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99
추운 아침이다. 밤새 기온이 많이 내려간 듯했다. 정말 잘 잤다. 기분 좋은 꿈도 꿨다. 심적으로도 안정되었다. 배도 안 아프다. 다만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뚜왈렛을 돕는 일은 썩 유쾌하진 않다. 어쨌든 그렇게 아침 임무를 끝내고, 간단한 식사를 하고, 오늘은 다시 힘을 내어 조깅을 하러 나갔다.
바람이 굉장히 많이 불고 추웠다. 거리의 파리 시민들의 옷차림은 이미 겨울이었다. 그런데 난 5부 반바지에 얇은 남방 차림이었다. 뛰면 좀 더워지겠지 싶어 그대로 걸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운동하는 사람이 많았다. 오늘은 해도 없이 흐린 날이라 그늘만 찾아 뛸 필요도 없었다. 체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뛰기 시작했다. 살이 쪄서 운동을 하는 날이 오다니, 그것도 파리에서!
힘들었지만 스스로에게 채찍을 가하며 뛰었다. 하지만 생리 때문에 좋은 컨디션은 아니어서 약 25분 정도 뛰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 그래도 뛰고 나니 몸에서 조금 열이 오르는 듯했다. 집에 도착해 따뜻한 물로 씻고 점심을 먹었다. 아직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다. 밥을 먹는데 할아버지께서 어제 사실 혼자 물을 사 오셨다고 했다. 내가 아파서 같이 못 간 것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보다는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셔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갑자기 언니가 스테이크를 위해서 키위가 필요하다며 할아버지께 사 올 것을 요구했다. 그때 시간은 12시 반이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마트는 1시에 닫는다. 얼른 밥을 먹고 마트에 다녀오자는 할아버지의 말이 싫었다. 굳이 왜 지금. 어쨌든 꾸역꾸역 남은 밥을 입에 쑤셔 넣고 잽싸게 옷을 갈아입은 뒤 백팩을 메고 집을 나섰다.
마트에 도착해 채소 코너부터 둘러보는데, 언니가 사 오라고 적어주신 물건들은 다 시들고 형편없었다. 결국 키위랑 토마토만 고르고, 반찬에 필요한 모짜렐라 치즈와 맛살, 아침에 먹을 빵과 그놈의 물까지 담았다. 계산을 하고 집에 가니 딱 한시였다.
오늘은 10월 첫째 주 일요일이므로 대부분의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로 개방된다. 따라서 나는 오늘 오랑주리 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오르세로 갈까 고민했지만 시간도 얼마 없고, 조금 더 작은 규모를 선택했다. 나가기 전 가는 길을 대충 검색해보니 콩코르드 역에서 가깝다고 했다. 다행히 12호선이 쭉 연결되어 편히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또 오랜만에 발동된 길치 레이더. 출구를 못 찾고 헤매다가 반대 방향까지 걸어갔다 다시 오는 수모를 겪었다.
겨우 알맞은 출구를 찾아 나와서도 표지판을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맞게 가는 건지 의아해할 때쯤 ‘뮤제 뒤 오랑주리’라는 안내판을 발견하고 안심했다. 역시나 줄이 길었다. 그 긴 줄 끝에 붙어 입장을 기다렸다. 아마 30분보다 조금 더 기다린 것 같다. 입장할 땐 두근두근했다. 말로만 듣던 모네의 수련 연작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되다니.
입장 시엔 당연히 가방 검사도 하고, 보안 검색까지 하더라. 당연히 무사통과한 후 팸플릿을 가지러 갔는데 한글은 없었다. 일본어는 있더구먼. 쳇. 그냥 불어판으로 하나 집어 왔다. 오디오 가이드는 빌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언어 중에 한국어가 없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어쨌든 제일 먼저 0층의 모네의 수련관으로 입장. 사진으로는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크게 놀랍진 않았지만 그림들이 정말 인상 깊었다.
나는 ‘아침’이 제일 좋았다. 한참을 앉아서 들여다보고 느꼈다. 솔직히 보자마자 큰 감동이 몰려온다거나 하는 과장된 반응은 없었지만 그래도 평온한 느낌을 주니 좋았다. 그림에 워낙 소질이 없는 나이다 보니 신기하기도 했다. 어떻게 유화 물감으로 빛의 색을 표현할까. 수련 연작을 다 감상한 뒤 지하 1층에서 기념품 샵 구경을 했다. 모네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큐브가 있었는데 정말 사고 싶었지만 11.50유로라는 깡패 같은 가격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 2층엔 특별전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르누아르의 그림도 실제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잘 몰랐던 화가들의 그림도 감상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여럿 발견해서 좋았다. 하지만 역시 그림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거나 매료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공짜로 이런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기뻤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다시 수련의 ‘아침’을 감상하고 박물관을 나왔다.
날이 정말 흐렸다. 그래도 오랜만에 튈르리 정원을 한번 둘러보기 위해 바로 지하철역으로 가지 않고 콩코르드 광장까지 걸었다. 근데 여기서 또 지하철역을 못 찾겠더라. 결국 개선문을 향해 걷다가 그랑팔레 옆 샹젤리제 클리멍쏘 역까지 갔다. 진짜 웃긴 게 그냥 콩코르드 역에서 12호선 타고 쭉 오면 되는데 그걸 못 찾아서 클리멍쏘에서 1 정거장 뒤인 콩코르드 역까지 가서 환승을 해야 했다. 나란 길치 정말 답이 없다. 아무튼 집에 도착해서 좀 쉬다가 저녁 뚜왈렛을 했다. 또 그 말 많은 아줌마였다. 휴.
저녁은 파스타로 간단히 때우고 잠깐의 불어 공부 뒤에 프잘사에서 이것저것 정보를 찾다가 ‘파리 한국 문화원’이라는 곳을 알게 됐다. 여기에 한국 책 도서관이 있단다. 정말 신나는 소식이다. 솔직히 프랑스에 와서 불어로 된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그건 정말 내 수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일도 없는 요즘 독서가 매우 땡기는 나날이었는데 진짜 기쁘다.
내일 할아버지께 거주 증명서를 부탁드려서 한국 문화원에 가 회원 등록을 할 예정이다. 그곳엔 한국어를 배우는 프랑스인들도 많이 온다고 하니 운이 좋으면 프랑스인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 않을까? 파리 D+99다. 벌써 백일이라니. 정말 내일 혼자 자축파티라도 해야 하나 싶다. 나에게 선물을 하나 해야겠다. 기분 좋은 하루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