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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연수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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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하 Oct 15. 2023

담임

회사에 처음 들어간 사람은 잠시 알에서 깨어 나온 오리의 시점으로 회귀한다. 오리는 세상에 나와 처음 인식한 존재를 어미로 인식하고 졸졸 따라다닌다. 신입사원도 초기에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건 팀장님일 수도 있고 바로 옆 자리 선배가 되기도 한다. 물론 이 삶이 인생 2회 차인 것 마냥 처음부터 능숙하게 회사생활을 헤쳐나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영락없는 오리 신세에 불과했다. 그리고 내가 만나게 될 세상을 조금이나마 두렵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게 해 준 귀인은 연수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다.






신입사원들은 20명 남짓 되는 팀으로 나뉘었다. 첫날 아침 오리엔테이션이 종료된 이후에는 각자의 팀과 그에 맞게 배정된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안내받았다. 함께 생활하게 될 동기는 누구일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유리로 된 교단 앞에 단정히 서 있던 한 사람이었다. ‘앵커’ 라 불리는 우리 팀의 담임쌤은 너그러운 미소로 우리를 맞이했고 앞으로 펼쳐질 시간을 이끌어주셨다. 전체 교육생들이 강당에 모여 강의를 듣는 시간을 제외하면 모두 팀별로 움직였고, 지리산 등반을 포함한 대부분의 야외활동에도 쌤은 함께 했다. 


어떤 집단이든 처음 만나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하얀 8절 도화지에 자신의 인생곡선을 그려 서로 발표했다. 한 번에 20명을 다 진행하지 않고 매 수업시간마다 2명씩 발표를 한 덕분에 잊을만하면 한 명씩 새로운 등장인물들을 익힐 수 있었다. 그때마다 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누구나 호기심을 가질 법한 특징을 발굴해서 추가 질문을 던져주셨다. 섬세하고 다정했다. 인생곡선의 최고점과 최저점의 진폭이 큰 사람도 있었고 일정한 형태로 가다가 주저앉는 모양도 있었다. 어떤 형태의 삶이건 있는 그대로 경청하고 애정 어린 시선을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몇 주가 지나면 흩어지고 말 인연이지만 그 짧은 시간의 농도를 짙고 또렷하게 만들어주셨다.



어쩌다 가끔씩 쌤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도 있었다. 그녀가 겪었던 어려운 순간에 이입하기도 하고 다양한 인간 유형들을 직접 만나보며 느꼈던 진솔한 감정 속을 간접적으로 헤엄쳤다. 그렇게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한 사람도 여전히 두렵고 고비가 되는 순간이 있고, 삶의 기쁨과 슬픔을 다들 비슷한 맥락에서 얻는 듯했다. 

이제 발걸음을 내디딘 우리에게 너무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회사 안팎으로 그녀는 최선을 다했고 정말 잘 된 일도 있지만 때로는 의지와 무관하게 겪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때론 겸허히 수용하는 태도도 필요하다며, 최선을 다하되 모든 순간에 애를 쓰며 힘들어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쌤은 훗날 나의 같은 팀 선배로 다시 만난다. 진귀한 인연으로 시작되어 든든한 나의 선배로서 무려 2년을 함께 했다. 회식이 있을 때면 혹시라도 내가 무리해서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챙겨주셨고 어느 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날에는 평소 귀가하는 반대 방향으로 먼 길을 돌아 기숙사에 내려주시기도 했다. 사소한 전표를 치는 법부터 보고를 할 때 신경 써야 할 것, 보고서를 보는 사람 관점에서 잘 쓰는 법, 후배들을 챙기는 법 등에 대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녀분의 공부에 대해서 나에게 상담을 할 정도로 친해질 무렵에 내가 다른 팀으로 이동을 하면서 이별을 하게 된다.






연수의 끝 무렵 교육생들은 다시 한번 팀으로 모여 앞으로의 회사생활에 대해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 나서 10년 후 나의 모습이 어떨지 상상하고 같이 공유해 보는 수업이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확신에 차서 이렇게 적었다. 언젠가 좋은 선배가 되어서 꼭 신입사원 연수에 참여하겠다고. 그때는 나의 담임선생님에 대한 순수한 동경으로 갖게 된 꿈이었다. 하지만 긴 시간이 흘러 나는 그 종이에 쓰여 있는 글자 그대로 다른 병아리들 앞에 서게 된다. 


처음 신입사원들 앞에 설 때는 마냥 즐기지는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다는 삶의 진리를 잘 깨우치고 있었지만, 들어와서 처음 마주하는 선배를 통해 갖게 될 회사의 첫인상이 나쁘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걱정도 많이 했다. 그렇게까지 의미부여를 해야 하는가, 생각할 수도 있다. 기업의 채용 담당자는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수 천명의 직원들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업 전체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자의식 과잉이다.

그렇지만 신입사원들의 입장에서는 회사에 대해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된다. 특히 오리들 앞에 서는 채용 담당자의 자리는 여러 가지로 섬세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 많다. 신입들은 입사 날 만나는 사람들과 온보딩 과정에서 경험하는 순간들을 기반으로 기업의 문화와 일하는 방식에 대한 감을 잡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반적인 운영이 불편하지 않았는지, 그들에게 배려와 존중이 전해졌을지 그런 부분들에 신경을 많이 쓰려했다. 교육도 서비스이기에 좋은 콘텐츠를 제공하려면 소중한 고객처럼 다가가야겠다는 나만의 철학 정도는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담백한 면모를 지닌 누군가를 바라볼 때 마음이 좋다. 나 역시도 신입사원에게 그저 깨끗하고 마음이 산뜻한 모습이고 싶다. 그래서 차분하고 힘은 많이 빠진 채로 다가가려 노력하는 편이다. 너무 지저분해 보이거나 회사의 이미지를 저해할 수 있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운영이 깔끔하면 된다. 오히려 나는 “당신과 비슷한 생각이나 고민을 갖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요즘은 그것만큼 상대의 마음을 얻기 좋은 방법은 없다고 느낀다. 우리가 각자 마음속에 한 번쯤 품어봤던 선생님들은 그런 인간적인 면이 있기에 가장 큰 존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친근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눈을 또렷하게 뜨고 바라보게 만들었던 나의 담임선생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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