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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에게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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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량돌

안녕 도이야!

이 시간에 웬 편지인가 놀랐지?

네게 쓰는 편지 원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사이' - 밤 12시 언저리에 도착하던 술 냄새나는 편지인데 말이야.

사실 이번에 네게 줄 예정이었던 편지를 잘 쓰다가.. 오늘 찢어버렸어.

간만에 기분 좋은 소식이 만발했는데,,


'참 오랜만에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면서 느리게, 느리게 산책을 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보채지도 않는다.'

'별 볼일 없던 낡은 간판과 시기를 달리해 피고 지는 꽃들. 길을 걸으며 보이는 것들이 새삼스럽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돌아오던 길에 막걸리를 한 통 사서 마시면서 걸어왔다. 습한 공기를 걷다가 술기운이 올라 몸이 다 젖었다'

'이제는 이 소중한 순간을 누리며 살 거다. 가능한 자주, 또 많이.'


뭐 그런 기분 좋은 감상에 젖은 편지였어.

오늘 아침,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주말이라 펜션에 일이 많았지.

먼저 외부 청소라도 하고 있어야겠다 싶어 한 시간 정도 일찍 도착했어.

펜션 들어가면서 어머님에게 인사를 하고 청소 도구를 챙기러 관리동으로 들어갔지.

그러는 중에 오늘 내려온 현장 운영 계획을 보니까 내 업무가 뭔 말이 안 되게 짜인 거야.

내가 짤 때 아무리 주말이어도 이렇게까지 과하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내 후임으로 내 역할을 맡고 있는 담당자에게 말했어.


'이렇게는 못한다. 한 사람이 하기에 너무 과중하고 시간 내에 할 수도 없다.'

'같이 나눠서 하려고 하는 거 맞냐. 이렇게 하면 내가 전에 지배인으로 있을 때 하던 거랑 뭐가 다르냐. 상주만 안 하는 거지.'

'원래 아침 청소도 당신 혼자 하는 거 부담될까 봐 도와주러 왔는데,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또 나 혼자 하고 있지 않냐.'


라고 하니까 그 양반이 '그럼 내비둬요~ 자연스럽게 내가 하겠지.'이러는 거야.



?????



이제는 진짜 안 되겠더라고.

'죄송하지만 일 더 못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득한 머리를 붙들고 펜션을 나왔어.

상황이 이렇게까지 어그러져 버린 데에는 나와 동료들 간의 소통 문제가 분명 있었을 거야.

작은 오해가 파국으로 이어지게 된 걸 수도 있지.


하여간 마무리를 이따위로 맺어야 하는 게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나는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

진짜, 진짜 끝이야.



이른 마지막 퇴근을 하는 길 위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

예전에 했던 일들을 그만둘 때, 씁쓸하고 후련했던 그때의 순간들도 떠오르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따가운 문장들이 기분 나쁘게 뒤통수를 때리더라.

'요즘 것들은 책임감이 없어서 조금만 힘들면....'

'왜 자꾸 쉬려고 해 젊은데? 쉬지 마~....'

'자꾸 그렇게 그만둬서 어떻게 먹고살려고 그래. 할 건 있고?....'


그러다가 자기를 봐서라도 한 번만 더 생각해 달라는 대표님과의 전화와

누가 그렇게 힘들게 하냐고, 자기가 혼내주겠다는 어머님과의 전화가 이어졌어.

후.... 다 듣기 싫어.


얼얼한 정신에 바로 집으로 들어오긴 싫어서.. 근처 강가에서 한참을 앉아있었어.


벤치에 앉아 업무랑 연관된 카톡방, 메시지, 각종 로그인 정보.. 그런 것들을 다 지웠어.

번지 점프대에 우물쭈물 한참을 올라가 있다가 드디어 뛰어내리는 기분이랄까. 정신이 멍하지만 좋더라고.


앞으로 절대 핸드폰에 매달려있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업무폰? 징그러워. 다 부숴버려야 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예정보다 빨리 백수가 되어버렸네.

일단 도자기 관뒀을 때처럼 일일 알바를 해야겠지. 나는 굶어 죽지 않아. 겁 안 나.

그동안 못 봤던 사람들도 좀 만나려고. 다다음주에 계획된 여행은 그대로 진행하고.


흐음...



나, 자꾸 글쓰기에 집중 못 하고 아까운 시간을 흘리는 이유가 뭔지 알 것 같아.

첫 번째는 내가 발 디디고 있는 땅이 자꾸 불안정하게 흔들리니까 그런 거였어.

이루기 어려운 꿈은 항상 바깥으로 두고선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까 돈을 벌긴 버는데

또 얼마를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일터에서 힘을 다 빼버리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어.

이런 상태로는 어디서 뭘 하더라도 똑같을 거야.


내가 서있는 바닥을 잘 다질 수 있게 생활력을 먼저 키워야겠어.

먼저 안정적으로 돈을 모을 수 있는 곳에서 내 시간을 투자할 거야.

그래야만 작가적인 생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어.

글쓰기를 루틴 하게 가져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틈틈이 어느 지역에서 살아가면 좋을지 탐색도 하고.

쉬는 날엔 내가 좋아하는 활동들도 즐기고. 난 그래야만 해.


두 번째로, 난 목표를 제대로 세우 지를 못했어!

'목표는 가능한 크게 잡아라.'라는 말만 맹신하고 뜬구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왔어.

그 달콤한 꿈은 너무나 아득한 거라 그 꿈을 향해 손만 저을 뿐이지.. 도리어 목표 쪽으로는 한 발짝 떼기가 힘들었던 거야.

일기나 편지 하나 쓰는 데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도대체 왜 장편부터 욕심을 내는 건지!

너의 이야기는 굉장히 호흡이 길어. 그래서 단편 이야기를 우선적으로 쓸 거야.

(물론 너의 이야기도 간간히 써 갈 거야. 오해는 마렴.)

그래서 결정한 건 '연돌문학단편선' 브런치 북을 만들어야겠다는 것이다!


미생, 이끼, 내부자들 등을 만들어낸 윤태호 작가는 작법 공부를 이렇게 했데.

1. 이야기를 하나 쓴다.

2. 그 이야기의 장르를 바꿔가며 다시 써본다.

3. 반드시 세상에게 보여주고 피드백을 받는다.


연돌문학단편선이 그런 역할을 해줄 거야.

많이 보고... 많이 써야지.



무슨 편지가 매번 다짐으로 끝을 맺네. 하하....

나라는 사람 참.. 자꾸 바람이 이리 불었다.. 저리 불었다.. 하지?

도이 네가 있어서 참 다행이야. 네가 없었다면 내가 어디서 이런 얘기를 하겠어.



끝까지 읽어줘서 고마워.

조만간 또 편지할게! 잘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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