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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Sep 09. 2022

제14화; 해에게서 소년에게

본격 탐사 판타지 <지구인들> 제 1부 ; 좀비는 아니지만 쉽게 죽을 수는 없지    


제14화; 해에게서 소년에게         



눈을 감으면 태양의 저 편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내게 속삭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 어른이 될 시간이야 너 자신을 시험해 봐 길을 떠나야 해 

니가 흘린 눈물이 마법의 주문이 되어 너의 여린 마음을 자라나게 할 거야     

 

남들이 뭐래도 네가 믿는 것들을 포기하려 하거나 움츠러들지 마 

힘이 들 땐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 해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  

    

변명하려 입을 열지 마 그저 웃어 버리는 거야 

아직 시간이 남아 있어 너의 날개는 펴질 거야 

Now We are flying to the universe 

마음이 이끄는 곳 높은 곳으로 날아가   

   

(...)     


더 높이 더 멀리 너의 별을 찾아 날아라 소년아 

저 모든 별들은 너보다 먼저 떠난 사람들이 흘린 눈물이란다 

세상을 알게 된 두려움에 흘린 저 눈물이 

이 다음에 올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지

   ---(‘넥스트’의 노래 <해에게서 소년에게> 중에서)     


집에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아마도 매우 시끄러울 소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진주가 음악을 크게 듣기 시작하면서 수정은 그 방에 방음벽을 설치해 주었다. 이웃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기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 수정의 귀에 ‘크다’고 들릴 정도라면 진주의 방에서는 엄청 울려대고 있다는 뜻이다. 

수정이 보기에는 노래라고 할 수도 없는 소음 수준의 음악을 진주는 하루 종일 틀어놓고 있었다. 문을 닫고 있으니 무엇을 하는지 알 수도 없다.   

  

‘그래도 태풍은 지나간 거야.’   

  

흔히 ‘중2병’이라고 얘기하던가? 정말 진주는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주었다. 

중학교 들어가자 마자부터 일탈하기 시작하더니 점점 일탈의 속도를 높여갔다.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은 예사고, 술과 담배를 일삼기 시작했다.

     

수정은 그냥 모른 체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꾹 참았다.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어린 진주에게 지은 잘못을 그대로 받는 것이니 속죄의 마음으로 견디리라 마음먹었다.   

   

수정이 그렇게 인내할수록 진주의 도발은 점점 노골화했다. 술에 취해 남자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노골적인 성행위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도 수정은 그냥 모른 체했다.   

  

혼자서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해결책을 몰라 그저 바라볼 뿐이었지만, 진주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저 마음은 오죽하겠는가? 오죽하면 저렇게 자해 행위를 해야만 하겠는가?      

‘데스스토커’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통해 안정을 찾지 못했다면, 아마 수정은 자신과 진주의 삶을 모질게 끝내버렸을지도 모른다. 

결자해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 딸 진주는 자신 때문에 저렇게 비틀린 삶을 살게 되었으니까.  

   

“눈 감아! 어서!”  

   

미완법사가 새로 ‘아관문’이라는 공부를 개설하고 수정을 불렀다. 수정은 스펀지처럼 미완의 가르침을 받아들였고, 비로소 수정의 마음에 안정이 오고 있던 참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더니 진주가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와 같이 있었다. 둘은 진주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수정은 씻은 후 식탁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 때 스르르, 진주의 방문이 열리고 벌거벗은 진주와 남자의 몸이 보였다. 남자의 엉덩이가 먼저 보였지만, 수정을 사로잡은 것은 진주의 얼굴이었다. 

진주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수정을 보더니, 수정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눈을 감았다.     


“눈 감아! 어서!”   

  

그 때, 왜 그 장면이 떠올랐을까? 

눈을 감는 진주를 보면서 수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말 단어 그대로 캄캄해지면서 그 소리가 들렸다. 

그건 수정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진주에게 한 말이었다.  

