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59
8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임무가 도착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임무를 수행했다. 하필이면 머리까지 감는 날이다. 그래도 나름 재빠르게 일을 도왔고 40분 만에 모든 일이 끝났다. 아침을 먹고 오래간만에 외출을 위해 머리를 감았다. 화장까지 곱게 하고 오전 시간에는 미래와 메일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을 정말 배부르게 먹고 쇼핑을 하러 나가려는데 가족들이 내일 가을 겨울옷을 보내주기로 해서 EMS와 선박 택배를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난 정말 딱 필요한 것만 말했는데 아빠가 너무 많다고 타박을 줘서 또 서러웠다. 어쨌든 2시가 넘어서야 대충 분류 작업이 끝났고 나는 2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Les 4 temps’에 가서 여유로운 쇼핑을 즐기고 싶었지만 라데팡스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소요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샤틀레로 향했다. 내가 가장 즐겨 타는 70번 버스를 타고 샤틀레 역에서 내렸는데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퐁피두센터는 어디 있지? 포 럼 데알은? 그냥 발길 닿는 곳을 따라 걷다가 도저히 못 찾겠어서 눈앞에 보이는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 샤틀레는 파리 최대의 환승지다. 이리저리 뒤섞인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걷다가 의자에 앉아 지하철 노선도를 펼쳤다.
파리에 사는 사람으로서 관광객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노선도를 꺼내기 꺼려하는 편인데 그 상황에선 어쩔 수 없었다. 물끄러미 샤틀레 역 주변을 살피다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포 럼 데알은 ‘레알’ 역에 있었어! 나는 4호선 환승통로를 따라 쭉 걷다가 다시 RER A 환승로를 통해 포 럼 데알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바로 목적이었던 H&M에 들어갔다. 아무리 내일 긴 옷을 보내준다지만 받는 데만 최대 일주일 정도 소요될 것이므로 당분간 버틸 옷이 필요했다. 그리고 어제오늘 쌓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아이쇼핑이라도 마음껏 하자! 싶어 매장 곳곳을 돌며 옷을 구경했다.
내 스타일인 옷은 많았지만 가격에 먼저 절망하고, 가격에 괜찮다 싶어도 서양인의 체구에 맞게 만들어진 옷 길이에 또 한 번 절망했다. 결국 내가 선택한 옷은 무난한 쥐색 카디건. 9.99유로라는 적당한 가격에 소재도 톡톡하니 괜찮았다. 무난한 색의 카디건이 필요하던 찰나에 사이즈도 M이 딱 두 장 남아있어서 얼른 집어왔다. 귀여운 워커도 사고 싶었고 니트나 원피스에도 눈이 갔지만 하루에 10유로라는 지출은 아직까지 나에겐 어마어마하게 큰 것이므로 참고 계산했다. 쇼핑을 하다 보니 어서 빨리 일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쇼핑하고 싶어.
그래도 기분 좋게 카디건을 사고 나와서 1호선을 타고 ‘생 폴’ 역에 내렸다. 나의 사랑 마레! 프리피스타 1호점을 공략하러 들어갔지만 아줌마 두 명이 자리를 잡고 비켜주지 않아서 포기하고 그냥 나왔다. 2호점을 찾아가는 길에 추울 줄 알고 챙겨 입은 재킷이 생각보다 따뜻한 날씨에 짐만 되기에 카디건을 사고받은 작은 쇼핑백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부피가 좀 커서 잘 들어가지 않아 나도 모르게 아무 데나 걸터앉아 낑낑대며 그 작은 쇼핑백 안에 재킷과 카디건을 구겨 넣기에 성공했다.
기분 좋게 들어선 2호점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열심히 옷들을 뒤지는데 정말 난해한 옷들이 많았다. 쓸 만한 게 없나 싶어 열심히 뒤지다가 가방 쪽도 구경하고 털옷들도 살펴보는데 갑자기 주인 할아버지가 내 앞으로 오더니 ‘Bonjour’하고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뜬금없는 인사에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봉쥬 하니 나를 조금 지켜보다가 다시 계산대로 갔다. 뒤늦은 인사는 나에 대한 친밀의 표시인가? 괜히 신경이 쓰여 금방 나가지 못하고 이곳저곳 더 둘러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나갈 때 간단한 인사를 전하려 했지만 갑자기 늘어난 손님들 탓에 결국 눈도 못 마주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3호점은 안타깝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들릴 수가 없었다.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콩코르드에서 환승하여 집에 도착했다. 오후 임무수행을 마치고 잠시 걷기 운동을 하러 나가려고 했지만 조금 늦어지는 탓에 저녁을 먹고 나가기로 결심했다. 저녁 메뉴는 라면. 스테이크 굽는 냄새가 나기에 당연히 고기인 줄 알았는데 고기는 사이드 메뉴였다.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다 너무 잘 먹어서 배가 빵빵한 상태로 우비를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8시가 좀 안 된 시각이었는데 한 시간만 걷고 와야지 싶었다. 그런데 하늘이 다시 꾸리꾸리 해지는 게 금방 비가 쏟아질 듯 어두웠다. 그래도 난 우비만 믿고 앙발리드를 지나 센 강을 향해 걸었는데 그런 나를 조롱하기라도 하듯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냥 맞기엔 좀 많은 양이라서 잠시 나무 밑에 숨어 서 있었다.
저녁이라 운동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들은 그냥 비를 맞으며 열심히 뛰어가더라. 한참이 지난 후에 비는 서서히 멎어 들었지만 곧장 센 강으로 향하기엔 이미 너무 지쳐서 다시 집 방향으로 돌아갔다. 천천히 걸으며 동네 구석구석을 살폈다. 비싼 차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도 보고, 은행에 들어가서 봉투를 좀 얻어오려다 수표 전용인 걸 깨닫고는 포기하고 나오기도 하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관찰하기도 하고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집에 도착해서 아까 저녁 먹기 전 하다 만 단어 공부를 하고, 임무 수행을 끝마쳤다. 샤워 후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학원 친구 예현이가 오늘 파리에 도착했다. 내일이나 내일모레쯤 만나기로 했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그렇게 친한 친구도 아닌데 기대가 되는 걸 보면 절친 들이나 가족들이 온다고 하면 밤에 잠도 못 이루겠다. 그렇지만 오늘 밤은 잠이 잘 올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