남의 갑작스런 히스테리가 어이없었지만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민 등 일행이 집으로 들어가자 호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재림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엉뚱한 지점에서 터져버리고 말았다.
다시금 조금 전에 있었던 재림의 대중 연설이 생각났다.
“나는 님들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님들과 함께 죽으러 왔다. 나는 님들보다 먼저 죽을 것이므로, 님들의 죽음을 조금은 늦출 수 있다...”
아까 재림이 이 말을 할 때 호남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단순한 비유적 수사라고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점점 그 말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진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진짜로 죽으려고 그러나?’
그 잠깐 사이에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제일 속상한 것은 호남 자신이 재림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니, 부정하지 못한다고 하는 게 맞다. 분명히 나중에 돌이켜보면 반박의 여지가 많았는데도 재림의 말은, 발화되는 그 순간에는, 0.01%의 의심도 들지 않는다. 한낮 밝게 뜬 태양을 가리키며 ‘저것이 태양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명확하고 순수하다.
‘내 아이가 죽는구나...’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너도 죽도 나도 죽는다.
문제는 시간이다. 언제 죽느냐? 버스 타는 것도 순서가 있는데 하물며 죽음에 순서가 없을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는 것이다.
설령 그대로 되지는 않더라도, 낳아준 어미보다 자식이 먼저 죽으면 안 된다.
‘하지만 안 된다! 너를 나보다 먼저 죽게 둘 수는 없어. 넌 내 아들이야!’
호남은 기도하듯이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한다.
‘절대로 너를 내 앞에 보내지는 않으리라... 단군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나는 너를 살릴 거야!’
호남이 재림을 들쳐 업고 집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쳤다.
따뜻한 환영에 호남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남의 실수나 실책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다...
****
“죄송해요 원장님.”
호남이 술을 따르며 다시 한 번 사과를 한다.
“앞으로도 종종 죄송하세요. 덕분에 좋은 술 좀 마시게.”
태민이 웃으며 재미없는 농담을 했다. 호남은 더욱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원장님한테 말씀 안 드린 게 있어서... 아무래도 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엉? 갑자기 겁나네. 나 몰라도 되는데?”
“아뇨. 아셔야 돼요.”
“사랑 고백 같은 거면 안 해도 돼. 이미 알고 있는 거니까.”
“재림이 얘기예요. 재림이 사랑하시잖아요.”
“재림이? 재림이가 왜?”
태민이 앞에 누워있는 재림을 돌아보며 물었다.
“휴,,,!”
호남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막상 재림에 얽힌 얘기를 하려니 만감이 교차했다.
재림의 역사는 곧 호남 자신의 역사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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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은 어릴 때 버려졌다.
생후 100일 겨우 넘기고 하남 검단산의 작은 절 앞에 버려진 채 발견되었다.
포대기에 ‘호남’이라는 이름만 덜렁 쓰여 있었는데,
절에 오는 보살들 사이에서 ‘남자아이를 바라서 지은 이름’이라느니 ‘호랑이 같은 남자처럼 씩씩하라고 지은 이름’이라느니 말이 많았다,
어쨌든 호남은 이러저러한 사연들 속에 절에서 지내게 되었고,
스무 살 되던 해에 논현동 서우석 회장의 집 가정부로 취직되었다.
호남이 손재주가 있어 음식도 잘했는데,
‘김치 잘 담그는 아이’라는 소문에 스카우트된 거였다.
“부잣집인데, 주인남자가 김치를 좋아해.
입맛이 까다롭다더라고.“
그러나 김치는 담가보지도 못 했다.
논현동 서우석의 집에 들어간 다음날 밤 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일은 네가 김치를 담가라.”
첫날 대강의 분위기를 익히고 잠자리에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길게 수염을 기른 할아버지가 호남에게 다가와 껴안았다.
호남은 그 품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햇빛 반짝이는 물 위에 둥둥 떠서 하늘을 보았다.