   

인도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쉬람에 살면서 수정은 섹스에 탐닉했다. 도피의 수단이었지만 어쨌든 수정에게는 신세계였다. 삼년의 결혼생활에서 전혀 알지 못했던 섹스의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어린 진주를 재우고 그 옆에서 섹스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잠든 진주가 갑자기 눈을 떴고, 수정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눈 감아! 어서!”   

  

당연히 진주는 기억을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자신도 잊어버리고 있던 그 장면이 그 순간 왜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진주가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나서 수정은 천천히 일어났다. 서서히 눈앞이 밝아졌다. 진주의 방문을 닫아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으나 그냥 돌아서 걸었다.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미완법사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관문을 수행하길 잘했다, 이제부터 끝까지 참회하면서 살겠다, 그런 생각이 차례로 들었다.


그게 불과 2년 전이다.      

그 2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어쩌면 ‘그날 이후’ 변했다고 말해야 할지 모른다. 

그날 그 시간은 수정이 확실하게 과거와 이별한 순간이었다. 맨 먼저 대전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전 집은 이혼 후 수정을 받아준 보금자리였지만 너무 상처가 많았다. 여기저기 마음의 물이 새고 구석구석 망가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그게 싫어 인도로 달아났다고 해서 이미 생긴 상처가 없어지진 않았다. 아물고 흉터가 남아 여전히 수정의 의식을 지배했다. 

무엇보다 진주가 저렇게 발버둥치고 있지 않은가?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세종 시 새 집으로 가면 혹시 진주가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무작정 이사를 했다. 미완법사는 ‘그래?’하고 잠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내 수긍하고 응원해 주었다.   

   

사실 대전을 떠나는데 있어서 수정이 가장 고민한 부분이 미완법사와 멀어진다는 점이었다. 미완은 이 세상에서 진주가 유일하게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엄마인 수정보다 더 의지하는 미완을 벗어나면 진주가 불안해하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수정은 과감하게 결정을 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만약 진주가 가지 않겠다고 하면 그냥 두고 가리라 스스로 다짐을 했다. 

다행히 진주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새집에 가서 새롭게 살아보리라...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울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혼 후 대전 집에 내려갔을 때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들어온 집. 대전 집에 가서는 내내 울기만 했다. 수정이 울면 어린 진주도 울었다. 

보다 못한 아래층의 미완법사가 올라와 진주를 달래주었고, 그 때문인지 진주는 미완에게만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세종 집에서는 두 사람 모두 울지 않았다. 배가 고파도 먹지 않았다. 

수정은 아관문 체선을 했고, 진주는 핸드폰만 들여다보았다. 삼일 정도 지났을 때 진주가 슬그머니 나가더니 생수를 사왔다. 수정에게 하나 자신이 하나... 

진주가 처음으로 수정에게 증오와 미움 아닌 무언가를 준 순간이었다.     


빌딩 2층이 나가게 되었다. 요가학원을 했는데 운영이 되지 않았다. 세종시가 살기 좋아 보여도 자생적인 경제구조가 아니어서 모두 힘들어했다. 

수정이 내려갔을 때 2층 요가학원은 텅 비어있었다. 빌딩 주인이기는 하지만 수정은 처음 들어가 보는 곳이라 호기심에 둘러보았다.      

그때 구석에서 울고 있던 미리를 발견했다. 수정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미리가 멋쩍게 웃으며 물었다.     


“터널이 기네요. 언젠가는 끝나겠죠?”

“터널... 끝나죠.”

“아니, 이번 생이요. 

이번 생은 완전 망했거든요.”     


눈물은 전염성이 참 강하다. 미리가 웃으며 말하는 중에 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와 거의 동시에 수정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왔다.  

    

몸이 마음보다 더 빠른가? 수정이 미리의 말에 공감하고, ‘나도 망했어! 우린 똑같아.’라는 생각이 난 것은 이미 울기 시작한 다음이었다.     


그렇게 서로 손잡고 한참을 울고 나니 두 사람은 친해져 있었다. 

