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102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오늘은 간호사와 간호조무사가 혈당 체크와 뚜왈렛을 함께 해서 별로 도울 일이 없었다. 다른 날보다 수월하게 임무를 마치고 아침을 먹었다. 어제 마트에서 사 온 초콜릿이 콕콕 박힌 버터가 있어 좋았다. 그런데 할아버지께서 쓰레기를 버리고 오시면서 빵 오 쇼콜라를 사 오셨다. 이미 식빵을 두 개나 먹어서 배가 불렀지만 꾸역꾸역 거의 다 먹었다. 오늘도 아침 조깅은 못 하게 되었다. 날씨 때문에 조금 나른해진 몸으로 뒹굴 거리다가 규한이와의 대화로 내년 계획이 조금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우선 복학은 내년 2학기에 할 거다. 코스모스 졸업은 싫었는데 어쩔 수 없다. 오히려 훗날 취업 준비를 위해서는 코스모스 졸업이 더 나을 수도. 아무튼 나는 프랑스 워킹 비자 1년을 꽉 채우진 못할 것 같다. 요새 미용실에서 연락도 안 오고, 프랑스 존에도 아르바이트 자리가 잘 올라오지 않는 걸 봐서는 고정적 수입을 얻기 힘든 상황이다. 따라서 내년 2월 17일 엄마와 규한이가 프랑스에 오면, 엄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22일까지는 파리 여행을 하고 이후 규한이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3월 7일까지는 약 2주간 동생과의 유럽 여행을 해야겠다.
사실 그 전에도 한국에 다시 돌아가기 전에 주변 유럽 국가들을 여행하고 싶었는데 만약 6월까지 파리에서 살게 되면 아무래도 기본적인 생활비가 드니까 그 돈을 아껴서 미리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3월까지면 파리에서 약 9개월을 생활한 건데 그 정도면 충분히 만족한다. 조금 남는 아쉬움은 ‘다시 돌아올게’라는 약속을 하게 해 주니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나 예산을 짜 본 것은 아니지만 우선은 돈 아껴 쓰기를 실천해야겠다.
이번 달은 빼고 남은 4개월 간 200만 원으로 생활하고 남은 450만 원으로 여행을 하고 한국에 돌아가겠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일주일간 여행 정리 및 시차 적응을 하고, 바로 아르바이트를 구할 것이다. 돈을 벌고 포토샵이나 컴퓨터 그래픽, 디자인 자격증을 딸 것이다. 불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내년 6월에는 내일로를 갈 것이다. 남자 친구와 일주일, 혼자 일주일 정도. 그리고 복학을 준비할 것이다. 11학번 뒷방 늙은이가 학교에 돌아가서 할 수 있는 일은 학점 잘 받기뿐이다. 대략적인 2015년 계획의 틀이 잡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남은 2014년의 생활이다. 지금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되 불어 공부를 더욱더 열심히 (수능 시험을 본다는 마음으로, 당연히 그 마음이 되살아나긴 힘들겠지만) 하며 최대한 돈을 아끼며 살기. 그리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뱃살을 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스트레스는 모든 병의 원인. 좀 더 나은 내가 되어 돌아가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 씻었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지만 외출을 해야 한다. 이건 의무다. 나와의 약속이다. 다행히 밖에 나가자 비가 그쳤다. 해도 살짝 비추는 것이 날씨가 좋아졌다. 퐁피두센터에 가기 위해 70번 버스를 탔다. 종점인 시청역에 내려 퐁피두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입구를 못 찾아 센터를 한 바퀴나 빙 돌아야 했다. 간단한 가방 검사를 하고 인포메이션에 가서 안내 책자를 훑어보는데 내게 필요한 정보는 없었다. 부티크에 가서 생활용품과 기념품을 둘러보고, 반대쪽에 있는 서점도 구경했다. 엽서의 종류가 다양했다. 굉장히 탐나는 것들이 많았다.
다양한 그림의 퍼즐도 300피스부터 1000피스, 3000피스까지 있었다. 책도 구경했다. 디자인과 데생, 타투에 관한 책들에 관심이 갔다. 구석구석을 둘러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집에 가기 전에 오랜만에 마레 지구의 빈티지 숍에 들렀다. 숨어 있던 킬로샵2를 발견하여 기뻤다. 굉장히 규모가 크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는 신발도 발견했으나 너무 무거워 가격이 꽤 나갈 것 같았다.
킬로샵 구경을 마치고 프리피스타 2호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내가 요즘 자주 드는 가방을 득템한 곳이라 가방 위주로 둘러보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굉장히 상태 좋은 (거의 새 거) 가방을 득템 했다. 가격도 5유로로 저렴했다. 20유로짜리 지폐를 내미니 10유로와 5유로를 거슬러 주었는데 순간 10유로 지폐가 너무 빨간색이라 이게 맞나? 싶었다. 혼자 사기당한 건 아닐까, 망상까지 했다.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하늘도 파랗고 예뻤다. 집에 돌아갈 때도 70번 버스를 탔다. 다행히 비는 계속 내리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고 쉬다가 곧 임무수행을 했다. 이후 오후 일과는 또 어제와 같다. 저녁을 먹고 불어 공부를 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오늘은 영화를 봤다. 프랑스 영화다. 39살의 여자 주인공과 19살의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하는 내용이었다. 20살 차이. 난 못 한다. 재밌긴 했다. 불어를 알아듣고 싶었지만 들리는 건 여전히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다.
파리에 산 지 3개월이 넘었는데 이 정도 수준이 보통인 건가? 나는 언제쯤 할아버지처럼 술술 말할 수 있게 될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하루가 너무 짧다. 적당히 자고, 때 맞춰 먹고, 할 건 다 하는데 부족한 느낌이다. 그나저나 내일은 어딜 가지. 비가 오면 이동에 제약이 있어 불편하다. 퀵 보드도 한참 못 탔네. 비 싫어.