그 때 갑자기 하늘을 날던 새 한 마리가 쒸익! 날아오더니 호남의 가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살점이 파헤쳐지고 피가 솟구쳤으나,
호남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호남이 놀라 잠에서 깨었을 때는 모든 상황이 끝난 후였다.
“아저씨...”
“좀 이따 날 밝으면 사람들 몰래 나가라.
이거 갖고 가고.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호남은 집주인 아저씨가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그날 새벽 도둑처럼 집을 빠져나왔다.
다시 절집으로 돌아온 날 밤, 호남은 단군 할아버지를 영접하고 신의 세계를 받아들였다.
임신한 것을 안 것은 얼마 후였는데, 호남은 굳이 그 아이를 단군 할아버지의 자식이라고 주장했다.
****
“얘기해 줘서 고마워. 그렇다고 재림이가 자기 아들이 아닌 건 아니잖아?
뭐... ‘사실은 제가 낳지 않았어요.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만.”
태민은 농담에 서툴다. 아재 개그라고 하기도 민망하다.
“사실은...”
호남이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을 하다가 멈췄다.
쳐다보던 태민이 슬쩍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뭔가 좋지 않은 소식일 것 같은 예감.
“아까 그 사람... 재민이보고 아버지라고 하던 사람이요... 낮에 만났어요.”
“아, 그래요?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 분 아들이에요. 논현동 회장님 아들. 중요한 용건이 있다고.”
“아! 그 사람이 왜?”
“친자 확인서를 가져왔어요. 재림이가 자기 아버지 아들이라는 확인서.”
“그러니까, 그게 어쨌다고? 자기 동생이니까 재림일 내놓으래?”
“네...”
호남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이없어진 태민이 언성을 조금 높였다.
“뭐? 어쩐지! 그 사람,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더라고.”
“자기 아버지 영혼이 재림이한테 들었대요. 쓰러진 아버지를 살려야 된다고.”
“아...!”
태민은 그 동안의 과정이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아까 저녁의 그 상황도 따라 이해가 되었다.
그 때 태민은 재림의 반응이 의외였다. 40대의 남자가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재림은 그걸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정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이후 재림이 보여준 변화도 납득이 되었다.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런데...’
태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리해 보았다.
“그러면, 아버지의 영혼이 아들에게 들었단 말인가?”
“그렇죠.”
“일부러 그랬단 건가? 우연이 아니고?”
“치밀한 계획이었던 거죠.”
“처음부터... 논현동 그 날부터?”
“당연히.”
“세상에! 왜? 뭣 땜에?”
“그러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그 사람은 왜, 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걸까요?”
‘원대한 계획...’
한동안 영화 <기생충>의 대사가 유행한 적이 있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태민은 갑자기 그 영화의 내용이 떠오르면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빠! 저거 좀 봐봐. 뉴스에 우리 나왔어.”
지혜가 급히 들어와 태민을 불렀다.
태민과 호남은 나누던 얘기를 중지하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우택이 혼자 TV 앞에 있었는데, 저쪽에서 황인경과 미완이 나오는 중이었다.
미완도 태민처럼 불려나오는 중인 모양이었다.
“뉴스에 나오면 나쁜 일인데?”
미완이 웃으며 다가왔다.
“어디 보자...”
예상대로 나쁜 내용이었다.
근래에 있었던 몇 건의 동반 자살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재림의 ‘R.I.P 운동’ 영향이라는 것이다.
언제 찍었는지 도깨비 집과 근처에 모인 사람들의 항공촬영도 같이 보도되고 있었다.
다른 방송도 역시 비슷한 내용이 언급되는 걸로 보아 뭔가 조직적인 대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어떤 채널은 1978년 남아메리카 가이아나이 존스타운에서 일어난 인민사원 집단 자살 사건을 보여주면서 비슷한 사이비 광신집단일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자살 방조’, 나아가 ‘살인 교사’로 재림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네티즌의 의견도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었다.
“어쩌나?”
태민이 미완을 쳐다보았다.
