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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양 Sep 14. 2020

새로 쓰는 관계와 소통, 그리고 노인이야기

[경사:만신 프로젝트 010]

경사:만신 프로젝트 010

시간은 상대적이다.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가 홀연히 사라져 가는.

멍하니 앉아 창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3주 만에 성북에 들렀다.

가게들은 모든 문이 활짝 열려있거나 굳게 닫혀있고 사람들은 이제는 일상이 된 마스크를 쓰고 스쳐 지나간다. 길가의 흡연하는 아저씨 두 분을 제외하면 사람들의 표정을 알기가 어렵다.

오후 2시, 오래간만에 맑은 하늘을 맞이한 의릉 앞 공원에서 할머니 두 분을 만나고 산책을 했다.

두 분 모두 집이 근방이셔서 아침 일찍에도 한 바퀴 돌으셨다고, 6월 이후 처음으로 공원에 들린 나를 데리고 차분히 안내를 해주셨다. 내리쬐는 햇빛과 대조적으로 그늘이 잘 조성돼있어 청량한 공기와 나부끼는 바람을 느끼며 우리 셋은 벤치를 찾았다.

벤치마다 2m 거리 유지 안내가 붙어있다.

하긴, 지하철 탈 때도 마스크 착용하세요라는 안내문구가 나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셋이 나란히 앉을자리는 없어 나는 신문과 비닐을 깔고 바닥에 앉았다. 혹시 몰라 필요할 거 같아 챙겨 오셨다는 할머님께 (바닥이 전날 비가 와서 습질 거라며)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두 분 할머님 모두 스마트폰도 익숙하시고 자주 다니시는 편이라 그동안 메시지나 사진상의 소통이 크게 불편하진 않으셨다고 한다. 코로나로 인한 유튜브 실시간 예배 보기, 단톡 방도 4~5명 정도는 이야기하기 괜찮으셨다는 말씀과 함께.

우리가 마스크를 벗고 다닐 수 있게 된다면 어떤 걸 하고 싶으세요? 란 나의 질문에 할머님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다니셨던 여행 얘기들을 들려주셨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작년 신자분들끼리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셨다는 이야기였다. 여행의 목적은 제각각이겠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신 율리아(세례명) 할머니께는 특별한 순간이셨을 것이다. 뜨개질 할머니(이 할머니께서는 손으로 다양한 걸 만드시는 걸 즐겨하신다)께서는 베트남에 들리셨을 때를 떠올리시면서 자전거가 즐비하던 거리를 추억하셨다. 나는 올해 두어 차례 여행을 갔었는데, 바다내음과 물결치는 파도가 보고 싶을 때 예고 없이 떠난 이야기를 했다. 서울과는 다르게 낮은 건물들과 푸른 녹음 속 느긋하게 흘러가는 자연의 공기를 계속 만끽하고 싶었다.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한 달쯤 지내고 오고 싶었을 정도로.

거리두기로 인한 이동의 제약이 생기니, 어디라도 나가고 싶은 욕구들이 잠들어있다. 나는 언젠가 또 보러 갈 바다를 화폭에 담았고, 두 분에게 무지 노트를 선물로 드렸다.


“할머님이 떠오르시는 생각, 오늘 같은 여행 이야기, 일기든 그림이든 괜찮아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여기에 뭐든 적고 그려보세요.”


다음 주부터는 소그룹으로 워크숍 재개 예정에 대한 안내를 끝으로, 그날 우리 셋은 사이좋게 모기에 쏘이며 느긋한 산책을 마무리했다.

볕이 잦아들면서 유모차를 끈 가족들과 풀밭에 앉은 부부들도 보였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몰려있지 않으니 그만큼 주변의 풍경이 맑고 풀벌레 소리가 귀에 익어간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 지금은 서로 만나기 어렵지만 그때까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모아 두자. 지금은,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넘어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쏟아낼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 美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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