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나는
꽃이야 시든
꽃이야 미처 피지 못하고
시든 꽃이야
있잖아 나는
꽃이야 두려웠던
꽃이야 활짝 피는 게 두려워서 악착같이 움츠리고
떨던 꽃이야
꽃잎을 열면
마음을 열어 나를 보여주면
내 안의 더러운 자국들이 드러날까 봐
아물지 않는 상처들이 좀비처럼 깨어나서 아우성칠까봐
외로운 늑대처럼 보이려고 했어
마음은 닫고
표정은 음울하게
고독과 반항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인 것처럼
세상을 할퀼 거야!
편안한 사람들의 길에 날카로운 상처를 내고
깊고 큰 그림자를 남기며 하늘로 날아갈 거야!
아무도 나를 만지지 못하도록
가까이서 보지도 못하도록
그저 우러러만 보도록
있잖아 나는
꽃이야 늘 그 자리에 있는
꽃이야 잎은 다 떨어져 그나마 작은 색깔도 뽐낼 수 없지만
꽃이야 잎 대신 단단한 열매로 무장한
나는 꽃
예쁜 색 꽃잎은 오래 전 떨어지고
앙상한 줄기로 험한 바람을 견딜 뿐이지만
이젠 두렵지 않아
오래 괴롭히던 죄의식도 사라지고
당당하게 알몸으로 세상을 직면해
부끄럽지 않냐고?
부끄럽지
지금이 아니라 그 때가
꽃잎을 활짝 피우지 못하고 나를 숨기느라 애쓰던
그 시절의 어리석음이 부끄러워
왜 부끄럽지 않냐고?
미워하고 부정하던 세상과 화해했거든
잎도 없이 가는 줄기로 버티는 삶이지만
나쁘지 않아
내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너도 피어나고
그렇게 주위에 자그마한 꽃밭도 생겼으니까
너를 보며 ‘예쁘다’고 웃는 사람들도 고맙고
나름대로 나도 꽃인 척 살랑거려보기도 하거든
꽃잎은 다 떨어졌어도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아도
나는 좋아
나는 꽃
이 꽃밭의 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