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준아, 네가 생각하는 영웅은 누구야?
영웅? HERO 지.
어떤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를까?
어려운 사람 구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지.
맞아, 엄마가 사전을 찾아보니까 영웅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말한대. 그래서 보통 HERO라고 하는 영화 속 그런 사람들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거 같아. 그런데 준이에겐 누가 영웅이야?
내가 아는 사람 다 합쳐서?
응, 만나지 않았던 사람도 괜찮지. 네가 생각할 때 너의 영웅 말이야.
(사실 속으로 종이접기 작가님들을 이야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요즘 종이 접기에 푹 빠져있는 준이에게 언제나 대단해서 닮고 싶은 사람들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5초 정도 생각한 준이가 대답했다.
“음, 나에겐 엄마 아빠가 영웅이지. 나를 위해서 어려운 일을 다 해주니까, 엄청 대단하지.”
생각지도 못했는데 준이가 그렇게 대답해줘서 고맙고 미안하고 그랬다. 실수하고 부족한 점이 많은 엄마 아빠여도 늘 대단하다고 생각해 주는 준이와 다르게 준이의 장점보다 고칠 점을 찾아서 자꾸 핀잔주는 부족한 부모라서 말이다.
“엄마 아빠가 준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웅이 되어야겠다. 고마워.”
고마웠던 사람,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닮고 싶은 사람도 우리에겐 영웅이 될 수 있단다. 나에겐 누가 영웅이었을까?
어린 시절 나의 영웅은 선생님이셨다. 못하는 게 없어 보이는 선생님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 2학년 때 처음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꿨던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변함없이 나는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면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예쁘고 친절하고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시던 선생님들이 나에겐 늘 멋진 영웅이었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보니 나의 영웅은 가장 가까이에 계시던 우리 엄마였다. 엄마는 어쩜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평생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해주실 수 있었을까? 난 내 몸이 아프면 예민해진다. 그런 날, 준이가 나를 힘들게 하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버럭 괴물이 나와서 아이에게 모진 말을 쏟아붓게 되던데,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시다. 물론 힘들 때 가끔 잔소리와 함께 짜증을 내신 적도 더러 있었지만 아주 약한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화를 안 내시면 이상한 상황들이 많았는데도 말이다. 그때에 비하면 나는 더 많이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아이에겐 온화하고 따스하게만 대해 지질 않는다. 이유가 뭘까?
사람들 마음속에 누구나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있을까? 주목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대단하다는 칭찬을 받고 싶은 그런 마음 말이다. 살면서 자연스럽게 순간적인 영웅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래도록 영웅으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영웅도 실수하고, 슬프고, 좌절하고, 괴로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누군가에게 영웅이 되는 일은 어쩌면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도 모르겠다. 나 스스로가 나에게 영웅이 되면 어떨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몰라도 가족에게만큼은 영웅이 되면 좋겠다. 보통사람이 하기 힘든 그 어려운 일들은 엄마들은 한꺼번에 해낸다. 그런데 내가 해 놓고도 잘했다는 말, 고맙다는 말, 대단하다는 말이 듣고 싶어지는 날이면 어느새 마음이 서운함으로 가득 찬다. 나 이 정도 했으니 어때 대단하지 않아?라고 묻는 다면 진짜 영웅스러울까?
아침부터 나 혼자 전쟁통이다. 눈떠서부터 시작되는 집안 일로 얼마 안 되는 체력을 소진해 버린다. 밥을 올리고 빨래를 넣어 세탁기를 돌리고 매일 순식간에 쌓이는 먼지를 후루룩 청소기로 돌리다가 ‘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에 들어가 아이 옷을 꺼내 주고 나오면,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을 주우며 거실 정리를 한다. 다된 밥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하고 쓰레기 정리하고 나면 삐삐 다된 빨래 소리가 크게 들린다. 휴일도 없이 주말도 없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는 날이면 왜 나만 이 많은 일들을 다 해야 해? 나도 일 하는데 내가 무슨 가정부야?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남편과 준이에게 함께 나누어 하자는 말을 심통으로 바꿔 전했던 적이 많았다.
나 조금 힘든데 같이 할까? 물어보면 좋았을 것을 나만 하고 있잖아, 왜 안 도와주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하는 말들과 함께 한숨을 내쉬곤 했었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표정을 짓는 순간 남편과 아이는 이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같이 하자고 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내가 좋아서 해놓고 알아주지 않는다고 앓는 소리를 했다. 내가 영웅이 되고 싶다고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나를 이만큼 알아줘하고 말할 수 있는 간단한 공식 같은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다해 상대를 돕고, 어려운 일도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위해 기꺼이 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영웅이 되지는 않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빛나는 영웅이 되기는 어렵더라도 나 스스로를 챙기고, 내 남편, 내 아이를 챙기면서 가까운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나서서 돕고, 또 그로 인해 행복해하는 것, 그러면 적어도 진짜 내편에겐 아름다운 영웅으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명하고 돈 많고 든든한 엄마는 아니지만, 나에겐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내편, 나의 영웅 우리 엄마가 있다. 나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지만 준이가 어려울 때는 언제든지 달려와 구해줄 세상에 단 한 사람 진짜 준이 편, 아이의 영웅이 되고 싶다. 엄마가 더 잘할게. 행복하게 어린이날 보내줘서 고마워. 내싸랑 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