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56
주말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 임무 수행을 끝내고 간단한 식사를 끝마친 뒤 할아버지와 유로 마트에 장을 보러 가기 위해 준비를 했다. 사실 몽주 역에서 열리는 벼룩시장에 구경하러 가려고 했는데 할아버지께서 은근히 같이 가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 눈치껏 따라나섰다. 벌써 세 번째 같이 가는 유로 마트다. 처음엔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 게 정말 어색했고 시간도 잘 안 가는 것 같더니 이젠 금방 도착하는 느낌이다. 물론 여전히 대화는 별로 나누지 않지만.
마트에 도착하여 저번보단 수월하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데 정류장 공사로 임시 정류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할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멀리 88번 버스가 보이고 우리는 안내 표지판도 없는 그곳에서 멀뚱히 서 기다렸다. 그러다 할아버지께서 어플로 버스 도착 시간이 대략 10분 이상 걸린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바로 앞에 보이는 마라보 다리를 거닐고 오라고 하셨다.
“마라보 다리 밑에는 센 강이 흐른다.” 유명한 시인의 말을 되새기며 그곳으로 갔다. 각자의 핸드폰으로 인증 샷을 찍어 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다시 정류장으로 예측되는 곳에 서 기다리는데 멀리 88번 버스가 보였다. 손을 흔들었지만 버스 기사는 우리를 보고 뒤쪽으로 가라는 듯 신호를 보내고 슝 사라졌다. 그곳은 정류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가 서 있던 곳 조금 더 뒤쪽에 있던 정류장 앞에서 다시 10분을 넘게 기다렸다. 오늘 날씨가 꽤 쌀쌀해서 남방 하나만 입고 나온 나는 너무 추웠다.
할아버지의 작은 배려로 나는 햇빛 아래서 기다리고 그렇게 한참이 지나 다시 88번 버스가 보였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장본 것들을 내려놓은 뒤 왜인지 모르겠지만 휠체어에 불편하게 앉아계신 할머니를 침대로 옮겨드리고 물을 사러 다시 나갔다. 프랑프리에 가며 어제 나에게 말을 걸었던 흑인 아저씨 이야기도 나눴다. 할아버지께선 내가 귀엽게 생겨서 장난치는 것이라고 하셨다. 역시 할아버지 눈에도 난 예쁘지는 않구나 생각했다. 물을 사들고 집에 와서는 멍하니 침대에 누웠다.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옷 중 내가 입을 만한 카디건을 가져다주셔서 조금 더 따뜻하게 있었다. 곧이어 본인이 안 쓰시는 이어폰도 가져다주셔서 감사하게 받았지만 알고 보니 이어폰 고장이 아니라 내 핸드폰의 이어폰 단자가 고장 난 것이었다! 핸드폰에 꽂아도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혹시나 하여 노트북에 꽂았더니 잘 들리더라. 나는 애꿎은 소라의 선물을 버리고 만 것이었다. 마침 소라와 카톡을 주고받던 중이라 미안함을 전하고 이어폰은 다시 할아버지께 돌려드렸다. 어쨌든 앞으로 운동할 때 음악은 못 듣는다. 슬프다.
점심을 먹고 계획했던 외출은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졸렸는데 낮잠을 자면 밤에 잠이 더 안 올까 봐 참았다. 사실 어젯밤에 잠이 잘 안 와서 의아했다. 몸은 피곤한데 잠은 안 오고 자도 피로가 풀리지 않는 상태라니. 너무 무리하게 운동을 했나? 오후 임무 수행이 끝난 뒤 귀찮았지만 옷을 갈아입고 조깅을 하러 나갔다. 하지만 뛰기엔 내 정강이 근육에 무리가 올 것 같아 우선 걷기로 했다. 2시간 걷기를 목표로 오랜만에 센 강으로 향했다. 사실 많은 관광객과 마주치기엔 내 꼴이 좀 추레했지만 그래도 한국인만 안 만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자신 있게 걸어갔다. 다행히 오늘은 이상하게 한국 사람은 보지 못했다. 저번과 마찬가지로 오르세까지 걸어간 뒤 다시 돌아왔다.
매번 가던 길 말고 새로운 길로 가보자는 생각에 차도 옆으로 걷기도 하고, 앙발리드 반대편으로 걷기도 했다. 그런데 공원에 다다르자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너무 다리가 아파 잠시 앉아 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꾹 참고 집까지 열심히 걸어왔는데 걷기도 힘든 내 다리를 가지고 뛰었다니 지난 4일간의 나 자신이 대견할 따름이었다. 내일은 일요일이라 운동을 하루 쉬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무한도전을 보며 웃다가 허접한 남자 간호조무사와 뚜왈렛을 마친 뒤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 내일은 아침 먹고 외출해야지. 날씨를 보니 다음 주 내내 비다. 얼른 집에서 가을 옷을 보내줘야 할 텐데. 8월의 파리는 벌써 너무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