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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첫납입날 진짜 시작되었다.

계좌이체 버튼 하나에 담긴 수많은 밤의 무게

by 이숨

모든 계좌가 하나로 합쳐진 첫날이었다. 그 숫자를 처음 마주했을 때 숨이 막혔다. 액수는 생각보다 컸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말없이 화면만 들여다보았다. “아… 진짜 이제부터 제대로 갚아나가야 하네.” 헛웃음이 새어나오고 두 손이 떨렸다. 그래도 이내 나는 화면을 바라보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이체 버튼을 눌렀다. 그 작은 클릭 하나에 지난 몇 년의 밤들이 환하게 스쳐 지나갔다. 월급날 입금과 동시에 빠져나갈 큰 금액을 떠올리니 ‘월급통장은 스쳐 지나간다’는 말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한 계좌가 정리되었으니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지만, 현실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그 숫자는 나를 압박하는 무게였지만, 동시에 내가 걸어야 할 길이기도 했다. 이제부터는 매달 정해진 날에 한 걸음씩 갚아나가야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담담하지 않았다. 밤새 뒤척이며 세워둔 계획표를 다시 보며,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다. 따뜻한 외식은 못 해도 집에서 밥을 차려 먹이고, 새 옷 대신 깨끗이 빨아 입힌 옷을 건네는 것으로 사랑을 대신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도시락을 챙기고, 막내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20분 거리의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늘 시간이 모자랐다. 일터에서는 손이 멈출 틈이 없었고, 머릿속엔 아이들 일정과 내야 할 돈들이 뒤엉켜 떠다녔다. 그럼에도 아이들 품에 돌아가면, 그 작은 손들이 내게 힘을 주었다. ‘엄마가 있어줘야 한다’ 그 한마디 마음으로 또 하루를 버텼다.

거울 속의 나는 지쳐 있었다. 피부는 자주 뒤집어지고, 어깨는 뭉쳤다. 밤이면 하루의 무게가 온몸으로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너는 잘하고 있어. 지금 이 순간도 충분히 의미 있어.” 그 말이 나를 완전히 낫게 하진 못했지만, 하루를 이어가는 작은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나는 엄마로서,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하기로 했다. 아침마다 아이들과 함께 체조를 하고, 저녁에는 오늘 있었던 일을 찬찬히 들어주었다. 아이들의 사소한 농담에 웃고, 가끔은 마당에 나가 5분 숨을 고르기도 했다. 동생네 집에 올라가 수다를 떨며 잠시 쉬는 그 시간마저 내겐 소중한 회복의 틈이었다.

첫 납입일. 모든 빚이 신용회복으로 정리되었다는 사실은 내게 또 다른 책임을 안겨주었다. 두려움도 컸지만, 이제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차근차근 갚아나가면 되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내가 지켜야 할 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나를 잘 돌보아야 아이들도 온전하게 돌볼 수 있다는, 너무도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깨달았다.

이제는 급한 마음을 조금 접고, 속도를 조절하려 한다. 아주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게. 하루 30분이라도 아이들과 동네를 걸으며 숨을 고르고, 몸과 마음을 돌보는 시간을 만들 것이다. 그 시간을 나에게 주는 것이 결국 가족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임을 알기 때문이다.

밤이 깊어가고, 아이들이 잠든 집 안은 고요했다. 이불 속에서 오늘의 이체 내역을 떠올리며 나는 작은 미소를 지었다. ‘오늘 나는 시작했다.’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지치고 힘든 날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오늘의 이 결심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설 것이다. 언젠가 이 길 끝에서, 웃으며 커피 한 잔 나눌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나는 또 한 걸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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