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원래 알고 있던 친구나 새로 사귄 이들을 알아가는 자리 모두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그럼에도 다 큰 어른의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명료해서, 가끔은 서운할 때가 있다. 한 번은 업무협약으로 미팅 자리에 갔다. 20명의 사람들이 양쪽으로 10명씩 나누어, ‘안녕하세요’를 빠르게 반복하며, 명함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나란 존재가 당장 휘발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친구 사진이 오랜만에 업로드되었고, 피드를 넘기다 반가움에 전화를 했다. 그의 첫마디는 간결했다. “너 결혼하냐.”
데이비드 버커스는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네트워킹’은 사적인 이득을 위해 인간관계를 이용하는 불순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심지어 한 연구에서는 네트워킹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덕적으로 더럽혀지고 ‘불결해졌다는 느낌'을 발견했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친밀함을 등급 매겨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땐, 고향 친구가 진정한 친구였었고, 취업했을 땐 대학 친구들이 그리웠다. 하지만 ‘인맥’을 친밀함의 잣대로 나누다 보면 문제가 생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는 것이다. 직장동료들과는 ‘공과 사’ 따위를 운운하며 마음은 닫혀있지만, 행동은 열려있다. 먹기 싫은 술이라지만, 술자리엔 잘 참여하고, 화가 남에 부들거리더라도, 얼굴은 어색하게 웃고 있다. 반대로 친구들의 경우 마음은 열려있지만 행동은 닫혀있다. 편하다는 이유로 선을 넘는 경우와, 친하기에 막대하는 경우다.
친구라는 말은 따뜻해야만 하고, 인맥이란 말은 차가워야 할까.『친구의 친구』(데이비드 버커스 지음, 장진원 옮김, 한국경제신문, 2019)는 나의 인맥에 대한 편향된 생각을 깨준 책이다. “당신이 가진 커넥션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어떻게 알게 됐으며, 어디서 만났고, 또 그들이 다시 누구를 아는가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이 모든 요소가 당신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를 설명해준다. 즉, 당신의 모든 ‘친구의 친구’ 말이다.” (p.23)
저자가 말하는 ‘클러스터’라는 개념을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사교 모임’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미 ‘살롱’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에서는 19세기부터 내려오고 있고, 어니스트 허밍웨이도 클러스터에서 글쓰기 능력을 키웠다. 비슷한 맥락에서 내가 참여하는 사교모임을 소개하고 싶다. 아산 독서모임 <남녀노書>이다. 이 서평은 『친구의 친구』와 <남녀노서>의 콜라보(#collaboration)다.
The old man and the sea
많은 이들이 독서모임을 하면서,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보아왔다. ‘이것은 사교모임 인가, 독서모임 인가.’ 저자도 이런 딜레마를 생각했는지, 클러스터를 시작함에 있어 방법론을 말한다. 다음은 비결 중에 일부를 잠시 빌려왔다. “커뮤니케이션할 내용에 체계를 갖추어라. 이는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은 아니지만, 참가자들이 시간낭비라고 느끼지 않도록 만날 때마다 지켜야 할 절차와 기준을 정하는 것이 좋다.” (p.142)
‘절차와 기준’은 형식이다. 형식은 뭔가 딱딱하며, 노잼이고, 벽을 치는 것 같다. 반면에 ‘자유’라는 말은 무언가의 진입장벽을 낮추며, 부담을 덜어준다. 그래서 모임에 대한 홍보글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책에 대한) 관심만 있다면, 누구나 오셔서 자유롭게 끌리는 대로 말하고 놀아요!"
하지만 남녀노서의 지속 가능함은 형식에 있다. 모임이 1년 반 동안 이루어진 것을 보면 우리 모임은 적어도 시간낭비는 아닌 것이다. 물론 토론 시간에 앞서 ice breaking을 통해 사적인 얘기를 하지만, 항상 논제가 준비되어 있다. 논제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얘기 거리”라고 생각하면 된다. 책의 한 부분을 끌어와 발췌문으로 사용하고, 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여러분은 “개츠비의 사랑방식”을 어떻게 보셨나요?’ 이것이 자유 논제이다. 생각은 자유지만 말하는 사람은 책과 무관한 얘기로 빠지지 않는다. 서로의 대화를 책임지지 않는 이들은 삼천포로 빠져, 내 얘기만 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나는 자유논제를 “책임 있는 자유”라 부르고 싶다.
우리는 같은 세상 속 다른 삶을 산다. 성별, 직업, 나이, 자라온 환경에 의해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논제의 프레임을 조금만 좁힌다면, 2가지 입장으로 엇갈린다. 찬성과 반대. 그래서 선택 논제의 다른 말은 찬반 논제이다. 선택 논제는 ‘여러분은 개츠비의 사랑 방식에 공감하시나요?’라고 묻는다. 이때부터 부담이 생긴다. ‘난 찬성인데 반대가 더 많을 땐 어쩌지, 난 말빨이 약한데, 그렇다고 설득당하고 싶지도 않은데.’
그래서 우리는 선택 논제를 두고 미리 합의한다.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아주 약간만 이쪽이 와 닿는다. 즉, 100:0이 아니라 49:51이다. 선택 논제의 언어는 보다 더 순화된다. 어느 쪽이 ‘맞는지’ 보다 ‘공감하는지’라고 묻고, ‘동의하지 않는다’ 보다도 ‘동의하기 어렵다’라고 답한다.
끝으로 남녀노서에는 회장이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작은 동아리 모임에 불과하지만, 회장이라는 직책을 부여했을 때 생기는 '감투욕'을 애초에 막아 놓았다. 우리는 '총무제'로 운영되며, 총무는 회원들이 제출한 논제를 취합해서 단체 카톡 방에 올리는 일꾼이다. 필요에 따라 총무는 바뀌기도 한다.
어느 교수가 수컷들의 서열정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한국 남자는 첫 만남에서 (주제와는 상관없는) 나이를 꼭 물어본다. 만약 운이 좋아(?) 무언가 겹치면 서열은 더 손쉽게 정리된다. (#해병대 #고대 동문회#호남 향후회) 그렇기 때문에 퇴직 이후에는 여성에 비해 더 쉽게 우울해진다고 한다. 퇴직한 후, ‘직위로서 자아’가 사라지면, 서열을 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직 이후, 경로당으로 가기엔 그들은 너무 어리다. 남녀노서는 이름 그대로 다양한 연령이 분포해 있고, 우리는 책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를 친구라 여긴다.
모임에 참여하고 싶은 뉴비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나만 빼놓고, 서로 다 알고 지내는 모임에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독서토론’이라는 거창함이 부담스럽다. 특히 모르는 사람 앞에서 있어 보이고 싶은 본능은 날 더 작아지게 만든다. ‘난 아무 생각이 없는데, 느낀 점을 말해야 한다고? 내 무식이 드러날 텐데. 그냥 좋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그랬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건대,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나 혼자 만의 창피한 착각이었다.
네트워크는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유기체라고 한다. 순수함과 진득함을 논하며 의리와 우정을 동경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목적만 가지고 움직이는 세상은 너무 차갑다. 우리는 함께 읽는 유기체가 된다. 내가 만나는 최근 5명의 사람이 나를 말해준다고 했다. 5명 중에 1명이 책 읽는 사람이라면, 꽤 낭만적이지 않은가. 모임은 2주에 한번 둘째 주 넷째 주 목요일 19시이며, 장소는 아산 시립도서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