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까지 버스 여행
“기사님, 버스 좀 따라가 주세요!”
평일 출근길. 난데없이 버스 추격전이 벌어졌다. 조용하던 출근길에 이게 웬일인가. 핸드폰에 정신 팔린 사이 물건을 버스에 두고 내렸다. 버스는 무심히 떠났다. 점심 도시락을 두고 내린 적도 있고, 우산을 잃어버린 적도 여러 차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점심때 회사 행사에 쓸 물건을 두고 내린 거다. 두 손이 너무 가볍더라니. 아차 싶었다.
일단 택시를 잡아탔다. 아침부터 버스 추격전이 시작됐다. 두 정거장 멀어진 버스와의 간격은 좁아질 줄 몰랐다. 하필 버스가 2차선의 동네 길로 접어들었다. 택시 기사님은 이런 길에서는 추월도 못한다며 이러다간 계속 버스 꽁무니만 쫓아가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되면 택시를 타고 버스를 종점까지 쫓아가는 모양새가 될 것만 같았다.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버스 어플로, 버스 번호와 위치를 알려드리니 바로 버스 기사님과 통화해서 물건이 그대로 있다고 알려주셨다. 그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어차피 계속 택시를 타고 따라가면 택시비도 왕창 들 테고, 종점까지 30분 정도면 간다고 하니 중간에 내렸다. 다음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기로 한다. 회사에는 사정을 말해두고 버스를 탔다. 급했던 마음이 안도로 바뀌는 건 일순간이다.
평일 아침에 의도치 않게 종점까지 버스여행이다.
‘종점’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가. 딴짓하다가 급히 내릴 걱정도 없다. 창가 자리에 앉아 중간에 내릴 필요 없는 드라이브를 떠난다. 버스 안으로 시선을 옮겨본다. 책을 읽는 사람 하나, 핸드폰을 보는 사람 셋. 나 포함하면 총 다섯 명이다.
버스가 한산하다. 농수산물 시장이 정류장인 곳에서 한 승객은 고구마 두 박스를 부지런히 들고 버스에 오른다. 할머니와 손녀가 버스를 같이 탄다. 손녀는 높은 의자에 앉고 싶어서 맨 앞자리에 앉고, 할머니는 뒷자리에서 손녀를 계속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시선이다.
버스는 몇 년 전에 살았던 집 앞 동네도 지나간다. 몇 개의 간판들이 달라졌고, 여전히 그대로인 가게들도 반갑게 보인다. 주말 아침에 맥모닝을 먹으러 자주 갔던 맥도널드는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그렇게 몇 정류장을 지나는 동안,
어느새 기사님과 나만 남았다.
그리고 드디어 종점이다.
처음 와보는 종점에는 여러 번호의 버스들이 줄지어 있었다. 쉼 없이 버스가 들어오고 또 나왔다. 물건을 안전하게 넘겨받았다. 이 물건 때문에 아침에 1200원짜리 시내투어를 했다. 나는 다시 마지막 승객이자 첫승객이 되었다.
종점은 도착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출발하는 장소다. 운행을 마치고 돌아온 버스에서 내가 내리자마자 직원들이 버스를 소독하고 재정비를 한 후 승객을 다시 맞을 준비를 분주히 한다. 끝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마주하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인생의 마디마디에서 끝이라고 생각했던 지점들은 동시에 시작이었다. 졸업이라는 피니시 라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또 다른 출발선에 서기도 했고, 결혼하면 ‘끝’이 아니라 겪고 보니 더 큰 세계의 시작임을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종점을 함부로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종점보다는 인생의 마디들을 연결하는 정류장과 같은 연결지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덜컹거리는 버스가 힘들면 잠시 내고, 그러다 다시 다음 버스를 오르면 될 일이다. 그러다 보면 소중한 무언가를 찾아서 오는 시간이 있지 않을까. 그게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