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한가운데

파리의 안나 47

by Anna

어제 분명 11시가 되기 전에 잠든 것 같은데 눈을 뜨니 개운함 보다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핸드폰이 꺼져있어 시간을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곧이어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8시는 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속으로 ‘제발 뚜왈렛만 아니어라’ 싶었는데 내 방으로 다가오는 발소리. 민향 언니가 방문을 두드리더니 뚜왈렛이 왔다고 알려주셨다. 정신없이 일어나 욕실에서 대야를 꺼내 물을 받고 준비를 했다.


시계를 보니 8시 15분. 어제 오후에 왔던 말 많은 아줌마였다. 왜 이렇게 일찍 왔담. 할머니의 몸을 닦을 때에도 얼마나 요구사항이 많은지, 물도 차갑다며 다시 떠오게 했고 다른 간호조무사들 보다 훨씬 더 꼼꼼하고 오래 닦았다. 몸을 닦고 기저귀를 바꾸기까지 한 30분가량 소요된 것 같은데 할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길 때까지도 할아버지는 일어나지 않으셨다. 힘 좋은 간호조무사 덕분에 여자 둘이서 할머니를 수월하게 옮길 수 있었고 나는 아침부터 진이 빠져 입맛도 없어졌다.


초콜릿이 들어가 있기에 맛있을 줄 알았던 시리얼은 생각보다 그저 그런 맛이었고 대충 배를 채우고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 덕재에게 연락이 와 반가웠다. 프랑스에 와서 느낀 건데, 주변 사람들의 별거 아닌 연락이 정말 고맙고 소중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성격상 용건 없이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가끔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먼저 건네는 연락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는 것이 함정.


어제보단 날씨가 훨씬 좋아 보이기에 반팔에 롱 치마를 입고 나갔다. 젤리슈즈를 신기엔 발이 시릴 것 같아서 운동화를 신으려고 양말을 꺼내는데 왜 이렇게 다 요란한 무늬들 밖에 없는 건지.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이제 민무늬 양말만 살 거다. 대략 깔맞춤을 하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불어 살짝 쌀쌀했지만 못 견딜 수준은 아니었다. 열심히 걷다 보니 골목길 사이로 작은 벼룩시장이 열린 곳을 발견했다. 잠시 구경을 하러 갔다가 비싼 가격에 훑어보기만 했는데 저 멀리 정면으로 에펠탑이 보였다. 이 쪽 길로 가면 에펠탑이 나오는구나 깨닫고 그대로 쭉 걸어갔다.

새로 발견한 길로 가니 에꼴 밀리떼흐 역이 나왔고, 집에서 에펠탑까지는 정말 가까웠다. 저번에 이상한 골목길로 걸어가다 결국 버스까지 탔던 일이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아침 11시였지만 나름 모닝 에펠탑을 찍고, 또 다른 벼룩시장이 열린다는 알렉산더 3세 다리 밑으로 걸어갔다. 꽤 많이 걸어서 인지 다리가 아팠지만 그래도 날이 좋아 기분 좋게 걸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친구들과 연락도 주고받고, 사진도 찍었다. 그런데 알렉산더 3세 다리 밑에 도착하자마자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다리 밑으로 가 비를 피하다가 곧 먹구름이 사라지기에 얼른 벼룩시장 구경을 했다.


정말 이런 물건들은 어디서 다 가지고 나온 건지. 다른 곳에서 봤던 것들보다 훨씬 값어치 있어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따라서 눈대중으로 훑어보기만 하고 바스티유 시장에 가기 위해 지하철로 향했다. 그때 이미 내 다리는 한계였지만 지하철에서 앉을 수 있겠지 라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앙발리드 역으로 갔다. 목요일과 일요일 오전에만 열리는 바스티유 시장을 가기 위해 어제와 같은 방향으로 8호선을 탔다. 바스티유 역에 내려서 광장 사진을 찍고, 시장으로 향했는데 곧 시장이 닫을 시간이라서 여기저기 “알리지~알리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떨이~”같은 뜻일 거다.

목표였던 체리는 존재하긴 했지만 가격이 3, 4배는 올라있었다. 벌써 체리 철이 끝났나 보다. 혼자 살 때 다 터뜨려서 반 이상을 버렸던 그 1킬로에 2유로짜리 체리가 나에게 이번 여름 마지막 체리가 되어 버렸다. 결국 배가 고파 시장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향했다. 파스퇴흐 역에 내리니 또 비가 내렸지만 점심으로 데워 먹을 피자와 함께 마실 주스를 사기 위해 프랑프리에 갔다. 그런데 주스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비쌌다. 그냥 맥주 한 캔을 살까 하다가 냉장고에 넣어 둔 시원한 맥주가 없어서 고심 끝에 체리와 복숭아가 섞인 트로피카나를 골랐는데 집에 와서 먹어보니 예상했던 맛이 아니었다. 단 맛일 줄 알았는데 달지도 시지도 않은 애매한 맛이었다. 100% 주스가 나를 속이다니. 돈이 아까웠다.

점심을 먹고 다시 외출을 할까 싶었지만 너무 많이 걸어서 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결국 양말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서 자버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답답함에 눈을 뜨니 어째서 피곤이 더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발이 답답해 양말을 벗고 발만 대충 씻은 뒤 또 의미 없는 인터넷 서핑을 했다. 오후 임무 수행 후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벌써 잘 시간이다. 저녁 임무 수행 때는 처음 보는 간호조무사가 왔는데 내가 본인의 말을 못 알아듣자 프랑스어를 못하냐고 물었다. 대충 눈빛과 손짓으로 말을 알아듣고 척척 해내니 그 모습이 웃긴 듯했다. 프랑스어를 못 알아듣는 나에게 프랑스어로 프랑스어 못해?라고 묻다니. 바보 아닌가?


어쨌든 오늘 할 일은 다 끝났다. 그동안 미뤄왔던 사진 정리도 하고 (정말 몇 장 없더라. 요즘 사진을 너무 안 찍는 것 같다.) 이제 잘 시간이다. 8월의 한가운데서 벌써 가을을 맞다니. 파리의 밤 10시는 이제 조금 어둡다. 10월 서머타임이 끝날 때쯤이면 하루가 더욱 짧아지려나? 지금도 충분히 짧은데 말이다. 아쉬운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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