미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동안 왜 반응이 없나 했지. 조만간 무슨 수를 쓰겠군.”
“아직은 재림이만 주목하는 것 같지?”
“저 놈들 시나리오 써서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겠지.”
“진짜 재림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호남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제가 지킵니다, 누님! 걱정 마십시오.”
황인경이 씩씩하게 소리 질렀다.
“그래. 앞으로 여러 가지 돌발사태가 날 수 있어. 두 사람이 경호 잘 해.”
미완이 지혜와 황인경을 쳐다보며 말했다.
가볍게 웃으며 하는 소리였지만 엄격한 당부가 담겨있는 말이었다.
“예, 알겠습니다!”
“아까도 살짝 긴장했어요. 어떤 남자가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혹시 달려들까 봐.”
“달려드는 거야 겁날 거 없지. 혹시 흉기를 가지고 있으면 그게 문제지.”
“조심할게요.”
“저렇게 방송에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는 거는 뭔가 작전이 시작됐다는 얘기라고 봐야 돼.
우리도 조만간 전투태세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라.“
신중한 성격의 태민이 덧붙였다.
“오늘은 일단 마무리하자고.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 하고 그만 잡시다!”
미완이 가볍게 하품을 하며 들어갔다.
지혜와 황인경, 우택은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아 핸드폰에 코를 박았다.
“우린 어떻게? 얘기를 좀 더 할까?”
태민이 호남을 쳐다보며 물었다.
“전 얘기 다 했어요. 원장님이 답을 주실 건 아니죠?”
“답? 무슨 답?”
“그 사람이 저한테 왜 그랬을까? 그 대답.”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럼 됐어요. 주무세요.”
일동은 그렇게 각자의 한가한 밤 시간을 가졌다.
편안하고 달콤한 밤이었을까?
그 날 한밤중 논현동의 어느 집에서는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고, 그건 공공연한 선전포고였기 때문에 그 반향이 만만치 않았다.
처음에 뉴스 채널에서는 특보로 그 사건을 신속 보도했다.
살해방법이 워낙 잔인했고, 사건 직후 현장의 영상이 누군가에 의해 제보된 탓도 있었다.
그러나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사건 보도는 축소되고 자취를 감췄다.
사건 자체가 무야무야되었다기 보다는 더 큰 충격을 위해 응축되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태양인은 구체적이고 확실한 공격을, 그에 저항하는 도깨비 인간들은 게릴라 전술을 각자 준비하는 한 밤의 고요함...
****
명근은 누군가의 텐트에서 잠이 들었다.
전날 밤 명근은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고 다시 소란을 피웠고,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그를 진정시켰다.
명근을 약간 정신 나간, 피해망상증 환자 정도로 인식한 사람들은 한 스푼의 동정심을 발휘하여 그에게 술을 권했고, 명근은 술기운에 또 한바탕 시끄럽게 한 다음 쓰러졌다.
“이봐! 일어나.”
깨우는 거친 손길에 명근이 부스스 일어났다.
아직 어둠의 흔적이 남아있는 아침녘, 명근은 우람한 덩치의 실루엣을 보며 말했다.
“누구...?”
“얼른 나와.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직 술이 깨기도 전이었으나 명근은 고분고분 남자를 따라 나섰다.
여기 저기 텐트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고, 부지런한 일부의 사람들만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 모르지?”
앞서 가던 남자가 슬쩍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속에서는 ‘넌 나 아냐?’라고 되물었지만, 지금의 명근은 순한 양이다.
‘올드 보이...“
명근이 아무 반응도 안 보이자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나, 올드 보이라고.”
“...?”
그래 너 늙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영화 올드 보이 주인공. 그게 나야.”
미소까지 지으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남자는 바로 오대수였다.
‘별 한심한 인간들 많군! 영화 속 인물을 자기와 착각하다니.’
속으로 혀를 차며 따라가는데, 저쪽 나무 아래에 왠지 익숙한 두 여자가 보인다.