수정은 미리를 데리고 집으로 올라갔고, 미리는 수정과 진주를 위해 죽을 끓여 주었다. 그렇게 세종 시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진주를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했다. 안했다기보다 못했다. 그건 수정의 영역을 넘어서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평생 진주의 옆에서 진주가 괴롭히면 다 받아 내리라, 이 아이의 증오심이 다할 때까지 견디리라, 그런 다짐뿐이었다. 

부디 진주가 이번 생은 완전히 망했다고 포기하지 말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미리에 대해서는 달랐다. 미리의 인생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조그만 위로는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텅 빈 요가학원에서 둘이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수정은 체선을 하고 미리는 요가를 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공감대를 찾아갔다.     


“야관문? 정력에 좋다는 그거? 뭐 그딴 거를 하고 그래.”     


수정이 하는 체선의 이름이 아관문이라고 하자 미리가 기겁을 했다.   

  

“야관문 아니고 아관문. 내가 본다, 나를 본다, 뭐 그런 거지.”

“이상해 언니. 그런 거 하지 마. 

야관문이건 아관문이건 언니하고 안 어울려. 하지 마.”

“이상한 거 아냐.”

“안 어울린다고, 언니하고.”

“그럼 어쩌라고? 나 같은 게 뭐는 어울릴까?”

“많아. 게다가 언니는 이쁘잖아. 매력 있어.”

“내가 무슨 매력이 있어. 없어. 얘기했잖아, 나 고생한 거.”

“고생해서 독이 올랐어.”

“올랐었,었,었,었지. 지금은 아냐.”

“그 독이 모이고 모여서 치명적인 매력이 됐다니까. 

언니 전갈자리지?”

“어머, 어떻게 알았어? 나 전갈자리야.”

“언니 처음 만난 날, 같이 언니 집에 올라갔잖아? 

그날 진주도 처음 봤지. 두 사람 보고 내가 무슨 생각했는지 알아? 전갈. 전갈 가족. 

잔뜩 독이 오른 예쁜 전갈 모녀.”

“별 이상한 소리. 전갈이 예뻐?”

“얼마나 예쁜데! 왜, 연예인들 거미 타투 많이 하잖아. 그거보다 훨씬 예뻐.”   

  

그러면서 미리가 인터넷 검색으로 보여준 전갈이 바로 ‘데스스토커’였다. 독성이 강하기로 유명한 전갈 중에서도 가장 맹독성을 가졌다고 했다. 

그 시간 이후로 그들의 공간을 <데스스토커>라고 부르기로 했다. ‘맹독성 여성들의 공간’이라는 뜻이다.  

  

하나 둘 드나드는 사람이 늘었다. 스스로를 망했다고 생각하거나, 매력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자신을 맹독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터였다. 

남자는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여성 전용이 되었고, 일단 그렇게 간판을 달았다.      

특정해서 뭔가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시간을 정하지는 않았다. 회원 각자가 잘 아는 분야를 가르쳤고, 필요하면 배웠다. 


수정은 체선이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으나 처음부터 미리에게 거부당했으므로 포기했다. 그걸 제외하면 잘 안다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섹스에 대해서라면 얘기할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후 10년 정도, 인도와 한국을 아우르며 수많은 남자들과 섹스를 했다. 인도에서는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인종의 남자들을 만났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폭넓은 계층과 연령의 남성들과 섹스를 했다. 

일탈의 시간이었고 방황의 과정이었지만 따져보면 얻은 것도 많았다. 

    

처음에는 가벼운 잡담이었다. 회원끼리 수다를 떨다보면 자연스럽게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남자들이 모이면 군대하고 축구얘기라고 하는데, <데스스토커> 회원들의 화제는 건강이었다. 

먹는 것으로 시작한 건강에 관한 담화는 운동과 정신건강 문제를 거쳐 남자 얘기로 끝이 났다. 

건강의 가장 큰 적은 남자라는 것이 대부분 수다의 결론이었다.   

