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건 접질린 내 발목
다칠 걸 미리 알았다면 누가 마라톤을 신청할까, 고등학교 때 오른쪽 발목을 접질린 순간부터 나에게 발목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이후로도 강아지 산책을 시킬 때, 뛰다가 넘어져서, 계속해서 오른쪽 발목은 나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2년 뒤 마라톤을 이후로도 뛰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뛰지 못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던 중 다시금 러닝에 빠져 제대로 된 러닝화를 사고, 발목 보호대를 찼으니 이제 넘어지진 않겠지!라는 얕은 마음이 다시금 나를 발목의 늪에 밀어 넣었다.
5KM PB달성을 하고 난 이후 난 러닝 뽕에 취해있었다. 썸머 나이트런 10KM를 신청하고, 1차 목표는 1시간, 2차 목표는 1시간 10분 이내로 들어오기로 목표를 설정했으며, 페이스를 조금 더 빠르게 하기 위해 출근 전 러닝을 시작하면서 스피드를 올리기 급급했다. 러닝 옷도 다시금 새로 구매했다. 조정 경기장이니까 저번처럼 업힐 다운힐이 심하지는 않겠지, 들어오면 공짜 맥주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친구네 집으로 향했다. 다치면 포기하는 거야 라는 남자친구의 말에 알았어!라고 말했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얼마 만에 10KM냐, 새벽부터가 아닌 저녁에 뛰는 거여서 든든하게 밥을 챙겨 먹고 친구와 함께 길을 나섰다.
똑같은 티셔츠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조정경기장에 도착한다는 친구의 말과 함께 벌써부터 웜업으로 달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나치기도 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오니 어마어마한 인파가 눈에 보였다.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보이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어차피 길은 넓겠지, A그룹, B그룹, C그룹으로 나누어서 달린다는 말에 아직은 초보니까 하고 사람들 인파에 끼여서 겨우 겨우 C그룹에 합류했다. 잘 뛰고 올게! 하고 친구와 헤어진 후 스타트 라인까지 도달하니 넓어진 공터로 사람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자아 가자 가자! 하면서 달리기 시작하니 갓길이 나왔다. 이때까지는 괜찮았다. 갓길이다 보니 차량이 주차되어 있고 사람이 워낙 많으니 제대로 스피드를 내지 못해 그냥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애플워치로 페이스를 체크하면서 그래 초반에는 살살 달리고 중후반부터 페이스대로 달리면 되겠지, 하면서 1키로를 지나쳤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슬슬 넓은 길이 나오겠지 하면서 계속 달리는데 뭔가 이상했다.
길이 좁아도 너무 좁았고, 사람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2키로 쯤 지났을까,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불빛은 점점 없어졌다. 왜 가로등이 없지? 하면서 옆 사람과 팔꿈치를 부딪히기도 하고 뒤에 있던 사람이 추월하기도 하면서 좁은 레이스가 펼쳐졌다. 나도 이제는 걸을 수 없다는 생각에 사람을 지나치면서 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진흙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시야가 덜컹거렸다. 철퍼덕하는 소리와 함께 넘어져버렸다. 오른쪽 발목을 또 삔 것이다. 큰일 났다는 생각과 함께 뒷사람에게 방해가 될 수 없어 벌떡 일어나 옆길로 빠져나왔다. 잠시 멈춰서 발목을 내려다보고 살짝 돌려봤다. 다행히 심하게 삔 것 같지는 않았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3키로를 지났다. 앞으로 7키로는 더 달려야 하는데...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대로 여기서 포기 선언을 하고 다시 친구에게 돌아가느냐, 아니면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라도 완주냐, 하면서 다시 대열에 합류해서 살짝씩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픈 느낌은 오지 않았다. 쿵쿵 뛰는 심장소리와 함께 결국 완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평소 잘 가지도 않는 급수대에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이제 기록은 신경 쓰지 말고 더 이상 다치지 말고 뛰자!라는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러기엔 길이 너무 어두웠다. 코스가 너무 좁아 옆 풀숲에서 걷는 사람, 아예 코스를 반을 건너뛰는 사람들, 기온은 떨어졌지만 너무나도 많은 사람과 어둑한 날씨에 휴대폰 플래시를 켜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5키로 쯤 지났을까, 이온 음료 급수대가 눈에 보여서 기다렸다가 음료를 마시고 반환점을 돌던 찰나 파스존이 보여서 발목에 왕창 파스를 뿌려댔다. 