‘설마...!’
본능적인 긴장감.
진주는 길 교수와 백면에게 여러 사항을 지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분간 여기 도깨비 집을 본부로 할 거예요. 교수님은 전파 차단 설비부터 먼저 하세요.
그리고 백면. 백면은 소집된 도인들 데리고 진영을 완성해야 돼요.
여기 사람들까지 해서 마법 진을 세워서 도깨비집을 은닉하는 거죠. 그걸 뭐라고 하죠?“
진주가 힐끗 다가오는 명근을 보았다.
“그런 거 난 잘 몰라.”
백면이 살짝 주눅 들어 대답했지만 진주는 듣지 않고 다가오는 명근 쪽으로 돌아섰다.
수정은 이미 복잡한 심사를 표정에 드러내며 명근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정아... 그럼....”
명근이 두 사람 앞에 서서 말을 더듬었다.
“저 진주예요. 설마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죠?”
“그래! 진주! ...이렇게 보는 구나!”
명근이 감개무량한 어조로 감탄을 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신파는 생략하기로 해요. 감격은 나중으로 미뤄두고요. 가요.”
“어딜?”
진주가 자리를 뜨려하자 명근이 다급하게 물었다.
“할아버지한테 가야죠. 할아버지 찾아다닌 거 아니에요?”
“찾았지! 애타게.”
“그러니까요!”
진주는 매사에 거침이 없다.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모르는 것에서 온다. 미래를 다녀 온 진주는 흔들림이 없다. 단호하고 확신에 차 있다.
****
재림이 눈을 떴을 때 부드럽고 따뜻한 촛불이 방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만 일어나시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깨우려다가 봐 준거야.’ 하는 뜻이 분명한 말투.
재림은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알겠어요?”
진주가 밝고 낭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제야 재림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명근, 수정, 진주, 태민, 지혜, 미완, 인경, 우택, 그리고 호남까지...
고개를 돌리니 침대와 나란히 서우석이 눕혀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재림은 링거를 맞으며 잠들어 있는 서우석을 잠시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기억나지? 어제 저녁에 너 쓰러졌어. 12시간을 잔 거야.”
호남이 어색한 침묵을 깨려고 말을 꺼냈다.
재림이 호남을 보며 한 마디 했다.
“물 좀.”
“그래!”
호남이 얼른 물을 건네주자 재림이 살짝 한 모금 마시고 돌려주었다.
그러나 호남은 받지 않고 말했다.
“더 마시지.”
“됐고! 이제 님들은 님들의 자리로 돌아가시지. 끝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알았으니까, 물부터 한 모금 더 마셔.”
“...”
호남의 태도가 전과 달라진 것이 이상한 듯, 재림이 잠시 쳐다보고는 물을 마셨다.
“님아. 님은 나를 아나?”
재림이 물병을 옆에 놓더니 호남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알지! 아주 잘 알아. 넌 내 아들이거든.”
“그건 껍데기 겉모양이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이야.”
재림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진주는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듣는 시간이라고 생각하여 참기로 했다.
“껍데기 허상이라도 건강만 했으면 좋겠는데!”
“건강이 무슨 소용? 이제 나의 시간은 다 했어. 나는 정해진 결과대로 죽음을 맞을 거야.
처음부터 예정된 순서대로.“
“제발!”
갑자기 호남이 소리를 질렀다.
방 안의 모두 놀라 호남을 쳐다보았다.
“그 소리 좀 안 하면 안 되겠니? 엄마 생각도 좀 해줘.
넌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야. 죽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라고.“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 그게 님들의 진리 아닌가?
슬픔이나 두려움으로 그걸 막을 수는 없지.“
“자꾸 떠날 것처럼 얘기하는데...
님이여, 님은 어디로 가시나이까?“
재림의 가장 열렬한 팬이라 할 수 있는 황인경이 슬쩍 물었다.
