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90
악몽을 꿨다. 프랑스의 한 공원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저 멀리 흑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였다. 그 흑인 방향으로 여자 흑인이 한 명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응시하며 걷고 있었다. 갑자기 남자 흑인이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어 여자에게 쐈다. 여자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다. 흑인은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행히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그를 주시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연이어 총소리가 나고 공원에 있던 다른 사람들 네, 다섯 명이 숨졌다.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차가 도착했다. 나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공원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경찰들은 그런 나를 발견하여 차에 태웠다. 그리고 흑인도 잡혀왔다. 그런데 그의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지 않았다. 아주 까만 흑인과 눈을 마주치고 그는 본인의 앞니 사이에서 무언가 꺼내어 나에게 던졌다. 작은 기폭장치였다. 하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그 폭탄을 피했다.
살아남았지만 무서웠다. 덜덜 떨며 집으로 달려갔다. 눈물이 나고 몸이 떨렸다. 나를 위로하러 온 남자 친구의 품에 안겨 잠에 들 무렵 방 밖으로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공원과 흑인, 경찰들은 다 프랑스인이었고 내가 도망쳐 온 방도 프랑스 집인데 남자 친구와 가족들이 나왔다. 그때부터 슬슬 꿈이라는 걸 알아챈 것 같다.
가족들이 방으로 들어오기 전 남자 친구를 침대 밑으로 숨기고 이불을 덮어 두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엉엉 울며 아까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눈치 없는 규한이가 이불을 달라며 침대 밑에 떨어진 이불을 집으려고 했다. 그러고 잠이 깼다. 깜깜한 새벽 다섯이었다. 결말이 황당한 개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에게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무서워서 그런지 잠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이 깬 것도 아니었다. 비몽사몽 상태로 남자 친구에게 카톡을 보내니 이른 시간에 일어난 것을 알아채고 걱정을 해주었다. 그렇게 다시 잠이 들었다. 모닝콜을 듣고 다시 일어나니 밝은 아침이었다. 안심하고 일어나 할머니와 아침을 먹고, 뚜왈렛을 기다렸다. 그런데 열 시가 넘어도 오지 않았다. 뚜왈렛을 끝내고 화장실을 가야 마음이 편하므로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10시 20분이 넘어서야 간호조무사가 왔고 처음 보는 여자였다. 다행히 그녀는 손도 빠르고 친절했다. 나에게 할머니의 딸이냐고 물었다. 불어로 질문했을 때는 알아듣지 못했다. 영어를 할 줄 아냐는 말에 그렇다고 하니 굉장히 더듬더듬 다시 질문을 했다. 그녀는 이것저것 질문을 했고 우리는 언어의 한계로 길게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나를 배려한답시고 계속 짧은 영어로 말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짧은 불어로 대답했다.
그렇게 뚜왈렛을 마치니 11시가 다 되어가더라. 급했던 볼일을 보고 씻었다. 오늘은 할머니의 정신과 검사를 위해 병원에 가는 날이라고 한다. 응급차가 와서 병원에 데려간다고 해서 병원 견학도 할 겸 따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은 정말 시간 약속 개념이 없는 것 같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 도착한 앰뷸런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드라마나 영화, 웹툰으로나 보던 응급차에 타보게 되다니 신기했다.
병원에 도착하여 접수를 하고 의사와의 면담을 위해 기다렸다. 꽤 큰 규모의 종합 병원이었는데 우리나라와는 달리 소박한 모습이었다. 이어 할머니 차례가 되고 진료실로 같이 들어갔다. 의사는 할머니의 관절 마디마디가 잘 움직이는지 테스트를 했고, 기억력을 검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할머니께서 기억이 잘 안 나시자 나와 할아버지를 보며 구원의 눈길을 보내셨지만 도와줄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그런 모습이 귀엽기도 했다.
검사를 다 마치고 다시 집으로 갈 앰뷸런스를 기다리는데 또 약속한 시간보다 늦게 왔다. 그런데 이번 응급차엔 여분의 의자가 하나밖에 없어서 나와 할아버지가 둘 다 탈 수 없었다. 결국 이곳 지리를 잘 모르는 내가 할머니와 함께 가고 할아버지는 버스를 타고 혼자 돌아오셔야 했다. 집에 도착하여 한숨 돌리고 저녁을 먹은 뒤 루브르에 갈까, 고민했다.
그런데 요새 살이 쪄서 급격히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저녁을 먹었더니 무언가 얹힌 듯 배가 쑤셔왔다. 결국 몸 상태로 인해 루브르는 포기하고 샤워 후 쉬었다. 지금은 저녁 임무수행까지 다 마친 상태다. 오늘은 부디 이상하고 무서운 개꿈을 꾸지 않기를 바란다. 결국 오늘 계획은 세우지 못했다. 벌써 파리에 온 지 90일 째다. 무사함을 감사하고, 더 나은 날들을 위해 노력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