자 이제 5키로만 힘내서 가보자! 하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몇 없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면서 뛰는데 이번에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전 올림픽 데이런에서도 구급차를 보곤 해서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뛰는데 소리가 끊이지가 않았다. 뭐지? 하면서 계속해서 달리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 거리면서 모여있는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쓰러져있고 그 옆을 같이 뛰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뛰면서 탈진한 사람은 처음 본 터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쉬면서 그 옆을 지나쳤다. 조금 더 뛰니 곳곳에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람, 옆을 지키는 사람 등등 6키로에서 7키로 사이 온열 질환 환자들이 발생해서 구급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가로등도 몇 없는 곳에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막판에 스퍼트를 내는 사람들, 포기하고 걷는 사람들을 지나쳐가면서 온몸에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피니시 라인이 나오는 거지 하면서 땀범벅인 얼굴을 닦아내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목표했던 시간을 한참 지나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냐는 말에 이제 2키로 남았다고 말하는 와중에도 옆에는 쓰러져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에 페이스대로 달리고 있는데 이제는 눈이 부셨다. 사진을 찍기 위해 플래시를 너무 정면으로 틀었는지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찡그리면서 달리니 피니시 라인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1시간 20분보다는 빨리 들어오고 싶어서 전속력으로 달렸다. 친구의 동영상에 내가 담기면서 썸머 나이트런 10KM 완주를 성공했다.
기록은 1시간 17분, 그래. 3분이라도 당긴 게 어디야.. 하면서 메달 존에 가서 메달과 간식, 그리고 생수 한 병을 원샷했다. 목표했던 것 둘 다 이루지 못해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날씨에, 그 코스에 완주한 게 어디냐 생각하면서 메달 각인을 하러 갔다. 메인 홀에는 예정돼있던 마술 공연이 한창이었다.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로 구급차가 정말 많이 보였다. 빠르게 각인을 끝마치고 포토존에서 사진을 찍을 거냐는 말에 그냥 빨리 가서 치맥이나 먹자고 했다. (맥주도 안 받았다.) 그렇게 아쉬운 썸머 나이트런을 지나쳐오는데 마술사인지, MC인지 내 귓가로 행사를 중간에 마무리하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구급차가 계속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알고 보니 온열환자가 너무 많이 발생해서 행사가 중단된 것이었다. 결국 이 마라톤은 뉴스에까지도 나왔다.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이 날씨에 왜 달리러 가냐는 사람 반, 안전관리가 하나도 안 되었다는 참가들 반.. 당연히 게시판은 난리가 났고 전국 마라톤 협회는 처음에는 참가자들에게 매니아 참가권을 1년 기간 동안 1번 참가할 수 있게끔 준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가 추후 거센 비판에 전액 환불 처리해 주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환불 처리하는 양식은 문자로도 발송되었다. 나 역시 발목을 접질렸기에 빠르게 환불 신청을 접수했지만 아쉽고 찜찜한 기분이었다. 즐겁게 뛰러 갔다가 이 모양이라니, 다행히 인대가 많이 손상은 안되어서 3~4번만 병원에 가니 지금은 괜찮아져서 다시 달리고 있다.
처음엔 분노로 후기를 올렸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은 아쉬운 기분이 많이 남는다. 다시는 여름에는 뛰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발목을 접질렸는데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했다는 내 말에 남자친구는 완주는 대단하지만 약속을 안 지켰으니 혼나야 한다 라는 말을 남기며 함께 병원에 가주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해서 뛰기로 다짐, 또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