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행 되세요~” 할 걸

파리의 안나 40

by Anna

빗소리에 눈을 떴다. 정말 비가 매몰차게 내렸다. 오늘도 흐린 날이구나 싶어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고 미적거리는데, ‘똑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네” 하니 언니였다. “뚜왈렛 왔는데” “네~” 하고 나갔더니 벌써 물은 할아버지가 떠두신 뒤였다. 8시에 임무수행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잠이 덜 깬 상태로 할머니의 몸을 잡고 어시스트를 했다.


아침을 먹고 잠이 덜 깨서 침대에 누워 이른 낮잠을 시도했지만 창문 사이로 갑자기 비치는 햇빛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래도 비가 그쳐서 다행이다. 점심을 먹고 나가려고 머리를 감았다. 화장도 하고, 어디 갈까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여행 책도 꺼냈다. 웬만한 파리 시내는 다 돌아다녀 봤지만 그래도 새로운 곳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을 때가 되니 다시 비가 쏟아졌다. 망했군.


점심 식사 전 할머니께 가 보았는데 잔뜩 인상을 쓰고 계셨다. 어디 아프냐고 여쭤보니 왼쪽 다리가 쑤신다고 하셨다.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몰라 주물러 드렸더니 조금 낫다고 하셔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안마를 해드렸다. 팔목이 아팠지만, 할머니가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 치매 끼가 있으셔서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하고 엉뚱한 이야기도 하셨지만 그런 모습도 귀엽다. 나도 친할머니 이야기와 가족 이야기를 해드리고, 어제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식사 후 비가 다시 그쳤지만 하늘이 여전히 흐리기에 먼 외출은 포기하고, 라데팡스 쇼핑몰이나 가서 구경하기로 했다. 콩코드에 내려서 1호선으로 환승하고 라데팡스 역에 내렸다. 오랜만에 들어가는 레 꺄트르 떵. 그런데 세일도 끝나고 한산해서 오히려 재미가 없었다. 필론에서 귀엽지만 쓸모없는 생활용품을 구경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졌지만 비옷을 입고 있어서 개의치 않았다. 라데팡스 다음 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마레지구로 갔다. 그런데 비가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이 내리고 있었다.


그냥 돌아가기엔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 프리피스타 1호점에 들어갔다. 그런데 오늘 입고 나간 비옷이 문제였다. 비옷 주제에 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축축해진 옷을 대충 털고, 열심히 옷을 구경했다. 가방 코너로 가니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 가방을 매어보고 엄청 고민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나도 가방을 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저기.. 한국인이시죠?” 그렇다고 하니 본인이 고른 가방이 어떤 것 같냐고 했다.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10유로라기에 어차피 내가 살 것도 아니고, 괜찮다고 말해줬다. 구매 후 나에게 여행을 온 거냐고 물어서 몽파르나스 타워 근처에 산다니까 부럽다며 미술 공부를 하냐고 했다. 워킹 비자로 1년 동안 살 예정이라고 하니 본인도 캐나다에 워킹을 다녀왔단다. 짧은 대화를 끝내고 그녀는 “즐거운 쇼핑 하세요~” 하고 나갔다. 나도 “즐거운 여행 되세요~” 할 걸.

1유로 더미에서 예전에 봤던 귀여운 모자를 다시 발견했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구매하진 않았다.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다시 생 폴 역으로 갔다. 파스퇴흐에 내리니 다시 한 두 방울 떨어지는 수준이기에 집에 들어가기 전 프랑프리로 향했다. 초코가 묻어 있는 과자를 사 먹고 싶었지만, 나 혼자 먹는 건 예의도 아닌 것 같고, 살도 찔 것 같아 포기한 뒤 하리보 젤리를 골랐다. 한국에선 구하기 힘들었던 ‘하리보 판타지아’ 이곳에선 300그람에 1.71유로다. 고심하여 고른 뒤 집에 들어왔다. 5시쯤 오후 임무수행을 끝내고 젤리를 먹으면서 쉬었다. 비 오는 날의 외출은 잠깐이라도 무지 피곤하다. 저녁을 먹고 또 뒹굴 거리다가 사진을 정리하고, 9시 30분쯤 저녁 임무수행도 끝마친 뒤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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