  

수정은 주로 듣는 입장이었는데, 얘기가 섹스 문제로 가니 잠자코 있기가 힘들어졌다. 그 분야에 관해서라면 수정이 다른 회원들에 비해 월등히 아는 바가 많았다. 

사람은 많이 겪어봐야 안다고, 남자와의 섹스 역시 많이 겪어본 사람이 잘 안다.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없는 것처럼, 똑같은 형태의 섹스는 없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감정이 다르다. 섹스는 그 모든 것의 결정판이다. 제대로 하려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맘대로 하게 놔두면 안 돼. 남자들은 바보 멍청이야.”  

   

무슨 얘긴가 듣다가 참다못한 수정이 끼어들자 모두 까르르 웃었다. 

‘남자는 바보 멍청이’라는 말에 대한, 공감의 웃음이었다. 

농담처럼 시작한 말이지만 그건 수정의 진심이었다. 수많은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사연들을 겪으며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섹스에만 국한해 말하자면 분명히 ‘남자는 바보’다. 섹스에 대해 잘 아는 남자건 모르는 남자건, 미숙한 남자건 능숙한 남자건, 어리건 성숙하건 상관없이 바보다. 

다시 말해 ‘무엇이 섹스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바보인 남자에 대한 수정의 생각은 여러 단계의 변화를 거쳤다.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경멸하다가, 어떤 때는 측은해했다.      

처음에는 성적 테크닉의 문제인줄 알았다. 상대가 성적으로 미숙하거나 수정 자신의 기교가 부족한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근본적인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은 깊어져갔다.     

수정은 비교적 늦게 자신의 쾌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되었다. 클리토리스 자극을 꺼리는 편이었는데, 어떤 최고의 테크니션을 만나서 자신의 자극점이 좀 더 깊은 곳에 위치함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는 완벽한 몸과 탁월한 기술을 갖추고, 어떻게 해야 상대가 만족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정은 그 남자와의 섹스를 통해 최고의 오르가즘이 뭔지 확실히 체험을 했다.     

그 남자는 탄트라 섹스 전문가라고 했다. 섹스를 통해 도를 닦는, 자칭 수행자였다. 


수정은 나중에 그를 ‘섹스 머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하루 종일 섹스를 해도 지치지 않았다. 아무리 여러 번 섹스를 해도 상관이 없었다. 

다양한 기교로 수정을 자극하면서 자신에 대해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수정이 까마득히 정신을 놓고 쾌락의 정점에 올라갔다 오면 그는 조용히 물러났다.      

물러났으나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그의 성기는 처음과 똑같이 우람하게 발기되어 있었다. 


탄트라에서 ‘접이불누(接而不漏)’라고 한다는데, 섹스를 하되 사정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그는 ‘성적 불사(性的 不死)의 남자’였다.     

처음에는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감동하고 열광했다. 하루 종일 사랑의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그러한 열락의 나날을 보내다가 수정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히 섹스의 쾌락에 충만한데 뭔가 허전했다. 

쾌락의 쓰나미가 왔다가 스러지면 저 멀리서 애잔한 고독이 안개처럼 슬그머니 밀려왔다.  

   

‘아직 내 과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나 보다.’     


현재에 눈이 멀면 과거를 탓하게 된다. 

그러나 과거란 그림 속에 호랑이와 같다. 내가 그것을 진짜라고 믿지 않으면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현재의 문제는 전적으로 현재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내가 애착하는 그 무엇 속에 나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원인이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섹스는 테크닉이 아니구나. 

함께 하는 섹스를 원하는구나.’   

  

수정은 어느 날 탄트라 맨과의 섹스를 끝낸 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최고의 것이 최상의 만족을 주지는 않는다. 최고의 부자가 최고 행복을 의미하지 않고, 최고의 음식이 최고의 시간을 보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 해도, 마음 없이는 그저 공허한 불꽃놀이에 불과하다. 

자고로, 마음이란 서로 통해야 한다.  