그냥 장난스레 던지는 말처럼 들렸으나 인경의 본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재림이 물끄러미 인경을 바라보다가 말을 시작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빛은 순간의 재미를 위해 물질을 만들었는데, 그 순간이 영원을 저당 잡아 버렸다.
나에게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왜 왔는지부터 말하련다.
나는 순간에 저당 잡힌 영원이다.
나는 순간의 아름다움에 나의 영원을 팔아버렸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처럼,
나는 영원에서 온 순간이다.
나는 빛으로부터 도망친 물질이다.
한 순간 빛나고 사라지는 아름다운 육체에 스며들었다.
아름다움은 헛되다. 금방 사라진다.
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움의 실체를 열심히 찾아다녔다.
파랑새를 찾아 여행을 떠난 치르치르와 미치르처럼.
나는 나의 파랑새를 찾아냈던가?
내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던가?
빛의 세계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희귀한 체험의 순간이 있었던가?
무수히 많았다!
많다는 말만으로는 너무 부족하다.
세상은 온통 아름다운 것투성이였다!
잘 담은 김치의 짜릿하고 강렬한 입맛
봄 산의 황홀한 초록 잔치
온 몸을 정화시키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선율
땀에 젖어 달리는 청춘들의 거친 숨소리
조오카...
그 응축된 욕망의 간절한 울림
어린애의 욕은 아름다웠다.
그 응축된 욕망의 간절함이 태양보다 빛났다.
그렇게 나는 감염되었다.
순간의 아름다움이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정복당했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의 욕망을 사랑하고 흉내내기 시작했다.
예수가 하나님을 흉내내기 시작했듯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온 것처럼
나는 내 아들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왔다.
예수가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여 죽어갔듯이
나는 인류의 멸망을 대신하여 죽어갈 것이다.
슬퍼하지 마라.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는다.
나의 죽음이 완전한 멸종을 막을 수 있었으면!
그런 희망을 안고 이제 나는 간다.
어디로 가느냐 물으니 답하도록 하자.
나는 깊은 우주 멀리 날아가 한 알의 씨앗이 되려고 한다.
그것이 오래된 나의 계획이다.
그것을 위해 나는 왔고, 가려고 한다.
운명이다.“
재림이 말을 마치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꽤 긴 시간을 말했으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유언을 마친 듯 한 분위기라고 할까?
심지어 호남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정적을 깨뜨리고 명근이 소리를 질렀다. 눈물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돌아오세요. 와서, 저한테 아버지 소리 들으셔야죠!”
“그래요, 아버님. 저희도 왔어요.”
수정이 진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할아버지! 저 진주예요. 할아버지 손녀.”
재림이 진주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잘 자랐구나. 그럴 줄 알고 있었다. 다 나의 계획대로 되었어.”
“아뇨,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틀렸어요!”
진주가 재림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님아. 나는 틀리지 않아. 그건 인간들이 하는 일이지.”
“그럼 다시 말할게요. 계획이 바뀌었어요. 할아버지 계획은 취소예요.”
진주는 재림 앞에 앉아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모든 게 다 바뀌었어요. 아니 모든 건 다 변해요.
할아버지는 과거의 계획을 현재까지 가져왔잖아요?
저는 미래의 계획을 현재로 가져왔어요.
두 계획이, 과거와 미래가 섞여서 현재를 만들죠.
이제 그만 끝!
더 이상 예수 코스프레는 하지 마세요.“
“아버지, 그만 돌아오세요!”
명근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말이 스며들지 않는 상황에 재림이 약간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돌아갈 수 없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재림이 침대 옆에 나란히 누인 서우석의 몸을 힐끗 돌아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침을 뱉어서 땅에 떨어지면 내 것이 아니듯이,
똥이 내 몸에서 나왔으나 다시 돌이킬 수 없듯이,
나는 저 몸으로 돌아갈 수 없다!
자신의 똥을 먹어 삼키라고 하면 님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해야죠.”
“해야 한다고?”
