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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하태평 Oct 14. 2022

딸에게 쓰는 편지 81; 나는 꽃


있잖아 나는

꽃이야 시든

꽃이야 미처 피지 못하고

시든 꽃이야   

  

있잖아 나는

꽃이야 두려웠던 

꽃이야 활짝 피는 게 두려워서 악착같이 움츠리고

떨던 꽃이야   

  

꽃잎을 열면

마음을 열어 나를 보여주면

내 안의 더러운 자국들이 드러날까 봐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좀비처럼 깨어나서 아우성칠까봐     


외로운 늑대처럼 보이려고 했어

마음은 닫고

표정은 음울하게

고독과 반항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인 것처럼     


세상을 할퀼 거야!

편안한 사람들의 길에 날카로운 상처를 내고

깊고 큰 그림자를 남기며 하늘로 날아갈 거야!    

 

아무도 나를 만지지 못하도록

가까이서 보지도 못하도록

그저 우러러만 보도록     


있잖아 나는

꽃이야 늘 그 자리에 있는

꽃이야 잎은 다 떨어져 그나마 작은 색깔도 뽐낼 수 없지만

꽃이야 잎 대신 단단한 열매로 무장한  

   

나는 꽃

예쁜 색 꽃잎은 오래 전 떨어지고

앙상한 줄기로 험한 바람을 견딜 뿐이지만     

이젠 두렵지 않아

오래 괴롭히던 죄의식도 사라지고

당당하게 알몸으로 세상을 직면해     


부끄럽지 않냐고?

부끄럽지

지금이 아니라 그 때가

꽃잎을 활짝 피우지 못하고 나를 숨기느라 애쓰던

그 시절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왜 부끄럽지 않냐고?

미워하고 부정하던 세상과 화해했거든

잎도 없이 가는 줄기로 버티는 삶이지만   

  

나쁘지 않아

내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너도 피어나고

그렇게 주위에 자그마한 꽃밭도 생겼으니까

너를 보며 ‘예쁘다’고 웃는 사람들도 고맙고

나름대로 나도 꽃인 척 살랑거려보기도 하거든     


꽃잎은 다 떨어졌어도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아도

나는 좋아     


나는 꽃

이 꽃밭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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