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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고내봉 둘레길

by 레알레드미
"여태껏 정상에 오르려 기를 쓰며 살았다. 하지만 내가 오른 정상은 기껏해야 동네 뒷산에 불과했다. 정복해야 할 높은 수많은 높은 산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구태여 바득바득 정상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수직이 아닌 수평에도 길이 있다. 둘레는 홀로 고독하지 않고, 완만하고 친근하며 다정하다. 여럿을 감싸안는 느낌이라 정겹고 따뜻하다. 오 나의 다정한 둘레길이여..."

밤중에 화장실을 여러 번 갔지만 아침에 제시간에 눈을 떴다. 습관은 참으로 무섭다. 어제는 첫 밤이라고 계속 뒤척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눈이 떠지다니...내안에 내재된 자연의 시간의 신비함을 느꼈다

고내봉 둘레길을 가기로 했다. 차를 애월 체육관 주차장에 세우고 고내봉 둘레길을 찾아갔다. 이정표를 보니 보국사 옆에 주차장이 있었다. 둘레길을 걷고 차량에 탑승해 이동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애월 체육관까지 다시 걸어가 차를 몰고 고내봉 주차장에 세웠다. 주차장에서 20분 걸어가니 고내봉 정상이었다.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정상에 올라가 시내를 바라보니 우거진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잘 보이지가 않았다. 정상에서 탁 트인 풍광을 기대했는데 우거진 가지들이 시야를 가렸다. 가지 쳐내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중요한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방치한 느낌이 들었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온 반대편으로 둘레길을 빙 돌아 가는 코스를 택했다. 주차장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완만하고 넓었다면 이 코스는 수풀이 우거져 좁고 가팔랐다.

등산 스틱을 의지해 걷고 있는데 까만색 뱀 꼬리가 보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스님이 살생을 막고자 지팡이를 두들겨 발에 밟히지 않도록 했다는 고사가 생각이 났다. 나는 뱀이 피할 수 있도록 스틱으로 땅을 쳐줬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석군에게 뱀을 봤음을 알려주었다.

"뱀이야"라는 내 말에 석의 반응은 "조심해"라는 말 대신에 "뱀은 갔느냐?"였다. 위기 상황에 자신만 피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그 말을 들으니 그를 믿고 살고 있는 나 자신이 서글펐다. 언제나 힘든 상황에 나를 앞세우는 그의 태도가 이런 상황에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것이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이기적 유전자를 장착하고 태어난다. 그걸 원망하며 살면 내 속만 시끄럽다. 포기하며 사는 게 오히려 낫다. 스스로 잘 헤쳐나갈 수 있는 자립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가까운 사이라도 기댈 필요가 없다. 서운해할 이유도 없다.

두고 봐라 나도 똑같은 상황에 이기적일 테니. 그때 그도 지금 내가 느낀 서운함을 당해봐야 한다. 후훗 이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석이 내 꿍꿍이를 눈치챘는지 왜 웃냐고 묻는다. 안 가르쳐 줄 거야. 어쩌면 그가 안 궁금할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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