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57
일요일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쌀쌀해진 것 같다. 비몽사몽으로 임무 수행을 완료하고 아침을 먹었다. 예정대로라면 아침 식사 후 외출이었지만 현재 할아버지와 언니 사이에 이상한 냉전 기류가 흐르고 있어 내가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준비를 마치고 오전 시간은 여유롭게 보냈다.
오랜만에 필리핀에 가 있는 지현이와 한국에서 인턴 생활을 끝마친 현아와 이야기도 나누고 미래에게는 메일로 현재 하숙집 상황을 하소연했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식사부터 언니는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시간 절약 핑계를 대는 언니에게 편한 대로 하시라고 말은 했지만 굳이 저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난 맛있는 쫄면을 먹고 집을 나섰다.
역에서 열리는 작은 벼룩시장을 보러 갔는데 정말 작은 규모였다. 딱히 볼 것도 없고 가격도 비싸서 10분도 안 보고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 초반처럼 무작정 걸어보려 했지만 금세 다리가 아파 다시 지하철을 탔다. 순간 ‘어디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쓸쓸한 마음으로 다시 동네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렸다. 오늘은 추위에 대비해 저번에 구제 숍에서 산 재킷을 입고 머플러까지 두르고 나온 상태였다.
뤽상부르 공원에 가 여유를 만끽하려고 했지만 도착하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꽃이 보이는 곳에 앉고 싶었는데 자리가 없어서 그늘에 마련된 의자에 털썩 앉아 쉬었다. 그렇게 무장을 하고 나갔는데도 바람이 부니 추웠다. 한 시간 정도 앉아 있다가 살짝 배가 고파 공원을 나섰다. 마레지구에 가서 팔라펠을 사 먹으려고 했는데 85번 버스는 주말에는 운행하지 않는다는 안내를 뒤늦게 봐서 포기했다. 샌드위치를 사 먹을까 하다가 그럼 저녁을 못 먹을 것 같아서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입장하자마자 경호원이 결제를 어떤 방식으로 할 예정이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떠오른 ‘다그정’을 말하니 줄을 서라고 했다. 아마 카드였으면 이지오더 기계로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파리의 맥도날드에는 메뉴판이 따로 없었다. 순간 감자튀김을 뭐라고 말해야 되지 고민하다 내 차례가 되어 “Je voudrai 후렌치 프라이”라고 괴기한 문장을 만들어 냈다. 직원은 나의 구린 후렌치 프라이 발음을 처음엔 알아듣지 못하고 “Pardon?” 했지만 한 번 더 용기 내어 말하니 “프렌치프라이~”하면서 주문을 받았다.
더 원하는 것이 있냐는 눈빛에 ‘그게 끝이야’라는 눈빛을 보내니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친절하게 감자튀김을 내주었다. 케첩을 주지 않아서 의아했지만 감자튀김 자체가 짜니까 그냥 먹었다. 감자튀김 가격은 무려 2.75유로였다. 아무리 grand 사이즈라고 해도 너무 비싸지 않나. 어쨌든 간단히 배를 채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반대 방향에서 89번 버스를 탔다. 몽파르나스 비앙브뉘 역에서 내릴까 고민하다 그냥 타고 쭉 갔는데 점점 눈앞에 내가 모르는 낯선 동네의 풍경이 펼쳐졌다. 무작정 내리기엔 길을 잃을까 겁나 우선 계속 타고 갔다. 그러다 건너편에 반대 방향 버스정류장이 보이기에 얼른 내렸다. 그곳은 정말 처음 가는 동네였다.
노선도를 확인하니 뤽상부르 방향에서는 파스퇴흐를 지나는데 다시 돌아오는 방향에서는 전혀 다른 노선으로 가는 버스였다. 시간은 벌써 5시였다. 혹시 내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뚜왈렛이 올 까 봐 불안한 마음에 할아버지께 양해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무사히 반대방향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로 왔다. 다행히 집에 도착하자마자 5분도 채 안돼서 간호조무사가 왔다. 무사히 오후 임무수행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빨래를 돌렸다. 갑자기 시작한 조깅 때문인지 빨랫감이 꽤 많았다. 침대에서 쉬다가 잠이 들 뻔했는데 곧 저녁을 먹으라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 주방으로 갔다.
역시나 할아버지와 둘이 식사를 하고 다 돌아간 빨래를 널은 뒤 저녁 임무수행을 기다렸다. 지금은 임무 수행도 모두 끝마친 상태. 내일부터 비가 온다던데 정말 두렵다. 추워서 입을 옷도 없는데 가족들은 보내준다고 말로만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루고만 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 내일은 한 주의 시작인 Lundi. 활기찬 월요일을 보낼 수 있길 바라며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