“똥이 아니라 내 살을 발라서 먹으라고 해도,
필요한 일이면 다 해야죠.
왜?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전쟁이 시작됐잖아요!“
“님아! 그래서 내가 온 거야. 님들을 돕기 위해서.”
“109호!”
답답해진 진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까부터 얘기하잖아요. 계획이 바뀌었다고. 작전이 변경됐다구요.
말해줄까요? 109호의 작전은 실패했어요.
101호가 자기들 병력을 끌고 여기로 와서 109호를 체포해 가요.
그 다음은 뻔 한 스토리죠.
그래서 제가 왔어요. 새로운 미래를 가지고. 알아들어요?“
109호가 언급이 되자 재림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재림의 변화에 진주는 더욱 고삐를 조이기로 했다.
“오늘 새벽에, 저희가 논현동을 습격해서 101호를 잡았어요.
선전포고를 한 거죠.
생포한 셋은 나중에 협상카드로 쓸 거예요.“
재림의 눈이 푸른색으로 빛나더니 살짝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겁이 난 호남이 진주를 달랬다.
“이제 그만 해. 애가 흥분하잖아.”
진주는 그 말을 무시하고 얘기를 계속했다.
“할아버지는 안 죽죠.
버뮤다 본부로 끌려가 워싱을 받건 우주로 혼자 도망가건 죽을 리는 없잖아요.
그치만 재림이는 어떻게 되죠?
재림이... 아직 살아있죠? 거기 있긴 있는 거죠?“
진주가 재림의 두 손을 잡고 간곡하게 말했다.
손을 잡히자 재림의 몸이 덜덜 떨리면서 급격한 변화를 시작했다.
진주에게 잡힌 손에서부터 달아오르는 난로처럼 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재림아, 안 돼!”
놀란 호남이 달려들어 재림을 감싸 안았다.
재림의 손을 잡고 있던 진주도 힘껏 재림을 껴안았다.
그러자 갑자기 재림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 질렀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재림의 몸에 전기 통하듯 빛이 소용돌이쳤다.
빛은 여러 색깔로 변했는데, 그에 맞춰 웅- 하는 진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상항변화에 모두 당황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옴 마니 반메 훔!”
미완과 황인경이 거의 동시에 두 손을 뻗으며 주문을 질렀다.
그러나 웅- 하는 소리는 더 커져갔고, 재림에게서 품어지는 빛의 강렬함도 더해갔다.
펑-!!
어느 순간, 재림의 몸에서 강력한 에너지 파장이 퍼지며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재림을 껴안고 있던 호남은 붕- 떠서 방구석으로 날아가 버렸다.
진주는 강력한 진동에도 견디고 재림을 꼭 잡고 있었다.
그 가느다란 팔에 어떻게 그런 힘이 있는지 궁금해 할만 했으나, 현장의 급박한 상황은 그런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
뽀로록!
모두 폭발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순간, 재림의 정수리 쪽으로 백옥 색깔의 빛덩어리가 솟아 올라왔다.
그 빛덩어리는 구멍을 빠져나온 연체동물처럼 재림의 머리 위로 떠오르더니 잠시 정지했다.
빛덩어리가 빠져나간 재림의 몸은 피식! 쓰러졌고,
진주는 그런 재림을 지탱하며 빛덩어리에게 소리 질렀다.
“할아버지! 돌아가!”
그 소리에 문어 모양의 빛덩어리는 다시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 반응했다.
떨어져나갔다가 다시 재림에게 오려던 호남도 잠시 주춤했다.
어떤 행동이 적절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사태를 관망하며 주시하고 멈춰있자 빛덩어리도 부드러운 색깔로 진정되는 듯 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허공을 흘러 진주를 감싸며 지나갔다.
이어 실내의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지듯 에워싸고는 누워있는 서우석의 몸 위에 멈춰 섰다.
슈욱!
정확하게 서우석의 상단전이 문처럼 열리더니 빛덩어리가 빨려 들어갔다.
“아버지...”
