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ne chance!

파리의 안나 92

by Anna

밤새 조금 추웠는지 일어나자마자 콧물이 너무 많이 났다. 정신없이 아침을 먹고 뚜왈렛을 마친 뒤 책을 읽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읽으면서 계속 울컥했다. 나는 우리 엄마를 얼마나 알고 있지? 왠지 모르게 자연스레 반성의 마음을 갖게 하는 책이다.


원래 오늘 아침을 먹고 할아버지와 함께 물을 사러 가기로 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조금 귀찮기도 하고 먼저 물어보긴 꺼려져서 그냥 머리를 감았다. 준비를 하다 점심을 먹는데 할아버지께서 물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가 아무 말이 없어서 혼자 사 오셨다는 거다. 죄송한 마음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물 사러 가자고 말하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괜히 내가 잘못한 꼴이 되어 다음부터는 꼭 저를 부르세요, 말씀드렸다.


사실 오늘 점심엔 지혜 언니네 집에 가 같이 식사를 하기로 했었는데 언니가 장염 증세가 심해져서 못 만나게 되었다. 아쉬웠지만 다음번에 만나기로 약속하고, 오랜만에 퀵 보드 라이딩을 하러 가려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래간만에 입은 반바지가 너무 꽉 껴서 슬펐다. 배에 조금만 힘을 주면 단추가 터질 것 같았다. 상체에도 살이 쪘는지 브래지어도 작아졌다. 가슴이 커진 건 절대 아닌데 말이야. 한숨을 푹푹 쉬며 밖으로 나섰다.


날씨가 좋아 입고 있던 청자켓은 벗어서 가방에 넣어두고 열심히 달렸다.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오늘은 셀프타이머 샷을 위해 삼각대도 가지고 왔다. 저번에 점찍어둔 장소로 가서 카메라를 설치하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왔다 갔다 해서 점프 샷은 찍을 수가 없었다. 초점이 안 맞는 사진 몇 장을 찍고 강가를 빙 돌았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좋았다. 초록 이끼가 가득 낀 세느강도 오늘은 참 반짝거리고 예뻤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시원한 바람이 많이 불어 좋았다. 오르세 박물관 앞 계단에서 사람들 사이에 앉아 쉬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정말 예술이었다. 오늘 느낀 건데, 파리의 가을은 정말 예쁘고 정말 멋있다. 그렇게 한참을 쉬다가 집으로 가기 위해 일어났다.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갈 때가 가장 재미있는 것 같다. 집에 거의 다다라서는 다리가 아파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래간만에 땀을 좀 뺀 것 같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는데 이마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무 벌레가 한 마리 붙어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떼어 죽이고 집으로 올라갔다. 곧이어 뚜왈렛이 와서 오후 임무 수행을 마치고 샤워를 했다.


그리고 불어 공부를 한 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았다. 한국 전쟁 당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이었다. 역시 인간이 제일 무서운 존재인 것 같다. 저녁은 김치볶음밥이었다. 배불리 먹고 방으로 와 속담 공부를 했다. 별로 대단한 것들은 아니지만 어제 작성한 계획표대로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조금 더 알찬 시간들을 보냈다고 생각되지 않을까 싶다.

내일이면 벌써 프랑스에 온 지 세 달째다. 나에게 주어진 12개월의 시간 중 4분의 1이 지났다니. 남은 시간들도 행운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Bonne ch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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