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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

by 맛술





“새벽에 할머니 돌아가셨어. “

엄마의 담담하면서도 떨리는 목소리. 잠결에 받은 할머니 부고 전화에 멍하게 천장을 바라봤다.

아, 할머니...


외할머니 댁은 대로변에 있는 시골 슈퍼였다. 어렸을 땐 할머니 집이 슈퍼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슈퍼 안 과자가 전부 할머니 꺼라니, 어린 내겐 부러움 대상 1호였다. 슈퍼 앞에는 평상과 간신히 햇볕을 가려줄 그늘막이 있었다. 논일 중간중간 막걸리 드시러 오시는 손님들에게 할머니는 안주될만한 반찬들을 내어주셨는데 어린 내가 봐도 정이 느껴졌었다.

할머니의 손은 투박하고 까끌거려 보였지만 잡으면 따듯했다. 할머니를 안으면 할머니 배에 내 코가 닿았는데 은은한 된장냄새가 났다. 할머니께서는 담배를 피우셨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처음 봐서 그런가? 어린 눈엔 그 모습이 꽤나 멋있어 보였다. 할머니 얼굴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입술과 턱 중간쯤 큰 점이 있었다. 도톰히 부푼 그 점을 쿡쿡 눌러보고 싶었지만 그런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라서 생각만 했었다.

휴대폰이 보편화되기 전 90년대엔 집집마다 전화기가 있었다. 그땐 전화요금도 비싸서 짧고 신속 정확하게(?) 용건만 간단히 주고받았다. 잘 지내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엄마말은 잘 듣는지. 통화가 끝날 무렵 할머니는 ”집 앞 슈퍼 가서 할머니 이름 대고 외상으로 먹고 싶은 거 사 먹어. 할머니가 가서 다 갚아줄게. “라고 하셨다. 그땐 그 말이 왜 그렇게 든든했는지. 할머니가 전국 슈퍼들의 대장 같아 보였다. 마지막으로 뵌 할머니는 아기처럼 이유식 같은 묽은 죽만 드셨다. 엄마는 숟가락을 들고 ”아~~ 해야지 엄마“라고 하면 할머니는 아기새처럼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병에 걸린 할머니는 모든 사람을 '막둥이'라고 불렀다.



엄마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짐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갔다. 분홍색 한복을 입은 영정 사진 속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던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비록 사진엔 할머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큰 점은 없었다. 할머니는 그 점이 싫으셨는지 지우셨나 보다. )


그리움을 찌르는 순간은 일상에 있었다. 문득 할머니 생각에 눈물 흘리는 내 모습을 본 아이가 묻는다.

"엄마 왜 울어? 김순희 할머니 때문에 울어?"

아이 입에서 할머니의 이름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외증조할머니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장례식장에서 봤지. 김순희 할머니잖아."

아이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이 나를 꼭 안아주는 것 같았다.

“할머니 이름을 기억해 줘서 고마워.”


할머니의 슈퍼 자리엔 회전 교차로가 생겼다. 할머니도 슈퍼도 지금 이곳엔 없지만, 나의 기억 속 할머니는 여전히 그때의 그곳에 계신다. 나의 멋진 김순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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