   

‘섹스란 너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인데...’  

   

탄트라 맨은 완벽했다.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었다. 

그는 수정에게도 그런 완벽함을 가르쳐주고 싶었겠으나, 수정이 진정 원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완전함, 완성, 불멸, 그런 것에 수정은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함께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같이 기뻐하고 같이 슬퍼할 평범한 사람이 더 좋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살아가면 된다. 함께한다는 느낌, 서로 하나가 되어 있다는 연대감이 중요하다. 


그러나 탄트라 맨에게서는 그러한 연대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은 적당히 부족해야 한다. 그래야 감정의 삼투압이 생기고 서로 스며들 수 있다.    


****


절망을 피해 떠났던 땅으로 희망을 찾아 돌아왔다. 어쩌면 살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섹스밖에 없었기 때문에 수정은 섹스에 몰두했다. 그러나 돌아온 땅에서의 섹스도 안정을 주지는 못했다.      


남자들이 문제였다. 수정은 그저 함께 하는 시간을 원했으나, 남자들은 뭔가 해내려고 애썼다. 잘하려고 하거나 잘하는 척 하거나, 잘하고 싶어 하거나 잘 못하는 걸 숨기려고 했다. 

그냥 자신의 모습대로 최선의 시간을 살아내면 되는데, 뭔가를 인정받고 싶어 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멍청이들.’     

 

그게 수정이 한국의 남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받은 인상이다.

그렇지 않은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귀국 후에도 수정은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섹스를 했다. 다시 말하면, 수정과 가장 가까이 있던 미완법사도 수정의 사정권 안에 있었다는 뜻이다.      

수정은 미완법사가 진주와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저 사람하고는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제 누구와도 가능한 여건만 된다면 섹스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미완법사는 전혀 그런 틈을 주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수정 식으로 말하자면, 미완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황인경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아관문 체선에 들어온 직후부터 유난히 수정을 좋아하고 따랐다. 

수정이 황인경을 데리고 온천지구 모텔에 갔을 때 그는 과분한 상을 받은 학생처럼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래도 돼요?”    

 

다소 멋쩍어 하는 그와의 섹스가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서툰 아마추어라고나 할까? 

다만 황인경이 수정에게 좋은 인상을 준 것은 그가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잘 다듬어진 체격의 건강한 청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뽐내려는 태도가 없었다. 

과시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미숙한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열등감도 없었다. 당당하고 솔직하고 겸손했다. 무엇보다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수정은 그날 그 자리에서 황인경에게 섹스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가 알고 있던 무지몽매한 섹스지식을 걷어버리고, 수많은 경험에서 얻은 진정한 섹스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황인경은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잘 따라왔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수정의 능숙한 리드로 다듬어지고 이내 합일의 경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두 개의 몸과 두 개의 마음이 하나로 합체되는 희귀한 경험, 그게 수정이 생각하는 진짜 섹스다.  

    

수정은 세종 시로 이사 온 이후로 황인경과의 섹스를 끊었는데, 아직도 황인경은 수정을 따라다닌다. 수정의 연애상대가 되고 싶은 모양이지만 수정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좋은 남자이긴 하지만, 수정은 현재 ‘남자를 졸업했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이른 결혼으로 시작된 남자의 악몽이 끝난 것이다. 

    

그러나 끝난 줄 알았던 악몽이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났다. 전 남편 서명근의 갑작스런 등장이 수정을 혼란에 빠트렸다. 

거의 잊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아픈 과거도 이젠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서명근과 갑작스럽게 조우한 이후, 수정은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감정의 폭발에 당황해야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한 마디라도, 물어는 봤어야지.’    

 

수정은 전혀 명근에게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문제는 진주였다. 명근을 만난 이후 계속 진주의 존재가 수정의 마음을 자극했다.     

 

‘어쨌든 자기 딸인데,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기는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애써 부정했다. 수정은 이혼 후 한 번도 진주에게 아빠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아니 그 훨씬 전, 진주를 낳은 얼마 후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명근은 진주의 아빠였었던 적이 없다.     


