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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25. 2021

[12일] ASMR을 듣다

소리가 만드는 저마다의 풍경들

  ASMR.  그간 먹방과 함께 이해가 잘 안 되는 콘텐츠였다. 큰 그릇에 담긴 많은 양의 음식을 한꺼번에 입 안으로 밀어 넣을 때처럼, 민감도가 높은 ASMR 마이크에 치킨을 베어 물거나 오도독 소리가 나는 과자를 먹는 소리를 듣고 있을 때면 오히려 약간의 불편함이 들었다. 지나치게 속삭이는 소리로 말을 거는 ASMR콘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소리가 아닌 소음처럼 들리곤 했다. 오늘 내게 맞는 ASMR콘텐츠를 제대로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카페 같은 곳을 자주 갈 수 없는 요즘, 책을 읽거나 집중을 할 때면, 음악을 틀어둔다. 매번 지브리 스튜디오의 음악을 듣는 것도 약간 익숙해졌고, ‘~할 때 듣는 음악’ 목록은 생각보다 마음에 맞는 선곡 목록이 없었다. 그러다 한 시간 가량 백색소음 같은 ASMR을 틀어주는 유튜브 콘텐츠들을 알게 됐다. 빗물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나 모닥불이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 정도로 생각했었는데, 단순히 소리를 넘어 어떤 시간과 장소의 분위기를 그대로 가져오는 ASMR이 생각보다 많았다.     

기내 안에서 나는 소리
호주 빅토리아 도서관에서 공부하기
비 오는 밤 파리의 재즈카페
여름 시골 툇마루의 밤소리


  듣는 것만으로도 시공간을 그대로 그려볼 수 있는 소리들이다. '비 오는 밤 파리의 한 카페의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작게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고, 그릇을 살짝 부딪히는 소리들이 오가고, 작은 기침소리가 들린다. 가랑비가 떨어지는 소리와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이 조화롭게 섞여 들어온다. 여행 프로그램을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여행 프로그램은 곳곳을 보여주는 영상에 눈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소리는 다르다.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여러 다른 소리들에 다르게 집중하며 곳곳을 자유롭게 걸어 다니는 느낌이 든다. ASMR을 듣고 있다 보니 해외의 소도시에 도착한 첫날 밤,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카페의 작은 소란들을 지켜보면서 차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소리들을 모아 아예 가상공간을 재구성하는 ASMR도 많았다. 호그와트 그레이트홀에서 자습하기, 인어공주 바닷속 소리들, 짱구네 집에서 낮잠 자기처럼 영화나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가상의 공간들을 소리로 구현한다. 영화 속 장면들을 생생한 사운드로 녹여놓은 덕에 그 안에 잠시 다녀오는 듯한 생각이 들게 한다. 마치 VR을 보면서 가상현실을 더듬거리듯, 소리를 들으며 짱구네 집에서 낮잠도 잘 수 있다니. 소리의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asmr soupe 의 유튜브

  소리에도 온도가, 향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잠이 오지 않을 때 빗소리나 풀벌레 소리, 모닥불 소리를 한동안 켜 두고 잠이 들었던 적이 있다. 풀벌레 소리를 듣다 보면 부모님과 창문을 열어두고 이야기를 나누며 보냈던 여름밤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기억에 남지 않지만, 어떤 따뜻한 온도로 기억되는 소리들이었다.


  귀를 통해 들어간 소리들은 내 안에 빈 공간을 만들어준다. 그 고요한 공간에서 비 오는 날 누워서 책을 읽던 날이 떠오르기도 하고, 축축하게 젖은 비 냄새를 느끼기도 해 본다. 색색의 화려한 영상에 때로 눈이 지칠 때면 귀로 감각을 더 깨우는 게 좋을 때도 있다.


   생각해보면 실생활은 갈수록 무소음을 향해가지만, 소음을 걷어낸 자리에는 점점 실제와 비슷한 백색소음들이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실제보다 실제 같은 소리들을 한동안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마음껏 내키는 대로 갈 수 없을 때 소리들이 공간을 넓게 느끼게 해 준다니. 머무르고 있지만 멀리 떠나 있는 것 같다. 거리두기로 혼자 있는 시간들이 많아진 사람들이, 주변에서 나는 작은 백색 소음을 귀로 들으며 저마다의  안식처들을 찾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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