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ison de l'UNESCO
처음으로 파리에 갔던 건 가족여행이었다. 유로스타를 타고 해저터널을 볼 생각에 두 눈을 반짝이며 창문에 매달려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사실 낭만으로 가득할 것만 같았던 파리는 혼돈 그 자체였다. 눈뜨고 코 베이듯 소매치기에, 팔찌 강매도 당하고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 경기 여파로 길이 통제되어 무한 걷기의 반복이었다. 솔직히 그 이후론 겁도 나고 힘이 들어서 아빠 팔 소매를 꼭 잡고 뒷걸음을 졸졸 쫓아다녔다. 그렇게 뜻밖의 부녀가 함께 발맞춰 걷는 도보여행이 이어졌다.
구글지도가 활성화되지 않았던 그때 아마도 마르스 광장을 걸어 나와 길을 잘못 들어섰던 것 같다. 어느 한적한 거리에서 아주 웅장하고 기하학적인 건물을 발견했다. 파리 퐁트누아 광장 7번지에 위치한 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본부였다. 많고도 많은 역사적 건물을 지나온지라 그중 하나 인 줄만 알았지만 Y자의 독특한 건축형태와 규모가 어린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빠는 근처를 크게 한 바퀴 돌며 여기가 어떤 곳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 나 언젠가 여기서 일할 거야."
자신 만만한 나의 말에 평소 같으면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착실히 공부나 하라고 했을 텐데 파리의 마법이었던 걸까 아빠는 한참을 가만히 나의 눈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멋지네."
뭔가 그때의 기분은 갑자기 풍선을 타고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멋지다고?' '이곳에서 일하면 멋진 사람이 되는 걸까?'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학창 시절 무의식 중엔 이곳이 나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핸드폰이 생긴 이후에는 잠금화면에 이곳을 꼭 저장해 두었다. 꼭 달성하고 싶은 목표라기보다는 마치 상징과도 같은데 나의 삶이 어디만큼 와 있는지, 어디를 향해가는지를 가늠하고 안내하는 작은 이정표라고 할까. 그렇게 시간을 거슬러 나의 꿈의 일부인 이곳을 다시 찾았다.
사실 유네스코는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는 기관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교육, 과학, 문화 분야의 폭넓은 국제개발협력 사업을 추진하는 곳이다. 최근에는 기후변화와 연계된 교육사업을 주도하고 있어, 개인적으로 업무상 협력관계를 가깝게 구축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파리 담당자들과 온라인으로 만나 업무 협의를 하고 있으니 그래도 꿈에 많이 가까이 왔다고 믿어보자). 때문에 실제 직원들이 근무를 하고 있는 장소에 들어서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동시에 거대 미술관을 방불케 하는 이 보물창고 같은 장소를 개방해 준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유네스코 건물은 20세기 현대주의 건축의 대표하는 프랑스 베르나르 제르퓌스(Bernard Zehrfuss), 헝가리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이탈리아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Pier Luigi Nervi) 등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협력하여 설계했다. 건물은 세 개의 날개가 별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다양한 문화와 사상의 융합을 상징한다고 한다. 깔끔한 선과 기능적인 디자인, 유리·콘크리트·강철과 같은 현대적인 소재를 활용하여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특히 콘퍼런스 파빌리온(Pavillon des Conférences)은 3,000톤의 콘크리트로 이루어진 독창적인 구조로 철근 콘크리트 기술 덕분에 넓고 개방적인 실내 공간이 가능해졌다.
내부 공간에는 피카소, 미로, 칼더, 자코메티 같은 거장의 작품들을 포함한 700여 점이 넘는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건물 외부엔 이곳의 상징과도 같은 지구본(Symbolic Globe) 그리고 안도 타다오의 ‘명상 공간’(Meditation Space)을 만날 수 있다. 건물 안팤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건물이 주변 환경과 관계를 맺는 것처럼 그야말로 포용과 관용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고 있다. 거기에 각 회원국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알리고자 기부한 다채로운 작품들까지 더해져 공간은 예상하지 못했던 조화로 완성된다. 마치 모더니즘 그득한 콘크리트 건물 위에 피어난 장미 같달까?
사실 좋아하는 작품을 오롯이 나의 시선으로 오래 보는 것을 좋아해서 투어나 도슨트 듣는 것을 선호하진 않는데 워낙 거대한 공간이다 보니 짧게나마 허락된 모든 공간들에 발걸음을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멀리 펄럭이는 국기들을 바라보며 문득 나는 지금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되었나 천천히 시간을 되감아 본다. 언젠가 여기의 일원이 되면 나는 비로소 멋진 사람으로 완성되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나지막한 '멋지네...'는 꿈을 이뤄낸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 꿈을 찾아가는 딸의 당찬 포부에서 본 작은 희망의 감탄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왠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는 이미 충분히 멋져'라고 꿈의 장소가 나에게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어릴 적 꿈을 나만의 방식으로 상징할 수 있는 이런 특별한 공간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리고 이건 내가 파리를 사랑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