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01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언제나 힘들다. 오늘은 핸드폰이 방전되어 알람도 울리지 않는 바람에 9시까지 잤다. 다행히 뚜왈렛은 내가 정신을 차린 뒤에 왔다. 모든 일을 끝내고 운동을 하러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비가 왔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비까지 맞아가며 뛸 생각은 없었기에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책을 읽었다. 어제 빌려 온 책 말이다.
책 속의 윤 교수가 크리스토프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모두는 크리스토프이기도 하고, 그의 어깨에 올라 탄 아이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센 강의 이 쪽 편에서 저 쪽 편으로 건너가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좋은 내용인 것 같아 친구에게 보내주었다. 다소 긴 내용이었지만 들려주고 싶었다. 열심히 쓰고 있는데 할아버지께서 민향 언니가 오지 않는다며 연락을 해보라고 하셨다.
점심은 0층 식당에서 먹던 ‘le Pot au peu’였다. 생김새도 맛도 정말 똑같았다. 식당에선 1인분에 21유로라던데, 갈비 살과 채소만 적당히 사면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요리였다. 민향 언니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밥을 먹고 나서는 어디에 갈까 고민을 했다. 사실 하루하루가 고민이다. 분명 나에게 주어진 외출 시간은 길어봤자 1시부터 5시인데. 뭐 가끔 벼룩시장에 갈 때엔 점심을 거르고 11시쯤 나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날씨도 별로 안 좋고 실내 위주로 돌아다닐 생각에 책을 뒤적이다 그냥 버스 투어를 하기로 했다. 나비고 카드도 써먹을 겸 새로운 버스 노선도 알아볼 겸 집을 나섰다. 날이 정말 많이 추워졌다. 우선 집 건너편에서 95번 버스를 타고 오페라 쪽으로 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버스가 11분 뒤에 온다는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까워 그냥 몽파르나스 타워 쪽으로 걸어갔다. 걷다 보면 버스가 오겠지. 매일 앙발리드 쪽만 가서 몽파르나스는 낯설다. 거리엔 바빠 보이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나만 여유만만. 바람이 많이 불어 머리가 흩날렸다.
저번에 할아버지와 함께 간 맥도날드까지 걸어간 뒤 버스를 탔다. 그런데 만원이었다. 내가 상상한 버스 투어는 이런 게 아닌데. 여유롭게 창밖을 바라보다 책도 읽고,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충동적으로 내리는, 편안한 투어를 상상했는데 현실은 달랐다. 사람이 너무 많아 앉지도 못하고 버스 손잡이에 의지해야 했고, 뒤로 매고 있던 백팩은 사람들이 자꾸 쳐서 불편했다. 그래서 그냥 조금 가다 내려버렸다. 다른 버스를 타기 위해.
96번을 타고 생미셸 쪽으로 갈 생각으로 정류장에 앉아 기다렸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파리 거리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다. 책에서 읽었는데 파리시를 정비할 당시 건물의 높이는 20미터로 정하고 0층에는 모두 식당이나 가게를 들여놓았다고 한다. 약 백여 년 전부터 파리 거리를 지키던 그 건물들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 곧이어 도착한 96번 버스를 탔다. 여전히 사람은 많았지만 생 미셸까지 가는데 문제는 없었다.
내리자마자 보이던 서점에서 다이어리를 구경했는데 정말 다 안 예뻤다. 싸구려라 그런지 재질도 별로였다. 흥미가 떨어져 바로 노트르담 대성당 쪽으로 갔다. 매일 입장 줄이 너무 길어서 내부를 관람하는 것을 포기했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안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단 줄이 짧았다. 파리에 온 지 세 달 만에 노트르담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굉장히 크고 웅장했다. 종교적인 지식이 없어 뭐가 뭔지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내부는 정말 넓었고, 구석구석 구경하며 사진을 찍으며 한 바퀴를 돌았다.
출구 쪽에 기념 메달 자판기가 있었는데 하나에 2유로였다. 하나만 뽑아 볼까, 하다가 그냥 나왔다. 저런 술수에 말려들 수 없어! 성당에서 나오자 비가 조금 더 많이 내렸다. 가방에서 챙겨 온 우산을 꺼내 쓰고 다시 아무 버스나 잡아서 탔다. 42번 버스였고 우연의 일치로 내가 혼자 살던 고블랑 역을 지나 항상 장을 보던 ‘르 크렘린 비세트르’까지 갔다. 그곳에 내려 오랜만에 구제 숍 구경도 하고, 오샹에서 필요한 물건들도 살 생각으로 쭉 앉아서 갔다.
몽쥬 역도 지났는데 내려서 미스트를 살까 하다가 지나쳐버려서 다음을 기약했다. 버스 방향과 반대로 앉았더니 조금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른 바깥의 상쾌한 공기가 쐬고 싶어졌다.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한 아저씨가 종이를 떨어뜨리기에 알려주었다. 종이의 크기를 봐선 로또인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했고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어주었다.
이후 비세트르 역에 내리기 위해 버스의 문 앞에 서 있는데 유모차에 탄 아기가 갑자기 내 손가락을 잡았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기에 아기가 잡은 손가락을 흔들자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기분이 좋아져 한참을 그렇게 서로 웃으며 손을 잡고 있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아이의 엄마는 유모차를 끌고 내렸다. 나는 아기에게 손 인사를 한 뒤 구제 숍으로 향했다. 3유로 코너에서 마음에 드는 바지를 발견했는데 지금의 내 몸뚱이로는 맞지 않을 것 같아 구매는 포기했다.
마트에 가서 목장갑을 찾았는데 안 보였다. 결국 나중에 라데팡스에 가기로 하고 필요한 키친타월과 아침마다 발라 먹을 초코가 들어있는 버터를 골랐다. 이미 4시가 넘은 시간이었기에 조급한 마음으로 계산을 하러 갔는데 하필이면 내 앞에 서 있던 아저씨와 아줌마가 물건을 잘못 골라오는 바람에 지체가 되었다. 대충 지켜보니 지난 행사 상품을 골라와 놓고는 왜 할인이 안 되냐고 따지는 것 같았다. 두 번이나 연달아 그런 일이 생기자 계산하는 직원은 많이 화가 나 보였다. 결국 내가 계산할 차례가 되어서 그녀는 돈 통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정말 표현이 자유로운 나라다. 아무튼 나는 별문제 없이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쁠라스 디딸리’ 역에서 6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하는데 바보같이 그 전역에서 내려서 멍 때리다가 다행히 지하철이 조금 늦게 출발하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탈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급히 온 보람도 없이 뚜왈렛은 7시가 넘어 저녁을 먹는 도중에야 왔다. 먹다 말고 임무 수행을 완료한 뒤 남은 쫄면도 다 먹어치우고 불어 공부를 했다.
엄마랑 규한이가 내년 2월 17일에 오기로 했다. 오늘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고 연락이 왔다. 그때까지 불어 실력이나 늘려놔야지. 내일은 퐁피두센터에 갈 거다. 현대 미술관을 관람하려는 목적은 아니고, 저번에 애경 어머니께서 알려주신 무료 신문도 얻을 겸, 내부 구경도 할 겸 해서 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마레 지구도 돌아다니고 또 아무 버스나 골라 타야지. 내일 아침엔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