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 다시 시작되는 현실과 새로운다짐

승인의 기쁨도 잠시, 이제는 진짜 시작이었다.

by 이숨

나는 이상하게도 터널을 지나는 걸 좋아했다.
어둡고 긴 그 길을 지나면 언제나 환한 빛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잡고 터널을 지날 때마다, 내 인생도 언젠가는 저 빛을 만나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한동안은 정말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숨을 쉬어도 공기가 답답했고, 고개를 들어도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랐다.
멀리서 아주 작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신용회복과 새출발기금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었다는 연락을 받던 날,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이제 매달 정해진 날에만 갚으면 됩니다.”
그 말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아직도 남은 빚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알게 되었다.

한 장 한 장 서류를 정리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그동안 나는 매일 현실에서 도망치듯 살았다.
독촉 전화가 울릴까봐, 카드 결제일이 다가올까봐,
늘 불안에 떨며 하루를 버텼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이고, 내가 책임질 삶이니까.

모든 것이 정리된 후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예전보다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피곤하지만, 이상하게 평온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끝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내가 나를 이끌어야 해.’
그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여전히 터널 속에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터널은 끝이 있는 길이라는 걸.
조금만 더 가면,
분명 그 끝에서 따뜻한 햇살을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모든 승인 절차가 끝나고, 갚아야 할 금액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결코 가벼운 금액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숫자들이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빚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대던 지난 시간과 달리
이제는 매달 일정하게 갚아나가면 된다는,
‘길이 보인다’는 사실이 오히려 안도감이 되었다.

한때는 이 모든 게 나 혼자만의 싸움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세상엔 나처럼 터널 속을 걷는 이들이 많다는 걸.
그 생각만으로도 외로움이 조금은 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서류상으로는 아직 부부이지만,
마음의 거리만큼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지만,
이제는 담담히 인정할 수 있다.

이제 내 삶은 오롯이 ‘나’의 책임이다.
무너져도 다시 세워야 하는 사람도,
지치면 일으켜야 하는 사람도 결국 나 자신뿐이다.
그 생각이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운전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잔잔한 음악이 유난히 따뜻하게 들렸다.
햇살이 창문을 스치며 손등을 감싸 안았다.
그 온기가 마치 내 어깨를 토닥이는 듯했다.
“괜찮아. 이제부터는 너의 길이야.”
그날,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긴 터널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그 끝을 향해 묵묵히 운전 중이다.
빛이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이미 마음속에는 작은 등불이 켜져 있으니까.

keyword
이전 12화11.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의 초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