명근이 중얼거렸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아버지가 살아나는 순간인 것이다.
100일이 넘는 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던 서우석의 몸에 살짝 빛이 감돌았다.
우웅-!
잠시 전류가 흐르듯 부드러운 기운이 전신에 흐르는 듯 하더니 툭! 끊어졌다.
명근이 놀라 달려들려 하자 수정이 얼른 제지했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다...
부우우웅-!
열이 가해진 물이 끓어오르듯, 그렇게 서우석의 몸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감싼 빛도 색온도를 높이며 다양한 색을 선보였다.
뜨거운 열 폭풍과 강력한 빛이 뿜어져서, 방 안의 사람들은 똑바로 서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상황이 끝난 것처럼 서우석의 몸이 잠잠해졌다.
“아버지!”
“재림아!”
명근은 자기 아버지에게, 호남은 자기 아들에게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달려들었다.
진주는 재림을 침대에 눕히고 물러났다.
상황은 정리되었고, 호남이 왔으니 이제는 엄마의 시간인 것이다.
문제는 서우석에게 있었다.
“아버지가... 숨을 안 쉬어요.”
이상한 기색을 느낀 명근이 울먹이며 도움을 청했다.
그 말에 태민이 얼른 다가가 맥박을 살피고 황인경을 불렀다.
“CPR!!”
명근이 빠르게 조치를 취하자 인경이 가슴 압박을 시작했다.
“재림인 어때? 괜찮아?”
인경이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동안 태민이 호남에게 물었다.
“예. 괜찮아요.”
“다행이야. 최소한은.”
절반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인경이 땀을 뻘뻘 흘리며 심폐소생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서우석의 심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되죠. 너는 어떡하라구요!”
명근이 소리 높여 통곡하는 소리에 놀란 것일까?
곱게 잠들어 있던 재림이 눈을 떴다.
“재림아!”
호남이 감격하여 소리 지르자 모두 재림 쪽을 쳐다보았다.
재림은 누운 채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
방안 모든 사람의 눈이 재림의 입에 집중되었다.
죽은 서우석을 안고 울던 명근마저도 울음을 멈추고 재림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재림은 천천히 방안의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호남에게 멈췄다.
호남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냥 재림을 보며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네가 먼저 입을 열어라...
뭐라고 말을 해도 다 받아들이마...
무슨 말을 해도 너는 내 아들이다...
“엄마. 나 배고파.”
재림이 호남에게 말했다.
그 말과 함께 호남의 눈에서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버지!”
동시에 명근도 죽은 서우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었다.
한 사람은 가고, 다른 사람은 왔다.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잠시 슬퍼하고 살짝 기뻐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온다고 영원히 있고 간다고 아주 가는 것도 아니다.
방 안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다.
조금 전 마지막으로 빛의 폭발이 있을 때의 일이다.
폭발이 일어난 직후 빛들이 모여 하나의 불기둥을 만들었다.
그 물기둥은 지붕 위 하늘에서 방 안까지 연결되었는데,
레이저 광선처럼 서우석의 몸과 재림의 몸, 그리고 진주의 몸을 몇 번 오갔다.
그러다가 진주에게 멈추더니, 진주의 머리 위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밝기로 응축되면서 진주에게 스며들었다.
파다닥!
진주의 분홍 머리끈이 번쩍 빛났다.
서우석으로 돌아가는 대신,
먼 우주로 달아나는 대신,
태양인 본연의 처지로 회귀하는 대신,
미래에서 온 전사 진주의 수호령으로 남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진주를 비롯한 지구인들은 이제 험하고 어려운 전쟁을 해나가야 할 테지만,
그런들 뭐 어떤가?
포기하지 않는 한 오늘은 밝아올 것이고,
뜻이 있는 한 길은 열릴 것이다.
그리고 먼 훗날 인류의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겠지.
어느 가혹한 시련기에
분홍 머리끈을 한 불굴의 전사가 지구를 구했다고...
(지구인 제1부;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