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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에 이골이 난 돌멩이의 잃어버린 일기장

019. 겨울 냄새잖아?

by 한량돌

#함께하면 더 좋을 플레이리스트

https://www.youtube.com/watch?v=2XADlc9dLfI

<상실의 시대…내가 사랑한 나의 미도리 | 가사 없는 playlist>




오늘 문득, 겨울 냄새가 났다.


메마른 상쾌함 같기도 하고

날 선 포근함 같기도 한 이 냄새.



내 생각엔 겨울 '향기'라는 말은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그에 반해 여름 '향기'는 20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의 제목이라 입에 더 잘 붙는 것 일지도.

(와.. 나도 아재야 아재..)


향기라는 단어의 느낌은? 음. 자연스레 긍정적인 심상이 떠오른다. (방귀 향기라는 건 없..)


그래, 그게 맞겠다.

여름엔 긍정적인 그 향기들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주체들이 신나게 춤을 추지만

겨울엔 그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잠들어 있으니 겨울 향기는 역시 어색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겨울 '냄새'가 싫은 건 아니다.

내게 겨울 냄새는 차분하고 고요하다. 진중하고 또렷하기도 하다.


그 점이 마음에 든다.



아무튼 그 냄새가 나면 이제 겨울이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학교 가서 얼른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던 그 시기에 주장했던 것처럼

꼭 눈이 와야만 겨울이 시작되는 건 아닌 거지.


저번주에 일기를 쓸 때만 해도 완연한 가을이라 느꼈는데

이 날씨 녀석.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네.


추위를 유난스레 타니 곧 목도리도 두르고 모자도 쓰고 다녀야지.

슬슬 롱패딩도 꺼내고 내복들도 한 번 빨아야겠다.



이제 작업장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이다.


첫겨울은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추운 줄도 모르고 겨울과 안녕했다.

(사실 별로 춥지도 않았던 것 같아. 올 초에는.)


그 이름 길이만큼이나 짧은 봄은 어쨌는지 저쨌는지 기억도 안 나고.

(일기를 써라 이 바보야! 소중한 내 순간들 아까워서 어떻게 해.)


그렇게 눈 감았다 뜨니 공포의 여름이 다가왔었다.

그간 사회에 나와서 했던 경험들이 대부분

더운 날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운 날 추운 곳에서 일했던 것들 뿐이라

'도자기? 네가 더우면 더워봤자지 뭐.' 하곤 덤덤하게 맞섰는데

와, 섭씨 1200도까지 올라가는 가마 옆에 있으니 주변 공기까지 삭 데워서 이건 뭐, 어느 순간 땡볕 아래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게 되더라.

점심을 짭조름하게 먹지 않은 한여름날에는 일하다 땀에 젖으면 머리가 빙빙 돌고 잠이 쏟아졌다.


에어컨이 없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내 특대형 공업용 에어컨 두 대를 돌리고 돌려도 그 바로 앞에 서 있지 않고는 시원함을 느낄 수가 없다.

일터 여건 상 먼지가 많이 나서 문을 닫아놓고 일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가을에도 여전히 반팔 차림으로 일을 하지만

일하다가 잠시 바깥에 나오면 코도 눈도 피부도 상쾌해졌다.

그 지긋하던 축축함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계절 탓에 가맛불 조절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 꽤나 많은 그릇이 땡깡을 부리며 탄생한다.

아버지 푸바오는 눈물을 흘린다. (파이팅.)


산과 들은 노랗고 빨갛게 옷을 갈아입고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 축제를 즐기는 듯하다.

그렇게 자연물에 인격을 비추는 나도 풍성한 마음으로 가을을 느낀다.



한껏 짧아진 가을이 지나고 이제 정말 겨울, 11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단다.

와. 진짜. 정말. 아니. 너무 빠르잖아 이건.

그래도 별로 아쉽진 않다. 어찌저찌 잘 살아가고 있으니까..



요즘은 한창 담금질을 당하는 중이다. 지난여름 흘렸던 땀과 까맣게 탔던 살을 식히기 위해서.

갑작스레 낮아진 기온에 입이 떡 벌어지기도 하고

무슨 동남아인 양 몰아치는 국지성 호우와 우박에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말이다. (오늘 날씨는 진짜 이상했어.)


바싹 건조한 겨울은 추위 외에도 나를 어렵게 하는 게 있다.

나는 사실 '피카츄'다. 나는 유난히 전기를 잘 느낀다.(라고 해야 하나..?)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전기를 너무나도 싫어했다. 해맑게 돌아다니다가도 정전기에게 습격을 받으면 기분이 우울해졌다.


내 밥벌이를 알아서 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정전기가 터질 것이다.'라는 느낌이 오면

먼저 그 쇠붙이에 다가가 주먹으로 그 녀석을 때렸다.

여지없이 정전기가 폭발하지만 그래도 몰래 뒤통수 맞은 느낌이 아니어서 나름 기분도 좋고(?) 잘 견뎌낼 수 있었다.

(대신 누군가가 그 꼴을 바라보면 무슨 문제 있냐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다.)


요즘 작업장에서 일할 때 싸구려 플리츠를 입는데 이 옷도 아주 친환경 발전소가 따로 없다.

벗을 때마다 번개맨이라 이걸 어쩌지 싶었는데, 간절히 바라면 방법이 떠오른다고 했나.

어린 시절에 봤던 교양 예능 '스펀지'가 생각났다.

거기서 분명 옷소매 끝에 클립을 달면 정전기가 생기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원리가 소매 끝에 붙은 금속체가 방전 경로를 만든다나, 전하를 빠르게 중립화를 시킨다나..


나는 얼른 사무실을 뒤져 클립을 찾아봤다. 하지만 역시 찾으면 없지.

퇴근하고 다이소 들러야겠다고 포기하려는데, 와! 이거면 되겠구나 싶은 게 있었다.


바로 날클립!


짱짱하게 소매에 붙어있어서 더욱 안정적이기도 하다. 계속 재활용도 가능하고. 빨래하기 전에 잘 확인해서 떼어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요 며칠 시험해 보니 효과는 엄청났다!

내 손은 더 이상 전도체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행복을 찾았다.

이젠 이 차갑고 건조한 겨울이 두렵지 않다. 그렇게 흠뻑 겨울을 즐겨야지.




일기 예보를 보니 곧 한파가 찾아온다고 한다.

베란다 창문에 뽁뽁이를 붙이고 세탁기가 동파되지 않게 고인 물도 미리 빼놓아야겠다.

체력 관리도 신경 써서 감기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


아우 자자! 고생 많았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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