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00
축! 100일! 특별할 건 없지만 그래도 기념적인 날이다. 나의 꿈의 도시 프랑스 파리에서 100일 동안이나 큰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 말이다. 아침 일과를 끝내고 오늘도 어김없이 조깅을 하러 나갔다.
비가 온 뒤로 날이 꽤 추워져서 긴 바지에 겨울용 남방을 걸치고 나갔다. 바람이 차다. 힘들었지만 열심히 뛰고 또 걸었다. 운동을 끝내고 돌아와서 샤워를 할 때가 가장 좋은 것 같다. 따뜻한 물로 몸을 녹이고 머리까지 감았다. 점심은 스테이크와 김칫국이었다. 무언가 안 어울리는 조화였지만 맛있게 잘 먹었다.
식사 후 할아버지께 부탁하여 거주 증명서를 받았다. 한국 문화원에 가 도서실 회원을 등록하기 위해서였다. 파리에서 한국어 책 도서관을 갈 수 있을 줄이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오늘따라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뿌리 염색을 하지 않아 지저분하게 내려온 흑모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어쨌든 지하철을 타고 이에나 역에서 내렸다.
지도를 보고 3번 출구로 나가 길을 따라 내려가니 태극기가 보였다. 건물도 멋있고 문화원 내부도 조용하고 깔끔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에게 도서실 등록을 하러 왔다고 말씀드리니 계단 아래로 내려가 왼쪽으로 꺾으라고 하셨다. 오랜만에 한국어로 안내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도서실은 작지만 알찼다. 준비해 간 거주 증명서와 서류, 여권을 내밀고 회원 등록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문화원 도서관의 회원카드를 받을 수 있었다. 디자인도 깔끔하고 예뻤다. 받아 들고 기쁜 마음으로 책을 골랐다. 하도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플 때까지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얼마 전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많은 감명을 받은 신경숙 작가님의 다른 소설책을 하나 빌렸다. 제목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 벨이 울리고’다.
대출을 하고 나와 문화원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도 구경하고 밖에서 인증 샷을 찍은 뒤 트로카데로 쪽으로 걸어갔다. 흐린 날의 에펠탑은 어딘지 쓸쓸해 보였다. 하필이면 샤요궁의 공사 중인 방향으로 걸어가는 바람에 빙 돌아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백일 기념으로 나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라데팡스로 향하는데 카드를 찍고 들어가자마자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항상 있는 호객 행위 거나 사기꾼인 줄 알고 눈길도 안 주고 6호선을 찾는데 끈질기게 “씰부쁠레”하기에 멈춰서 쳐다보았다. 맙소사. 검표원이었다. “아~”하고 깨달음과 동시에 나비고 카드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내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더니 카드를 다시 돌려주었다. 파리에 와서 처음으로 당해 본 검표였다. 에투왈 역까지 가는 길에 책의 앞부분을 조금 읽었다. 연애 소설이라던데. 일부였지만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
1호선으로 갈아타 라데팡스에 내려 이제는 정겹기까지 한 레꺄르트떵에 들어갔다. 우선 화장실에 들러서 급한 불을 끄고, 마카롱을 사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는데 웬일로 한 번도 헤매지 않고 찾을 수 있었다. 직원과 인사하고 마카롱을 고르는데 맛이 너무 다양해서 한참을 고민했다. 초콜릿, 피스타치오, 레몬, 커피 이렇게 총 4개를 샀다. 하나에 1.50유로였다.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고 초콜릿 마카롱을 하나 먹었다. 쫀득하고 달콤한 내가 원하던 맛이었다. 역시 초콜릿 사전에 실패란 없어.
이제 나를 위한 선물 두 번째인 반지를 하러 뉴룩 매장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에 마카롱을 파는 다른 가게를 발견했는데 그곳은 하나에 1.10유로였다. 짜증 났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냥 못 본 척 지나갔다. 그래도 오늘은 안 헤매고 뉴룩도 한 번에 찾았다. 다만 내가 사고 싶어 했던 그 반지 세트는 이미 품절이었다. 아쉬웠지만 다른 디자인들은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지하철에서 커피 마카롱을 먹었는데 무난한 맛이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었는데 예상치 못한 맛이었다. 역시 그냥 초콜릿이 최고야. 이후 오후 일과도 평소와 같다. 밀린 빨래도 했다. 세탁기에 이미 할머니의 옷가지들이 있어서 조금 고민했지만 양말, 수건과 함께 먼저 돌리고 이후 나머지 옷들을 한 번 더 세탁했다.
두 번째 빨래를 널다가 뚜왈렛이 와서 잠시 임무 수행을 하고 왔는데 할아버지께서 대충 널어놓으셨다. 굳이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내가 다시 원하는 대로 정리했다. 그리고 월요일 밤의 필수 코스인 비정상회담을 보고 이렇게 하루를 마감하고 있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이번 주 파리 날씨는 내내 ‘비’ 또는 ‘소나기’던데. 내일 아침에는 안 왔으면 좋겠다. 비 핑계로 조깅을 안 하고 싶지는 않다. 졸리다. 얼른 자야겠다.
그동안 수고했어, 은지야. 앞으로도 좋은 일만 생길 거야. 힘내자. 행복하자.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