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49
아침 임무수행을 끝내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갈 준비를 했다. 벼룩시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오랜만에 사크레쾨르 성당도 보고, 저번에 못 찾았던 벽을 뚫는 남자도 목표였다. 몽파르나스 비앙브뉘 역까지 걸어가서 12호선을 타고 아베쎄 역에서 내렸다. 저번처럼 계단으로 올라가기엔 기운이 달려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를 타니 금방 지상에 도착했다. 그런데 블로그에서 본 대로 라면 역에서 나오자마자 벼룩시장이 나와야 하는데 관광객들만 바글바글 했다.
사랑해 벽 앞에서 잠시 구경하다가 나무 위에서 자꾸 새똥이 떨어지기에 무서워서 대피했다. 온 지 오래돼서 방향 감각이 없었지만 언덕이니까 그냥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나오겠지 싶어 걸어갔더니 금방 성당이 보였다. 나비고를 이용해 푸니쿨라를 타볼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걸어가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아 그냥 갔다. 그런데 올라가다 보니 더워서 푸니쿨라 탈걸 하고 약간 후회했다. 언덕 위에 올라 파리 전경을 바라보고 조금 더 올라 성당 아래에서 사진을 찍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여유롭게 쉬고 싶었는데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에 성당 아래 벤치에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집에서 싸 온 자두를 먹으며 기운을 보충하고 벼룩시장을 찾아볼까, 벽을 뚫는 남자를 찾아볼까, 고민하며 내려왔다. 언덕 아래 흑인들이 오늘도 실팔찌를 걸어주며 사기를 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 사람이 팔찌를 들이밀기에 "농~"했는데 팔을 잡으려고 해서 폴짝 뛰면서 "농농!" 하고 갔다. 그런데 언덕 아래로 내려오고 나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벽을 뚫는 남자를 보려면 다시 올라가야 하는 것. 수많은 계단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냥 깔끔히 포기하고 아무 골목길로나 내려갔다. 아베쎄 역을 지나 더 아래로 내려가니 골목 사이사이에 작은 작품들이 있었다. 전신사진을 찍고 싶어 장소를 물색하는데 아무래도 프랑스에서 타이머로 사진 찍기는 너무 위험한 것 같아 포기했다. 어떤 역 앞에서 버스를 타려다 원하는 목적지가 없어서 그냥 지하철로 갔다. 나비고를 찍는데 안 찍혀서 옆 기계에 찍으니 엑스 표시가 뜨면서 삑- 소리가 났다. 당황해서 다시 대니 또 삑- 소리가 났다. 고장 난 건가? 인포 직원에게 나비고를 들이밀며 불쌍한 표정을 지으니 그냥 지나가라고 열어줬다. 설마 내가 나비고를 핸드폰이랑 같이 넣어놔서 심이 손상됐나? 별 걱정을 다 하면서 결국 파스퇴흐 역까지 갔다.
출구로 나가서 나비고 충전기에 올려놓으니 문제없이 내 나비고 정보가 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구에 찍어 보니 이번엔 잘 찍혔다. 뭐야, 거기 기계가 이상한 거였네. 안심하고 버스를 타러 갔다. 70번 버스를 타고 센강 앞에 내려서 곧 끝날 파리 쁠라주를 구경하고 과자를 먹다가 목이 막혀 물을 마시려는데 갑자기 어떤 할머니가 이 물 말고 저기 가서 물을 사 먹으란다. 뭔 상관인가 싶어 "농" 했더니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또 "농" 하고 그냥 물 한 모금 마시고 그 자리를 떠났다.
다시 70번 버스를 기다려서 타고 시청 앞에서 내렸다. 가을 대비 긴팔이나 가디건을 득템하고 싶었지만, 역시 기대하고 오면 괜찮은 옷이 없다. 세 군데 다 가 봤는데 다 실패였다. 점심을 과자로 때우기는 좀 그래서 마레지구의 유명한 라스 뒤 팔라펠 가게를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팔라펠을 파는 다른 가게들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그냥 안 먹기로 했다. 69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니 샹드막스 공원이었다.
에펠탑을 바로 앞에 두고 난 뒤를 돌아 앉아 복숭아를 먹었다. 오래간만에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았다. 조금 쉬다가 공원에 가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놀다 집에 가기 위해 42번 버스를 타러 갔다. 공원에서 바람을 맞으며 사진 찍을 때까진 좋았는데 몸을 보니 온통 나무벌레 투성이었다. 너무 싫어. 대충 다 털어내고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42번 버스가 서 있었다. 콩코드 역에서 내리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잘못 맞춰서 이번에도 마들렌에 내렸다. 12호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 많이 걷지도 않았는데 발이 아팠다.
집에 돌아와 좀 쉬다가 노트북을 켰는데 이상하게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어제 끄고 잘 땐 배터리가 남아 있었는데. 이상하다 싶어 충전기를 연결하니 0%라고 떴다. 충전이 되는 도중 전원을 다시 켜니 이번엔 파란 바탕에 영어로 윈도우를 불러올 수 없다는 경고 문구가 떴다. 깜짝 놀라서 강제 종료 후 재부팅을 하니 한글로 ‘자동 복구 준비 중’이라고 나왔다. 뭔가 잘못됐나? 불안한 마음에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는데 또 영어로 윈도우를 불러올 수 없다는 문구가 나왔다. 망했다. restore 버튼을 눌렀는데 삼성 로고만 뜨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 20분 나뒀다가 다시 강제 종료 후 재부팅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진짜 너무 화가 나고 어이가 없었다.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혼자 고장 나고 지랄이야. 느린 핸드폰을 붙잡고 여러 정보를 검색해 봤지만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냥 거의 반포기 상태로 다시 재부팅 후 수리 요청 메일을 보내려고 찾아보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에 와 보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문구가 떴다!!! 아직도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작동이 된다. 아마 어제 종료 버튼을 눌렀을 때 자동 업데이트가 실행되었는데 배터리가 없어서 꺼지면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한 것 같다. 어쨌든 다시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깐 정말 사진이랑 기록들이 다 날아가면 어떡하나, 수리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별 걱정이 다 들고 눈물까지 날 것 같았는데 죽다 살았다. 이제 간간히 백업도 좀 해놔야겠다. 배터리도 항상 만땅으로 채워놓고 자야지!!! 쓴 지 1년도 안됐는데 나한테 이러지 마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