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계획표

파리의 안나 91

by Anna

푹 잤다.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뚜왈렛이 왔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임무 수행을 마치고 잡식을 했다. 항상 먹는 빵과 과일, 요플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시지와 삶은 달걀이 추가되어 있었다. 왠지 사육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배를 채우고 외출을 위해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와 언니께는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답답한 집을 벗어났다.


6호선을 타고 새로운 벼룩시장을 개척하러 나섰다. ‘글라시에흐’ 역에 내려서 지도에서 본 대로 길을 따라 쭉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하게 갈림길이 많이 나왔다. 왠지 잘못 온 것 같았지만 멀리 시장이 보이기에 그냥 쭉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장을 둘러보고 길가로 나섰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주 정확히 잘못 온 거였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 역 방향으로 갔다. 그곳에서 반대쪽 길로 쭉 걸어가니 벼룩시장이 보였다. 판매자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할머니들도 있었고,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가족 단위가 많아 보였다.


생각보다 큰 규모에 구석구석 구경을 하고 중간중간 마음에 드는 가방이나 원피스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구매하진 않았다. 벼룩시장을 하도 많이 와서 그런가. 조금 식상한 기분도 들었다. 예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시장의 끝에서 예쁜 가로수 길을 발견했다. 마침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별로 없어 챙겨 온 삼각대를 꺼내어 사진을 찍었다. 다만 카메라를 올려둘 곳이 마땅하지 않아 마음에 드는 구도를 잡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가을을 만끽하다가 다시 벼룩시장 탐방에 나섰다. 한 시간 정도 둘러보고 근처 빵집에 들어가 크로와상과 브리오슈를 하나씩 샀다. 그곳엔 판매 직원이 세 명이나 있었는데 셋 다 불친절했다.

버스를 기다리며 브리오슈를 한입 베어 물었는데 아무 맛도 안 났다. 배가 덜 고파서 그렇겠지 하고 다시 집어넣은 뒤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나는 83번 버스를 타고 싶었는데 처음에 잘못된 정류장에서 시간만 허비했다. 다시 제대로 된 정류장을 찾았는데 한 20분은 족히 넘게 기다린 것 같다. 앙발리드에 내려 내가 좋아하는 알마 다리 쉼터로 향했는데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고 당연히 앉을자리는 없었다. 슬슬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져서 편히 앉아 쉬고 싶었는데 쉴 데가 마땅하지 않았다.


게다가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은지 집에서 추울까 봐 고민하다 챙겨 온 플리스 재킷이 더욱 무겁게만 느껴졌다. 결국 마실 것을 사기 위해 마트를 찾아 헤매다 커피를 하나 사서 다시 앙발리드로 갔다. 잔디밭에 앉고 싶었지만 돗자리가 없었다. 벤치는 죄다 누군가의 차지였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그늘 진 잔디에 잠깐 앉았는데 왠지 모르게 찝찝했다. 외국 애들은 아무것도 안 깔고 잔디에 드러누워 자기도 하는데 난 그러고 싶진 않다. 결국 방황하다 다시 센 강가로 향했다.


걸으면서 계속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처 없이 방황하다 솔페리노 다리 쪽에 앉았다. 먹다 남은 브리오슈를 다시 먹었는데 배가 고파도 맛없는 건 똑같았다. 갑자기 모든 풍경이 안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이 안 좋았다. 아랫배도 아팠다. 생리를 시작하려나? 아직 할 때가 안 되었는데.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즐거울까. 나만 왜 혼자지? 아무도 말을 걸어주지 않네. 혼자인 사람도 없고. 플리스 재킷은 괜히 가져와서 무겁기만 하고. 차라리 돗자리를 챙겨 올 걸. 아니면 읽을 책이라도.


집이 답답해서 도망쳐 나온 거면서 다시 집에 들어가고 싶은 이 마음은 뭐지. 필기구를 좀 챙겨 올 걸. 지금 이런 감정 상태를 적고 싶은데 말이야. 혼자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한숨이 나오고 우울했다. 미래에게 하소연을 했다. 미래는 정말 좋은 친구다. 항상 내 고민을 들어줄 땐 내 입장에서 먼저 생각해준다. 힘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려다가 그냥 끝까지 걷기로 했다. 햇볕이 너무 뜨거웠지만 그늘을 찾아 걸었다. 겨우 집에 도착하여 손을 씻고 후회의 글을 써내려 갔다. 그리고 어제 못한 계획 짜기를 시작했다.


더 이상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후회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자각하고 깨어나야 한다. 정신 차리자.


<삶의 계획표>

하나. 아침 먹고 임무 수행 후 조깅 또는 퀵 보드 한 시간. (걷기라도 해라.)

둘. 점심 먹은 뒤엔 무조건 외출. (버스 정복하기)

셋. 오후 임무 수행 뒤 프랑스어 공부. (공부한 단어로 문장 세 개씩 만들기)

넷. 저녁 식사 후 불어 속담 공부. (1일 5개)

다섯. 자기 전엔 윗몸일으키기 꼭 할 것.(30번 이상)

여섯.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사진 10장 이상 찍기.

일곱. 나만의 프랑스 백과사전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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