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93
세 달째다. 곧 100일 기념 자축 파티라도 해야 하나. 아침에 비가 내려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 개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야지 싶어 어제와 같이 가방을 싸서 퀵 보드를 끌고 나갔다. 조금 흐렸지만 바람이 선선하니 좋았다.
오랜만에 에펠탑을 보려고 샹 드 막스 공원으로 갔는데 공사 중이었다. 나무를 새로 심는 것 같았다. 결국 에펠탑은 제대로 못 보고 앙발리드로 향했다. 그런데 알렉산더 3세 다리로 향하던 중 초딩 무리에게 길을 막혔다. 결국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앉아 쉬기로 했다. 잔디밭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바람결에 잔디가 흩날리는 모습이 참 예뻤다.
한참을 쉬다가 어제 성공 못한 점프 샷을 찍기 위해 나만의 포토 존으로 갔다. 월요일이라 그런지 어제보단 훨씬 사람이 적었다. 카메라를 설치하고 타이머를 맞춘 뒤 점프를 했지만 1차 시도는 실패였다. 다시 세팅을 하고 점프를 하러 가는데 저 멀리 흰색 옷을 입을 아저씨가 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창피한 마음에 점프는 못하고 소심하게 브이만 그렸다.
그 아저씨가 자리를 뜨면 다시 찍을 요량으로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데 왜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더라. 프랑스어 할 줄 아냐고 해서 조금이라고 대답한 게 화근이었다. 딱 봐도 40대 이상 중년 아저씨였는데 그냥 못 한다고 하고 무시할 걸. 괜히 외국인에게 친절해 보이려다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쏟아 내는 그의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반갑다며 악수를 청하고 본인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일본인으로 추정되는 본인의 여자 친구 사진과 애완견 사진까지 보여주더라. 나에게 친절하다며 계속 악수를 청하거나 하이파이브를 요청하기에 몇 번 받아주다가 짜증이 나서 태연히 짐을 싸고 일어났다. 내가 퀵 보드를 끌고 나온 것을 안 그는 조금 걷자고 제안했다.
쌩 가버리긴 미안해서 같이 좀 걷다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말 걸어줘서 고맙고 나 먼저 가겠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알았다며 폰 번호를 묻기에 거절했고, 악수를 하자고 해서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더니 곧이어 비쥬를 하려고 했다. 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해. 속으로 ‘설마 비쥬를 하진 않겠지.’ 싶었는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다니.
나는 재빨리 손을 빼고 ‘Non’했다. 왜?라는 그를 두고 안녕, 고마워, 잘 가, 하고 쌩하니 달려갔다. 바닥은 낙엽과 나뭇가지 때문에 울퉁불퉁하고 다리는 아파왔지만 얼른 그에게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뒤도 안 돌아보고 쭉 갔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아 알마 다리 밑으로 내려가 나무 아래에 앉아 책을 읽었다. 다음부터는 아저씨들이 말 걸면 불어도 못하고 영어도 못한다고 해야겠다. 괜히 쓸데없는 친절한 한국인 이미지를 위해 노력하지 말아야지. 그 흰색티 아저씨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들이 낭비됐다. 그래서 기분도 안 좋았다.
책을 읽다 네 시쯤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항상 퀵 보드를 타고 내려올 땐 쌩쌩 달릴 수 있어서 좋은데, 집에 갈 때는 오르막길이라 힘들다. 겨우 도착해서 열쇠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저절로 열렸다. 할아버지께서 문 근처에 있으셔서 소리를 듣고 열어주신 거였다. 뚜왈렛은 막 끝난 상태였다. 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기저귀를 꺼내니 이미 다 끝났다며 간호조무사와 할아버지가 웃었다. 힘들게 왔는데 임무 수행을 제대로 못 하면 왠지 김이 빠진다.
바로 씻으려다가 언니가 먼저 욕실에 들어가셔서 불어 공부를 했다. 그리고 샤워 후 영화를 보았다. 차승원 주연의 ‘하이힐’ 내가 좋아하는 액션 범죄 장르에 ‘트랜스 젠더’라는 소재로 신선함까지 갖춘 영화였다. 장진 감독의 연출된 유머나 BGM 스타일은 좀 별로였지만 영화 자체는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차승원이 연기를 너무 잘해서 볼만 했다. 재밌지만 조금 씁쓸한 영화였다. 평점과 후기를 찾아보니 그리 좋진 않았다.
저녁은 파스타였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었다. 더 먹으라는 말에 조금 갈등했지만 살을 빼기 위해서 참았다. 그 대신 방에 들어와 젤리를 흡입한 건 안 비밀. 내일이면 9월도 끝이다. 매일 감회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