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53
눈을 뜨자마자 뚜왈렛이 왔다. 정신없이 물을 떠다 주고 옆에서 돕는데 정말 과묵한 간호조무사였다. 물을 갈아 줄 때도 내가 “changer l’eau?” 하니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게 다였다. 한국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파리의 환절기에 나는 콧물이 가득 찬 채로 괴로웠다. 살짝 재채기도 했는데 간호조무사와 혈당을 체크하러 온 간호사가 여기선 하지 마라고 말했다. 누가 하고 싶어서 하나. 웃어넘기고 아침 임무수행을 끝마친 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오전 시간을 보냈다.
점심은 외식을 하기로 해서 미리 옷을 갈아입고 기다렸다. 집 근처 동네의 한국 식당을 가기로 했는데 나도 모르게 할머니께 외식하고 온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해 버려서 집을 나와 할아버지께 약간 꾸중을 들었다. 괜히 입방정을 떨어서. 집에 혼자 계신 할머니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다.
식당을 찾아가는 길 15구와 14구의 경계 부근으로 걸어갔는데 그곳은 정말 서울이나 인천의 어느 한 동네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낯선 파리였다. 현대식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그곳은 멋진 풍경을 간직한 파리 시내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신기한 마음도 들었고 왠지 모르게 한국이 생각나기도 했다. 우리가 찾아 간 식당의 이름은 ‘소담’이었다. 아담하고 예쁜 2층짜리 식당이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도 꽤 있었고 외국인이 대다수였다. 사장 아저씨와 안면이 있는 할아버지께서 인사를 나누시고 우리는 음식을 주문했다. 나는 짬뽕을 고르고, 언니와 할아버지는 짜장면, 그리고 같이 먹을 깐풍기를 시켰다. 그런데 언니가 뒷 테이블의 보쌈을 보더니 보쌈 속을 먹고 싶다고 했다. 고기는 많이 먹어서 질렸으니 속만 따로 시켜보자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보쌈 속 김치만 주문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래도 뭐 맛은 있더라.
깐풍기는 닭의 뼈가 그대로 살아 있는 그저 그런 맛이었지만 배가 고파서 많이 먹었다. 이어 주문한 짜장면과 짬뽕이 나오고 비주얼은 제대로였지만 맛은 그닥이었다. 매콤하고 시원한 짬뽕 국물을 기대했는데 그저 밍밍한 맛의 짬뽕 향 국수 같았다. 외국인의 입맛을 고려해서 간을 적게 한 건지, 조미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지 내가 알 수는 없었지만 한국인 입맛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그래도 뭐 할아버지께서 사주시는 음식이고, 하숙집에 들어오고 난 뒤 처음으로 한 외식이기에 불평불만 없이 잘 먹었다. 배가 고파 다행이었다.
그런데 언니와 할아버지의 짜장면도 어딘가 싱거운 듯했고 주방장에게 말하니 새로 해주겠다며 다시 두 그릇을 가져갔다. 졸지에 나는 어른들이 젓가락만 빨고 계실 때 열심히 짬뽕을 먹는 이상한 어린 여자애가 되어 버렸다. 맛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왔다. 한 그릇에 15유로, 16유로 했던 것 같은데 내 돈 주고는 정말 안 사 먹을 그런 맛이었다.
언니의 제안으로 우리는 동네 중국 마트 ‘탕프레’까지 걸어갔고 이것저것 장을 보다 보니 장바구니가 또 무거워졌다. 저번에 멀리 차이나타운에서 갔던 탕프레 보단 훨씬 규모도 작고 손님도 없어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었다. 혼자 마트를 탐방하다 그 유명한 ‘칭따오’ 맥주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할아버지께 하나만 사달라고 말씀드리니 흔쾌히 그러라며 본인 것도 하나 더 담으라고 하셨다. 크크 칭따오 기대된다.
장을 다 보고 집으로 가는 길, 할아버지께선 버스를 타자고 하셨지만 언니의 말림에 결국 셋이 사이좋게 짐을 나눠 들고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께 장을 보고 왔다고 말씀드리니 그새 본인을 제외하고 외식을 다녀온 사실을 잊어버리신 듯해 가슴이 아프면서 한편으로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부른 상태로 오후 뚜왈렛이 오기 전에 알이 배긴 허벅지를 풀기 위해 조깅을 하러 나가려고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오늘은 한 시간만 뛰고 와야지 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다. 멀리 센 강까지 굳이 내려가지 않고 앙발리드 앞 공원을 빙빙 돌며 뛰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처음엔 어제보단 조금 수월하게 뛸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고통이 밀려왔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쑤셔왔다. 노래 5곡을 들으며 한 곡이 끝날 때까지 뛰다가 다음 곡이 끝날 때까지 걷다가를 반복했다.
샤워 후 쉬고 있으니 케빈이 임무수행을 하러 왔다. 언제 봐도 친절하고 빠른 케빈. 그렇게 뚜왈렛을 끝내고 쉬다 저녁 먹기 전 크래코트와 젤리를 간식으로 먹었더니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다. 그래도 항상 고봉밥을 주시는 민향언니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꾸역꾸역 맛있는 척 다 먹어치웠다. 그리고 저녁 시간을 보내는데 계속 노트북 화면만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지 눈이 침침했다. 지금도 뭔가 흐릿한 느낌인데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내일은 아마 다리 상태가 더 악화되어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날씨가 좋을 때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