“뭘 도와줄까? 필요한 거 말해봐.”    

 

결혼 3년이 지나 이혼하겠다고 말하자 서우석이 말했다. 

서우석은 늘 수정 편이었고, 명근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수정을 측은해 했다.   

  

“진주요. 진주 성을 바꿀게요. 서진주가 아니라 오진주로.”

“그건 안 돼.”    

 

그때 단 한번, 서우석은 수정의 말을 거부했다.    

 

“네가 어떻게 키우던 상관 안 해.  

하지만 진주는 ‘우리’ 아이야.” 

    

감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서우석이 ‘우리’라고 강조해서 말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우리’ 속에는 수정도 속해 있었을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을 끝낼 수 있었고, 진주와 평생 먹고 살만큼의 재산도 마련되었으니까. ‘오’건 ‘서’건 그까짓 성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음악이 끝나고 진주의 방이 조용해졌다. 질풍과 노도의 사춘기가 지나간 것처럼, 언젠가는 시끄러운 음악소리도 끝날 것이다. 

뭐, 끝나지 않아도 상관없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엄마가 지켜줄게.’ 수정은 그렇게 생각한다. 

진주가 어떤 일탈행위를 한다고 해도 수정은 받아낼 준비가 되어있다. 그게 진주에게 지은 죄를 갚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아빤데... 네가 인간이기는 한 거냐?’  

   

명근에 대한 감정이 점점 명확하고 강력하게 치고 올라왔다. 분노... 

삼 년 동안, 아니 그 후 십여 년간 잠복해 있던 분노가 화산 터지듯 솟아나왔다. 이런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자리에서 가루가 되도록 부숴버렸어야 했는데. 

후회와 자기혐오 등 온갖 잡동사니 감정들이 수정의 몸에 소용돌이쳤다.   

  

진주가 방문을 열고 나오지 않았다면 수정은 발작적으로 고함을 질러댔을지도 모른다. 

진주는 수정의 모든 것을 무효화시킨다. 어떤 계획, 어떤 욕망, 어떤 생각, 어떤 감정도 진주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완전한 포기, 무아. 그게 진주를 대하는 수정의 마음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공격이 시작됐어.”   

  

진주가 수정 앞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 나뭇가지처럼 깡마른 팔이 수정의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진주의 몸은 앙상한 나무처럼 말랐다. 팔과 다리는 잎 떨어진 나뭇가지와 같고, 살 없는 얼굴에 눈만 깊게 빛난다.     

원래 잘 먹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근래 들어 먹는 게 더욱 까다로워졌다. 

처음에는 육식만 거부하더니 요즘은 확실한 채식주의자, 비건이 되었다. 

자세한 경위는 모른다. 세종 시로 이사온 이후 인터넷 서핑을 많이 하는데, 그 영향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무슨 공격?”     


휴대폰 화면에는 참혹하게 죽은 남자의 시신이 보였다. 머리 위부분이 둥그렇게 잘려지고, 안에 있어야 할 뇌가 깨끗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가끔 볼 수 있는, ‘엽기적인 살인사건...’ 운운하는 기사가 붙은 인터넷 뉴스였다.     


“이게 왜? 우리하고 상관없잖아.”

“저들 짓이야. 태양인이 삼시충 회수를 시작했어.”

“삼시충? 태양인은 또 뭐고.”

“아빠를 만나야 돼. 아빠도 위험해.”

“뭐라고?”     


진주의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나오자 수정은 깜짝 놀랐다. 

이혼하고 따로 살게 된 이후 진주는 한 번도 아빠라는 단어를 꺼낸 적이 없다. 수정에게도 진주에게도 그것은 금기어였다. 아니, 차라리 지워진 단어였다.     

그런데 어떻게 진주는 아빠를 떠올린 것일까? 아빠를 만나야 된다고? 아빠가 위험하다고? 

도대체 진주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수정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제 14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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